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무더위도 소리없이 떠나가고
창문을 닫게 하는 신선한 새벽바람이 가을을 실어 왔습니다. 정말이지 가을 같은 건 다시
는 없을 줄 알았는데 밤낮도 모르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여운 속에 가을이 스며
들었습니다.
어렵게 찾아 온 가을, 이 가을엔 좋은 일만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외
로운 길을 기꺼이 함께 해주는 좋은 벗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가 오건 눈이 내리건 세월은 가고 계절도 비뀌어 갑니다.
기쁨도 슬픔도 가슴을 도려낼 것같은 아픔도 가슴터질 듯한 행복도 영원한 건 없습니다.
즐길 건 즐기고 견딜 건 견디며 살다보면 결국은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파릇파릇했던 청
춘이 지나갔듯이 결국은 인생도 그렇게 갈 것입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인생을 즐겨야겠습니다. 되게 오래 살것처럼 행동하면 어리석을 것
같습니다. 걷지도 못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인생을 후회하지 말고 몸이 허락하는 한 가고
싶은 곳 여행하고 먹고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이번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행의 중심에는 늘 이 제일 회장님이 버
팀목이 돼주었고 그리고 우리 회원들은 등장인물이 되어 열심히 회장님을 도와 보다 행복
한 여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 행 일 시 : 2024. 10. 8 ~ 9일(1박2일)
주요 여행지 : 음성 스완가든, 용계저수지, 용담산, 백야자연휴양림, 초평호 등
함께 한 분들 : 원우회 회원(제일,창환,복동,판섭,용규,재필)
최초 방문지는 음성 스완 가든이었다. 넓은 정원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저수지 뷰도 일품이었다. 그러나 이
러한 아름다운 뷰도, 등뒤로 불어오는 바람도, 눈앞에 빛나는 태양도 옆에서 함께
가는 우리 원우회 벗님들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 ▼
흔히들 인생여정에는 세가지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인생 삼여(三餘)라고 하는데
즉,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년은 겨울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생은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 지금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 과연 여유로운가?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런 저런 생각들로
훌쩍 떠나 다소 어색한 여행지의 시.공간에 문을 두드리고 그곳의 삶에 잔잔히 녹아드는 것, 모름지기
여행은 그래야 한다. 주렁주렁 풍성한 먹을거리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이 모두가 여행지에서만 느
낄 수 있는 여행자의 특권이 아닐까?▼
고요한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호수의 수면 위로 햇살은 반짝이고 시끄럽던 세상은
마침내 평온을 되찾는다.▼
가을햇살이 따갑다.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햇빛 비치는 길과 그늘진 길을 걷는 것, 어느 길이
좋을까? 어느길을 걸을까? 나는 망설이며 또 힘들어 했다. 막연히 두길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
다. 두 길 다 사랑이었고, 두길 다 내 길이었는데 왜 나는 다른 한쪽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절
부절 못했을까? 여행을 오면서 의문이 풀렸다. 그것이 여행의 이유라는 것을...▼
우리가 기거할 백야 자연휴양림 펜션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가장 시원하고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들과 울고 싶을 만큼 행복하게 해준 막걸리를 마셨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
들인데도 마치 어제 본 것같은 편안함이 스며든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마저도 나를 행복하
게 해준다.▼
저녁식사 후에 금왕읍의 진산(眞山)이라고 할 수 있는 용담산에 올랐다. 탁트인 시야로
금왕읍을 조망할 수 있다. 근린공원답게 편익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상상대로 음성"은 우리의 상상(想像)이 희망이 현실이 되는 마치 마술처럼 음성군민의
염원과 행복이 막힘 없이 펼쳐지는 도시, 서로 상상(相想)을 잇는 길을 품은 소통하고 공
감하는 도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름다운 문구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과 공감, 이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들이다. 대단히 멋있고 훌륭하진 않지만 그나마
반성과 성찰을 할 줄 알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나와 가만히 눈을 맞춰본다. 나와 나의
소통이 깊은 눈맞춤이 이루어지는 순간 비로소 세상과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용담산에서 내려다 본 음성읍, 어쩜 이곳은 싸울 일이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마을같았고
어린이가 태어나고 늙은이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계절의 순환처럼 균형있게 이루어지던 곳
같았다.▼
세상에는 거저가 없다. 꿈도 희망도 사랑도 노력이고 쟁취더라, 저 아름다운 풍경마저도 저마다의
노력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이제는 알겠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이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안다는 뜻일 게다. 농다리 근처의 인공폭포에서 세차게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더 없이 푸른 하늘도, 회색 빛 높게 떠 흘러가는 쪽빛 구름도, 투명하게
비치는 햇살도, 창가에 서서 홀로 즐겨 마시던 커피도 이젠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같이 느끼며
같이 마시고 싶고 늘 즐겨 듣던 음악도 그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어진다. 그 누군가가 바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우리 벗님들이 아닐까?▼
드디어 농다리를 거닐 차례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 해도 낯선 고유명사 앞에선
수시로 길을 잃는다. 당연하다. 농다리, 여러 벗님들과 함께 몇 차례 왔더니 이젠 농다리가 고
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문백면 굴티마을 앞에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농다리는 천년을 이어 온 신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로서 전체 28칸의 교각으로 중간 중간 돌들을 쌓아
교각을 만들고 길고 넓적한 돌을 교각 사이에 얹어 다리를 만든 조상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돼 있고 총길이 93.6m, 폭 3.6m, 교각높이 1.2m라고 한다.▼
농다리를 건너 용고개 성황당(서낭당) 앞에 이르렀다. 호젓한 길목, 외로운 고갯길에 이르면 의례히
성황당이 나타난다. 비와 바람에 시달린 장승의 얼굴은 싸늘한 돌무더기에 발등을 묶고 그냥 묵묵하
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쓴 먹글씨도 세월따라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곤 한다.
영험하다는 나이 많은 신목(神木)에 금빛 새끼줄과 장식을 달아 돌을 쌓는다. 또한 사당을 지어서 신의
영역임을 표시하고 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일종의 토템(Totem)이다. 또한 서낭
당의 나무를 베면 저주를 받는다는 다소 오싹한 얘기도 있다.
내 어릴적 외갓집 가는 길에도 성황당이 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가끔씩 외갓집에 갈 때면 서낭당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어린 나는 단순 호기심에서 한 번 쳐다보고 지나쳤지만 어머니께서는 예외 없이
서낭당 옆에 있는 돌무덤에 정성스레 돌을 하나씩 쌓으시며 치성(致誠)을 드리시곤 했다.
그렇다. 어차피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 이성과 지성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
도의 힘이 필요하다. 삶의 길목에서 나를 꿋꿋하게 받쳐준 힘, 기도는 역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돌무지 앞을 거닐며 이번 여행의 안녕을 빌어본다.▼
초평호 둘레길 출발점에 와있다. 수백년은 거뜬히 넘었을 우람한 나무들이 백년도 못살면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를 보고 "참 좋을 때다." "좋을 때야." 하고 영령한 바람소리로 윙윙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소리엔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애처로운 느낌이 배어있는 것같았다.▼
초평호는 광복이후 축조된 저수지로 1985년 증설되었으며 전국에서 낚시터로 유명하다. 주변에는
향토 음식인 "붕어찜 마을"이 형성되어 별미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호반에는 초롱길과 하늘다리가
조성되어 있고 세금천에는 천년의 농다리가 장구한 세월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둘레길은 총 7.5km
에 이른다고 한다.▼
미르 309, "미르"는 용을 지칭하는 순수 우리 말이며, " 309"는 출렁다리의 길이라고 한다.
미르 309출렁다리는 총사업비 80억원을 들여 금년 4월에 개통됐다고 하며 국내 최장 무주
탑 현수교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출렁다리를 걸을 차례이다. 삶이 지루하고 힘들다고 느꼈던 어린 날에 "세월 참 빠르다"며
탄식하던 어른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듯 7학년이 돼버린 사진 속 나 자신의 모
습을 보면서 이젠 바로 그 어른이 되어 삐쭉삐쭉한 머리카락을 애써 다듬으며 한 숨을 짓고 있다
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나를 떠났고 같이 있기도 난감한 사람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었다. 이것이 인간사의 순환의 법
칙이다. 텅빈 마음을 채워주고 서로 토닥이며 외로움을 조금씩 덜어주며 살아가야 함에도..▼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눈이다. 우리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도수 높은 안경을 쓸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한 빈 가슴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면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나는 세월과 용감하게 맞서 소리를 지르며 바보같이 흥청거렸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의 슬픔은 어쩔 수 없었다. 허나, 여행하는 동안의 벅찬 환희가 밀려들어 내 가
슴을 잊었던 노래와 지난 날의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 나는 행복하다.▼
임종을 앞둔 암환자들이 가장 통렬하게 깨닫고 뉘우치는 삶의 덕목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 더 겸손했더라면,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등이라고 한다.
구구절절 회한이 서린 그야말로 후회막급한 것들이다. 벗님들이여~! 우린 가급적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하자. 이제부터라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수 없이 되뇌이면서....▼
다리를 깊이 구부린 개구리만이 높이 뛸 수 있으며 날기 연습을 많이 한 새만이 수만리
고향땅을 날아갈 수 있다. 기본체력의 확보없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없듯이 우린
꾸준히 차를 멀리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어야 한다. 그래야 또 만날 수 있다. 그래야
또 여행할 수 있다. 명심할 일이다.▼
(Epilogue)
어쩌면 우리 인생의 네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일지도 모른다 . 좋은 친구의 등, 아름다운 사
람의 등, 닮고 싶은 어떤 사람의 등,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우린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
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우리의 등을 조용히 밀어주었던 누군가가
반드시 있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에 미처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우리는 타인의 도움을 받
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등을 힘껏 밀어 줄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날엔 친구가 잘되는 것을 보면 부러웠지만 지금은 친구가 행복해 하는 만
큼 같이 행복하고,
젊은 날에 친구의 아픔은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나의 아픔처럼 생각이 깊어진다.
젊은 날에 친구는 지적인 친구를 좋아했지만 지금의 친구는 내 마음을 읽어주는 편안한 친구가
더 좋다고 느껴진다.
이 모두가 세월이 가면서 익어가는 나이가 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까지는 그저 받아만
왔으니 앞으로는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손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그들의 등짝을
쉼 없이 밀어주리라.
감히 말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날들 속에서 가장 아쉽고 가장 그립고 가장 아름다웠던 시
간들은 유년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그 남루한 시골 촌뜨기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보다
더 깔끔하고 강건하고 영민한 도회인의 삶을 배워 익혀나가고자 했었다.
소년시절엔 아버지에 관한 글을 쓰면서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어느 새 아버지의 세월
을 뛰어 넘어 7학년의 할아버지가 돼있다. 그러나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비록 삶이 낡은 외투처럼 너덜너덜해져서 이제는 갖다 버려야 할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가져보고 싶은 미련이 곳곳에 있어 그리하여 그게 살아갈 이유라고 믿는 이 시대의 노인들
에게 그들의 등을 시원스레 밀어주는 의미로 이 글을 바친다.
*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 준다.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벗님들이여~!
부디 우리의 있음은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닌 절대적인 것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