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희끗. 세월의 무게에 짖눌린 탓일까? 역시 무박산행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만큼
힘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시작하면서 이제 무박산행은 선
택이 아닌 필수사항으로 자리잡고 말았다.
한 달에 두어번씩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오늘도 그렇고 다음 주 지리산 대종주도 물론 무
박산행이다. 그러나 오늘 산행은 은근히 걱정스럽다. 댓재에서 백봉령 구간을 걷는 오늘
산행은 대간길에서도 힘들기로 소문난 구간이다.
그러기에 보통 이 구간은 두. 세 구간으로 나누어 산행한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무더운
여름날에 장장 30여km의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행하기로 하였다. 산행은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한 힘든 만큼 보람 또한 큰 것
이니 말이다.
산행 일시 : 2009.6.27~28(토요무박)
산행 코스 : 댓재~햇댓등~통골재~두타산~청옥산~고적대~갈미봉~이기령~상월산~
원방재~백봉령
산행 시간 : 약 13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힌 댓재.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나마 사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새벽 2시 40분경에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문제의 햇댓등 삼거리..댓재에서 출발하여 20분쯤 오르면 햇댓등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두타산으로 향할려면 좌측 고개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
데 20 여명의 산꾼들이 무의식적으로 맨 선두의 뒷꿈치만 보면서 무심코 직진
해 버렸다.
무려 1시간 30 여분 동안 알바를 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따
라 출발이 늦었던 나는 다행히 알바를 면할 수가 있었다.▼
댓재 30분, 두타산 3시간이라고 돼있으나 막상 산행을 하다보면 댓재는 20분,
두타산은 2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주파할 수 있다. ▼
산행 시작 한 시간 여만에 통골재에 도착했다. 졸린 눈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이 상기돼 있다.▼
두타!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인 두타(頭陀)는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과 몸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산은 삼척시의 영적인 뿌리가
되는 산이며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산이다.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산은 무릉계곡, 조선시
대 석축산성인 두타산성,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
(또는 쉰우물)을 비롯하여 많은 명승고적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빼어난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어 옛 선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금강산에 버금가는
관동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
두타산은 삼척. 동해시의 분수령으로 이 두 고장을 대표하는 산이며 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진다. 두타산은 인간사의 모든 번뇌를 털어 없애고 물질을 탐착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산어귀의 삼화사.천은사의 모산으로 자리잡고 있다.두타산은 청옥산 고적대와 함게
해동삼봉으로 불리우고 있다.▼
해발 1353미터의 두타산 정상. 저렇게 높은 곳에 묘가 하나 있었다. 무슨 연유로
이리 높은 곳에 묘가 있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두타산 정상에서는 희뿌연 날씨탓에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청옥산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찬란한 태양이 힘차게 솟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범털봉이다. 옛날에 범이 많이 출몰하였던 곳이었을까? ▼
박달재이다. 박달재라는 이름을 가진 재가 이곳에도 있었다. 내가 알기로도
박달재는 전국에 서너 곳이나 된다.▼
문바위재이다. 청옥산은 아직도 30여분은 더 가야만 한다. ▼
청옥산 정상. 준비해 간 식수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여름산행을 감안하여 식수
3리터에 막걸리 한통을 준비했는데 이곳 청옥산에 오는 동안에 많이 마셨던 것이다.
다행히 청옥산에는 식수를 보충할수 있는 샘터가 있었다.
바로 보이는 저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면 샘터가 나온다. ▼
드디어 샘터에 도착했다. ▼
]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샘터에는 물을 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물뚜껑을 이용하여 간신히 식수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어렵사리 보충한 식수를 마실 수가 없었다.
물에 분순물이 많이 들어가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
해발 1403미터의 청옥산 정상이다. 청옥산은 동해시 삼화동(三和洞)과 삼척시
하장면(下長面)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高積臺, 1353.9m)와 함
께 '해동삼봉(海東三峰)'으로 불리는 산이다.
청옥(靑玉)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이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때 왜군 5,000명이 백
두대간을 넘어 이 지방에 쳐들어왔을 때 이곳 사람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에 당
당히 맞섰다고 한다.
아직도 의병들의 곧고 굳은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듯 청옥은 푸른빛을 발하며 말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
청옥산 정상에 있는 길라잡이이다. 우리는 연칠성령을 거쳐 고적대로 가야 한다.▼
일곱 험준한 산등성이 일곱 별처럼 연이어 있다 하여 이름 붙은 연칠성령(連七星嶺,
1184m)이다. 예로부터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 불리웠다.
이 난출령 정상을 망경대라 하는데 인조 원년 명재상 택당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망경(望京)한 곳이라 전해진다. ▼
해발 1354미터의 고적대 정상이다. 고적대는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를 이루어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
지고 있다.
동쪽으로 뼏혀진 청옥산, 두타산과 더불어 해동삼봉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고
적대 오르는 길은 참으로 가파른 암능구간이었다. 때문에 이곳에 오는 동안에 체력
소모가 무척 많았다.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는데.....ㅠ ▼
고적대에서 지나온 산길을 뒤돌아 본다. 바로 뒤쪽에 있는 산이 청옥산이고 좌편에
있는 희미한 산이 바로 두타산이다. ▼
배가 허기져 오기 시작했다. 고적대 정상에서 식사를 할려고 했으나 정상주변이
너무 좁아 가다가 적당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고적대에서 한 참을
내려오니 고적대 삼거리가 나타났다. ▼
고적대를 지나 적당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때가 아마 9시 전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의 식사는 아침인가, 점심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을 달리는 순간은 힘이 들지만 식사시간만큼은 즐겁
기만 하다. 우선 갈증을 해소하고자 시원한 서울 막걸리를 꺼내들었다. ▼
갈미봉 가는 길의 비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해발 1260미터의 갈미봉 정상. ▼
이기령(耳基嶺, 810m)으로 향했다. 이기령은 동해 곤로동과 정선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이다. 임계의 도전리와 가목리 사람들이 삼척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구
하기 위해 넘나들던 소중한 고개이다.
갈미봉에서 이기봉으로 향하는 길은 지루했다. 잡목이 우거진 산길은 나의 온 몸을
갈기갈기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때문에 많은 대간꾼들이 이곳을 날머
리로 하여 산행을 멈춘다고 한다. ▼
하지만 우리는 백봉령을 날머리로 하였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상월산(970.3m)으로
향했다. 상월산 오르는 길은 낙엽송이 가득했고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지나는 길마다 저마다 그리움을 품은 듯 나도 흔들리고 풀잎들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
다. ▼
원방재이다. 백봉령까지는 앞으로도 7킬로미터를 더 가야한다. 알바를 한 후미의
소식이 궁금했다. 우리 보다 한 시간 더 늦는다고 한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
생들이 많을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그 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후미도 기다릴 겸해
서 우린 이곳에서 가까운 계곡으로 가서 무더위에 후끈해진 육신의 열기를 차거운
물로 씻어 주었다. ▼
온 몸의 구석구석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워낙 많은 땀을 흘린 탓인지 여름이면
고질병이 되어버린 사타구니 주변이 따갑고 새로 신은 등산화로 인해 발바닥이
아파서 제대로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이렇게 육신은 지쳐만 가는데 백봉령 가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백봉령에 도착했다. 이곳은 강릉시와 정선의 경계지대였다. ▼
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한 정선은 "아리랑"을 랜드마크로 하여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
백봉령(白鳳嶺, 780m)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으로 정선 사람들
에게는 매우 소중했던 고개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는 '엎드릴 복(伏)
자'를 써서 백복령(白伏嶺)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원래 이름이 아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고개'라는 의미로 일
제에 의해 바뀐 이름이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대동여지도'에는 백복령(白福嶺)이
라고 기록되어 있고, '택리지'에는 백봉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흰 봉황'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이름들이 상서롭거나 복을 바라는 의미의 이름이
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이름인 백복령(白伏嶺)은 그 뜻이 사뭇 다르다.
국립지리원이 아직도 이 고개의 이름을 일제의 잔재인 백복령(白伏嶺)으로 쓰고 있다
면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현지의 이정표에는 모두 백
봉령(白鳳嶺)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백봉령이라는 이름은 '하얀 봉황의 고개'이니 그 뜻도 좋다.
("최 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에서....) ▼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힘들고 괴로운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좋은 날도 있고
즐거운 날도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힘들 때는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것이 인생
의 참된 멋일 것이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산행을 하다보면 반드시 오르막길이 있고 그 길은 대체적으로
힘들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사람을 부축해가며 힘들게 정상에 오르다보면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산행을 일컬어 가끔씩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길벗이라고 말한다. 오늘 산행도 그랬었다. 정말이지 근래에 들어와서
가장 강도높은 산행을 한 것이다.
산행기를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몸의 곳곳이 쓰라리고 힘든 상태이다.허나, 마음만
은 날아갈 듯 가뿐하고 뿌듯하다. 약간의 무리가 따르긴 했어도 그 힘들다는 댓재
~백복령 구간을 무사히 통과했으니 말이다.
이번 산행은 그야말로 일상에서 잃어버린 상실감을 가득가득 채워주는 길벗임에
틀림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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