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 성당을 바라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진천.음성에서의 하루를 정리해 본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지병은 깊이를 더해가고 새롭게 치료받아야 할 부위도
늘어만 간다. 요즘 부쩍 듣는 얘기는 "어딜 가야 좋다더라, 어디 여행지가 요즘 한창 뜬
다더라" 보다는
"누가 큰 수술을 받았다더라.입사 동기 누가 암으로 죽었다더라, 퇴직공무원은 5년 넘기
는 것이 고비라더라,"이다. 즐거움과 건강이라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선 형국이 분명하지만
갈수록 건강문제에 무게추가 더 기울어진 듯싶다.
그렇다. 건강은 건강할 때 더 챙겨야 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건강에 신경을 쓰다보면 되레
정신건강을 더 해치는 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니 건강관리도 적당히 하면서 건강할 때
여행길에 자주 나서는 것도 좋을 법한 일이다.
감성이 더 살아있을 때, 체력이 더 좋을 때 더 다니고 뭐든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거다.
누구나 삶의 경계를 지나 어른이 되고 늙어가기 마련이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
이 모든 사실이 다시한번 내 가슴을 조여왔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1회적인 것.
즐기려면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 밖에 없다.일단 즐기고 보자. 오늘은 음성나들이
나서는 날, 대학원 친구들과 멋지고 행복한 여행길에 오르는 날이다.
일 시 : 2018. 10. 13(토)
코 스 : 농다리 일원~ 음성꽃마을~ 음성인삼축제장
누 구 랑 : 원우회 회원들(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대학원)
...............................................................................................................................................
진천의 하루는 뭐니뭐니 해도 농다리를 걷는 것부터 시작된다.▼
Nong Bridge -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에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농다리는
천년을 이어 온 신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
로서 전체 28칸의 교각으로 중간중간 돌들을 쌓아 교각을 만들고,
길고 넓적한 돌을 교각 사이에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조상의 지혜가 느껴진다. 농다리
에 관한 유래는 이 사진 바로 밑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농다리의 유래가 상세히 기록된 안내판이다.▼
농다리에 관한 유래이다. 역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더라도 임씨 성을 갖인
사람들은 위대했다.▼
그 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살아 진천, 죽어 용인" 즉, 생거진천(生居鎭川),사거용인(死居龍仁)의 유래를
이 안내표지판을 보고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추천석에 관한 얘기도 흥
미롭기만 하다.▼
아쉽게도 말의 발자국과 임 장군의 발자국 사진이 선명치 못해 아쉽기만 하다.▼
지금부터는 초평호 둘러싼 채 펼쳐지는 둘레길을 걷는 순서이다. 산과 물과 어우러진
둘레길을 걷는 다는 것,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초평호는 진천의 명산인 두타산을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담수량을
자랑하는 큰 호수이다. 초평호의 모양은 용이 한반도를 등에 업고 두타산 어딘가
에 숨겨져 있을 여의주를 찾아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초평호 하늘다리의 멋진 모습이다.▼
초평호는 평화로웠다. 평화롭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고 아무 것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눈먼 인형이나 자기
만족에 도취된 저능아가 아니라면
차디찬 통계숫자 대신, 아름다운 언어로 씌어진 한 권의 동화가 인간의 정신을 충족
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소유, 평화, 사색, 아름다움, 이 얼마나 듣고싶은 낱말
들인가?▼
하늘다리를 건너 보고 다시 되돌아 와서 농다리가 위치한 원점으로 회귀하는데 처음 왔던
둘레길 대신, 조그만 야산을 넘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야산이라서 그런지 정상에
올라서도 산이름이 없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을 차지하고 있는 그 많고 많은 산들은 제각기 그 크기나 모
습이 다르되 이름을 갖지 못한 산들이 수두룩 하다. 평원지대에 가면 어엿하게 산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수많은 산들이 그저 "야산"으로만 싸잡아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웠다.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이 야산이 안따까웠다. 얼마나 섭섭했을까? 수 많은 사
람이 지나다니면서도 이름 한 번 불러주지 않으니 말이다. 불러주기는 커녕 부를 이름조차
갖지 못한 산이니 말이다.▼
용고개(살고개)성황당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토지와 마을을 지켜준다는 신(神)을
모시는 곳을 의미한다. ▼
농다리 주변의 풍경이다. 산 정상에서 쏟아지는 폭포수가 이채롭다.▼
앞서 간략히 소개했던 살아 진천, 죽어 용인에 관한 유래가 이해를 돕는 삽화와
함께 상세히 기록돼 있다.▼
식사 후, 차 한잔의 여유를 .......▼
진천의 명소들을 둘러본 후 걸쭉한 민물매운탕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우린 사랑의
공동체인 음성꽃동네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알려진 대로 음성꽃동네는 가장 방대한
시설. 규모와 자원봉사자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음성꽃동네는 한마디로 사랑이 이룬 기적이다.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현재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소중한 안식처가 되고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을
만큼 버림받은 이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여
요람부터 무덤까지 침식과 요양 등 각종 편의시설과 모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사회복지 시설인 것이다. 꽃동네의 작은 시작은 오 웅진 신부와 최
귀동 할아버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1976년 5월 3일 오웅진 신부는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같은 해 8월 20일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어느
날 오 신부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다리 밑에서 쫓겨나 용담산 밑에 움막을 치고 생활
하는 걸인들을 만나게 된다.
움막 안에는 얻어먹을 힘조차 없이 죽어가는 걸인들이 5가구 18명이 살고
있었는데 최귀동 할아버지가 빌어 온 음식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그 헌신적인 베풂을 통해 오웅진 신부는 "얻어먹을 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 임을 깨달았다. 다음 날 오웅진 신부는 주머니
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손수 벽돌을 찍고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1979년 11월 15일 방 다섯칸, 부엌 다섯 칸 규모의 "사랑의 집"
을 지어 최귀동 할아버지의 동료 걸인들을 입주시켰다. 이것이 꽃동네의 시작
이었다.
사랑의 천사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성당의 모습이다.▼
성당 앞 언덕에는 천사들의 선행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듯 하얀 들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성당에서 내려다 본 꽃동네의 전경이다.▼
성당에서 다시 꽃동네 입구로 내려왔다. 사진은 꽃동네의 입구 모습이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동상 앞이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1909년 충북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에서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귀한 집의 아들이라 하여
귀동이라 불렀으며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던 중
왜정말엽에 징용에 끌려가 북해도 탄광에서 일하다가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정신
병자가 되었다. 그가 폐질자가 되자, 일본 사람들은 등에 주소 적힌 꼬리표를 붙여
한국으로 보냈다.
천신만고 고생끝에 고국의 고향에 찾아왔지만 그 부잣집은 일본에 끌려간 자식 걱
정에 병에 걸려 가산을 탕진한 후 모두가 떠나고 없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무엇
을 깨달았는지 초연한 마음으로 무극 다리밑을 찾아 가 많은 걸인들의 틈에 끼어
살면서 병들어 죽어가는 분들을 위해 설겆이 하는 집을 찾아다니며 "남는 밥좀 없
어?" 없다면 가고 있다면 얻어다가 동냥도 못하는 걸인들을 먹여주고 돌아가시면
용담산 기슭에 묻어주는 일을 했다.
과일을 주면 "애들 주지 나 먹는 것까지 어디 있어" 하며 사양하고 돈을 주면 "나는 돈 필요없어"
하며 거절한다. 그리고 어깨에 맨 자루를 어린아이들이 노는 곳에 찾아가 행여 다칠까 사름파리
와 병 깨진 것을 주워다가 버리는 일을 40여년간 하시던 중
1976년 9월 10일, 황혼이 깃든 저녁무렵 남은 밥 얻어 무극성당을 지나가는 것을 오 신부가 보
게 된다. 1986년 2월 15일, 하느님께서 한국교회를 통해 사랑의 삶을 살아 온 최귀동 할아버지
께 가톨릭대상(사랑부문)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이 뜻을 기려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님과
도지사, 교육감, 국회의원과 1,500명의 신도. 주민 모두 모여 시가행진을 하고 축하기념식을
무극성당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부상 120만원은 어디에 쓰시기를 원하느냐는 오신부의 질문에
모든이의 가슴을 울리던 한 마디,
"쓸 곳은 한 곳밖에 없어. 길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어" 이에 모든 이들은 한마
음이 되어 노인요양원을 짓기로 하였다. 1986년 10월 15일 꽃동네 회원 50,000 여명이 모인
결핵요양원 준공식에서 만장일치의 호응 속에 6억원의 회원 성금과 국가지원 6억원으로
1987년 준공된 노인요양원에 사시다가 평소 지병인 고혈압이 재발되어 1890년 1월 4일 13시
15분 81세의 나이로 주님의 나라에 가셨다.
숙연한 마음으로 꽃동네를 나와 우린 다시 목재체험장으로 오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마침 음성인삼축제가 열리고 있는 날이라고 한다.
사람 좋고 인정많은 회장님의 만류로 우린 귀경도 미룬 채 축제장을 거닐며 이곳
저곳 눈요기를 하고 있었다.▼
축제장 주변은 휘황찬란했다. 대도시의 축제장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이 곳이 어느 조그만 읍소재지의 축제장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스케일 큰 축제장이었다.
땅 위에서는 사람들이 펼쳐놓은 오색 전깃불들이, 하늘에서는 별들이 영롱한
빛들을 발산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
과 슬픈 것들이 있고, 그 둘이 합쳐져 별이 된다고 한다. 오늘 밤도 무수한 별
들이 새롭게 태어 날 것만 같았다.▼
'일반산행 사진첩 > 기타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시.모도, 구봉산 (0) | 2019.06.11 |
---|---|
백운호수 둘레길 (0) | 2018.10.29 |
모락산 둘레길 (0) | 2018.09.29 |
을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0) | 2015.01.01 |
설악산 나들이.. (0) | 2014.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