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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진첩/늦은목이~백두산

삽당령~석두봉~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참으로 빨리도 달리는 세월이라는 속도를 체감하면서 또 주말을 맞이한다. 

나는 지지난 주와 지난 주, 무려 2주 동안을 쉬었다. 나는 평소 산행 중에도

왠만하면 자주 쉬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산길을 거닐다가 잠시라도 멈춰서면 불현듯 내 인생도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도 전혀

산길을 도외시 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에도 짬을 내어 모락산에도 한 차례 올랐었고, 파주의 박달산에도

올랐었고, 또 이번 주 수요일에는 땡볕을 받아가며 삼성산에도 올랐었다.

쉬었다는 의미는 적어도 그 기간 동안에는 산길다운 산길을 걷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내게 있어서 2주일이라는 기간은 참으로 지루할 것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산길을 보다 더 많이 걷기 위해서, 보다

더 오래 걷기위해서 아무리 급해도 최소한 2주일이라는 충전의 기회가 필요

했었다. 

 

본디 산이란 높고 낮음을 떠나, 험하고 편함을 떠나, 산은 어디까지나 산이

지만, 내가 말하는 2주간의 휴식이라는 의미는 산길은 걸었으되,

근교산에만 머물렀다는 얘기이고, 3시간 미만의 비교적 짧은 시간의 산만을

골라 걸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지금부터 "백두대간 마루금" 이라는 산길다운 산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산행 일시 : 2009. 8. 22~23일(토요 무박)

산행 코스 : 삽당령~석두봉~화란봉~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산행 시간 : 약 10 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백두대간 산행을 이어가기 위하여 다시 삽당령에 왔다. 강릉과 정선을 잇는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는 제법 큰 고개였다고 한다. 당시 오지 마을이었던 임계

주민들은 강릉에서 소금, 해산물과 곡식 등을 구입한 후 이 고개를 넘어왔다고

한다.▼

 

 

새벽 2시 30분, 한참 꿈길을 거닐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산길을 걷기위해 이곳으로

왔다. 야참인지 아침인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샜는데 밥맛이 있을리가 없겠지만 그래

도 한 술 떠야만이 장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막 끝내고 산행 준비에 여념이 없다. ▼

 

 

드디어 고행길이 시작되었다. 우린 닭목령을 향하여 힘차게 진군을 하여야 한다. ▼

 

 

들미재(810m)로 향했다. 들미재는 들미골과 용수골을 넘나들던 고개로 농기구나

그릇 등을 만들 때 쓰이는 들미나무가 많아 들미재라는 이름을 얻은 고개라고 한다. 

 

그러나 들미재는 대간에 오르기 전에 미리 예습을 해 왔기 때문에 여기쯤이겠구나

하는 짐작이 갈뿐 칠흑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미재를 조금 지나니 석두봉(石頭峰, 982m)이 나타났다. 정확히 산행 시작 2시

간만이었다. 정상 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머리에 바위를 올려놓고 있는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석두봉을 지나면서 "석두(石頭)"라는 이름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리 어릴 적에

머리회전이 몹시 둔한 사람을 일컬어 석두라고 하였다. 조금 더 심한 표현으로는

"돌대가리"라고 불렀었다.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

 

 

화란봉에 도착했다. 화란봉(해발 1069m)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에 위치한

산이다. 화란봉은 이름 그대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화관이 정상을 중심으로 겹겹

이 에워싼 형국이 마치 꽃잎 같다고 해서 얻은 지명이다.

 

이 산의 산행기점인 벌마을에는 용수골이 있는데 재미있는 전설을 전한다. 오랜

옛날에 이무기가 하늘로 오르다 힘이 부쳐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 때

자국이 용수골 너럭바위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시대를 살아왔던 이들의 삶이 담겨 있는 듯했다. 워낙 잠에 취했던 터라 그

냥 정상목만 촬영하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땅바닦에 떨어져 있는 정상목을

저렇게 나무에 갖다대고 촬영해야 했기에 부득이 정상목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경한, 최연복 부부. 금실 좋은 부부라고 알리고 싶었을까? 백두대간의 대장정에

부부가 함께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까? 대간 길 곳곳에 조그만 현수막이

가끔 눈에 띄였다. ▼

 

 

화란봉에서 닭목재로 하산하는 길목에 나타 난 멋진 소나무들. 온갖 모진 풍상을

다 겪었을 나무들이었지만 그 웅장함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

 

 

 

닭목령에 내려섰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닭의 목에 해당하는 지역이기에 '닭목이'

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닭목령은 오늘 산행 중 중간지점에 해당된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산길이 그리 험란한 곳이 없었기에 다소 힘을 비축할 수 있어

서 이어지는 구간도 별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뿐만아니라 이 구간은

이미 다녀 온 구간이었기에 독도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이 고루포기산으로 향하는 등로이다.▼

 

 

유난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닭목재를 출발하여 고루포기산으로 향하고 있

는데 길가에 부끄러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달맞이꽃이 나타났다. 노란 달맞이

꽃이 애잔했다.

 

이름 그대로 밤이 되면 활짝 피어 '달을 맞는 꽃' 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

기가 사랑하는 달에게만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밤 시간 내내 활짝 피

어 달을 바라보는 달맞이꽃은 아침이 되면 꽃잎을 오므려 모습을 감춘다고 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맹덕목장을 지나 점점 고루포기산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숲은 고요했다. 그러면서도

장엄했다. 곧게 뻗은 건장한 소나무들이 있어서 숲이 더 웅장해 보였다. ▼

 

 

닭목령에서 2.3km를 달려왔다.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대관령에 이를 것인지..

서서히 다리에 힘이 빠져가고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람들의 조그만 부주의로 수백년을 가꾸어 온 숲들이 일순간에 잿더미가 돼버린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참기 어려웠을까? 인간들이 저지른그 무서운 산불을

이겨낸  금강 소나무의 강인한 모습을보니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울 따름이다.▼

 

 

 

고루포기산은 아직도 1.3km를 더 가야만 한다.평지 길이야 그 정도면 아주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지만 산길이 어디 그런가, 저 거리라면 때로는 1시간 이상도 걸릴

수 있다.▼

 

 

닭목재에서 고루포기산에 이르는 곳곳엔 고냉지채소밭이 있었다. 태백 매봉산의

고냉지채소단지, 삼척 숙암리의 고랭지채소재배단지와 함께 백두대간의 3대

고랭지채소재배단지에 속한다.

 

드디어 고루포기산(1238.3m)에 올랐다. 강원 평창군 도암면 수하리와 강릉시

왕산면 고루포기 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는 태백산령의 지맥인 해안 산령에 딸

려있는 산이다. 다복솔이 많아 고루포기라 칭해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로쇠 나무도 많다고 한다.▼

 

 

해발 1300여미터의 백두대간 길의 중요한 산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정상표지석도

하나 설치돼 있지 않았다.▼

 

 

고루포기산을 지나 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강릉의 산하가 너무

자연스럽고 평화스럽다. 산길을 걷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자연과

가까이서 또 다른 자연의 모습을 바라 본다.

 

자연이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다. 오직 자연만이 저

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아, 연리지! 말로만 듣던 그 연리지를 만났다. 대간 길에서 연리지를 만났다. 하나

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묘한 삶을 살아가는 연리지, 오랜시간 미움과 사랑

이 교차하면서 서로에게 동화되고 겉모습까지 닮아가게 된다. 그

 

렇게 둘이지만 한 몸처럼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연상하고 그리움

을 떠올린다. 아직도 못다 한 사랑이 많은 때문인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가슴에

가득하기 때문인지 오늘 연리지를 만나면서 초록빛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싶다. 나도 연리지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서로 다른 몸으로

태어나 살아가려다가 하나의 몸으로 살아가는 나무들. 가지들이 맞닿은 채 살아

가면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뿌리도 몸도 하나가 되면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한다.▼

 

 

등산이란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나가면서 미지의

곳, 높은 산으로 끊임없이 향해가는 산악운동이며 동산을 위한 등산, 등산이 주는

기쁨 외에는 아무 목적이 없는, 산에 오르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어떠한 의도를

갖지 않는 육체적, 정신적 스포츠이다. ▼

 

 

행운의 돌탑은 아직도 2.4km를 더 가야한다.▼

 

 

영동고속도로가 뚫려 있는 횡계치를 지나니 사람들이 쌓아 놓은 행운의 돌탑이 있었다.

정성스레 돌 하나를 주워 탑위에 올리며 소원을 빌었다.▼

 

 

 그 돌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도 촬영했다. ▼

 

 

돌탑에서 능경봉까지는 거리는 바로 지척이지만 오르막 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파른 고갯길이라도 산길은 한발, 한발 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네 인

생여정이야 어디 그런가?

 

순리를 무시하고 몇 걸음씩 건너뛰거나, 심지어는 날아오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날개도 못 갖춘 사람이 날아오르려다 여지없이 추락하고 마는 꼴을 보노라면 그

무모한 욕심이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드디어 능경봉(陵京峰, 1123.2m)에 올랐다. 능경봉은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및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에 걸쳐 있다. 동쪽으로는 짙푸른 동해가 북쪽으론 대관

령의 광활한 초원이 남쪽과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가지 친 산줄기들이 첩첩

물결을 이루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

 

 

 날머리인 대관령은 이제 겨우 1.8km만 남겨두고 있다.▼

 

 

가까이는 제왕산이 멀리는 동해바다가 보인다.▼

 

 

멀리 대관령 풍력발전소의 모습들이 보인다,▼

 

 

정오가 지나자, 폭염이 내리쏟기 시작했다. 어차피 산행 날머리인 대관령에는

물 한 모금 나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세면 정도는 할 수 있을 물이 필요했다.

다행히 산불감시 초소 바로 앞에 시원한 물이 있었다. ▼

 

 

대관령(大關嶺, 865m) 가는 길 동쪽에는 이미 다녀 온바 있는 제왕산(帝王山,

840.7m)이 있다. 제왕산은 고려 말 우왕(禑王, 1364~1389)이 쫓겨 온 곳이다.

우왕은 공민왕의 시녀 반야(般若)에게서 얻은 아들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이 죽은 후 10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

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몰려 왕위에서 쫓겨났다.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강릉

으로 옮겨진 후 이성계에 의해 1389년 살해되었다고 한다.

 

권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왕이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곳이 바로 지금의 제왕산이다. 그곳에는 당시에 쌓았다는

제왕산성이 남아 지나간 역사의 아픈 기억들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다. ▼

 

 

산행 날머리인 대관령에 이르렀다. 대관령은 강원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서울과 영동을 잇는 관문이다. 사람의 운명이 기구하듯이 길의 운명도 기구하

다.

 

영동고속도로 확장되기 전만해도 북적대던 고갯마루건만 지금은 456번 지방도로로

강등되고 말았다. 아래 사진은 영동고속도로 개통기념비의 모습이다.▼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기 전에 부터 있었던 대관령 휴게소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풍력발전소의 바람만큼이나 썰렁하다. ▼

 

(백두대간 제23~24구간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