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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 사진첩/100대 명산

34. 모악산

 

 

가슴이 답답하고

산다는 것이 힘이 든다고 생각될 때면

끊임없이 출렁대며 재잘되는 초록들을 바라보자

그리고, 푸른 계절에 우뚝 서 계신 어머니를 불러보자.

 

- "내 어머니는...". 중에서

 

오늘은 "어린이 날"이었다. 오는 토요일은 "어버이 날"이다. 또 21일은 "부부의 날"이라고

한다. 이렇듯 초록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5월은 "무슨 날, 무슨 날 "로 가득한 소위 "가정의

달"이다. 집안에 이미 어린이는 없고 "부부의 날" 역시 아직은 날짜가 많이 남아있다.

해서, 나는 그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불발되어 온 어머니의 산인 모악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머니의 소중한 사랑을 항상 받기만 한 채 특별히 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도 나의

모성애에 대한 욕구는 그 꼭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모악산을 오르면서 염치없게도 나는

어머니의 모성애를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다는 형상의 바위를 찾아 나의 발길은 움직이고 있었다.

 

화사한 꽃과

천진한 어린 아기의 미소와

포근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옥에서나

천당에서나 공통적으로 인정받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라기에.....


산행 일시 : 2010. 5. 5(토)

산행 코스 : 상악주차장~대원사~수왕사~정상~심원암~금산사

산행 시간 : 약 5시간(사찰탐방, 휴식, 해찰 등 포함)

누 구 랑 : 나홀로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으나 운전기사가 모악산에 대하여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무지하고 불친절하기 그지없어 중간에서 하차하여 버스로갈아

타고 상악주차장에 내렸다. ▼

 

모악산 탐방로 입구에 있는 모악산 표석이다. ▼

 

고은 님의 "모악산"이라는 시(詩)이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이 시구(詩句)에서 보듯이 모악산은 그 자체가 단순한 산이 아닌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오가는 시민들이 잠시 잠시 쉴 수 있는 모악정이었다.▼

 

전주 김씨 시조묘 갈림길이었다. 김 일성의 32대 조상 김 태서 묘의 지기(地氣)가 발복하여,

김 일성이 49년간 집권했는데 음력 1994년 9월에 죽는다고 예언한 손 석우의 "터"가 1993년

발간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김 일성이 사망하자,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고 한다.▼

 

맑고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모악산의 계곡수이다.

 

대원사 갈림길이었다. ▼

 

모악산 대원사 입구이다.

 

대원사의 대웅전이다. 대원사는 보덕화상의 제자 대원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며

삼국유사에는 고려때 밀교의 양대 도량의 하나인 주석원(대원사)이 모악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원사 경내의 모습이다.

 

대원사 갈림길이다. 나는 수왕사로 올라야 한다. ▼

 

모악산은 입구에서 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된비알(경사가 급한 언덕)이었다.

이제 100m만 더 오르면 쉼터가 나온다. ▼

 

된비알 쉼터이다. 모악산 정상은 아직도 1.5km를 더 올라야 한다. ▼

 

수왕사 갈림길이다.

 

수왕사는 신라 문무왕(680년)때 보덕화상이 창건했고 고려 인종때 원명국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수왕사는 원래 "물왕이절" 혹은 "무량(無量)이절"이라 하였는데 한자이름이 이루어

지면서 "수왕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수왕사의 연혁이다. ▼

 

수왕사는 시골 어느 공가(空家)를 방불케 할 정도로 초라했다. 아니 도저히 사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였다. 수왕사, 오늘 처음 본 수왕사는 그 거창한 이력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차마 사찰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빈약한 절이었다.

 

 

수왕사에서 조금 올라오니 갈림길이었다. 모악산의 등산로는 크게 3곳으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는 지금 내가 올라 온 상악마을이고 두번째는 길라잡이에서도 표시돼 있는 중인리

계곡길이며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오늘 내가 하산해야 할 금산사 입구인거 같았다.

 

무제봉 입구 갈림길이었다.

 

무제봉, 백제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면 무제봉에서 지역 주민과 전라 감사가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또한 무제봉 남쪽 천하명당 장군봉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하여 암매장을

감시했는데 지금은 장군봉 줄기에 무덤이 많다고 한다. ▼

 

모악산 정상 못미친 지점에 큰 바위가 있었다. 이제 보니 모악산의 산 이름이 유래된

"쉰질바위"인듯 싶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한 형상을 지닌 바위라고

한다. ▼

 

쉰질바위에서 올려다 본 kbs 송신탑이다.

 

역시 쉰질바위에서 내려다 본 완주의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강과 산은 둘레산, 둘레강으로

전주 주변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녹지축인 산봉우리와 강 줄기를 하나의 띠의 형태로 연결한

데서 둘레산, 둘레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

 

모악산 정상 주변에도 곳곳에 산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모악산 정상 전망대에 이르렀다. 이곳은 엄격히 말하면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몇 년전만 해도 정상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kbs 측에서

산 정상을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역시 "국민의 방송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에 부디 어용방송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모락산 정상석은 전망대 휀스 뒤에 숨어 있었다. 또한 정상석이 설치돼 있는 곳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봉쇄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상석이 수난을 받고 있는 꼴이다. 부득이 증명사진을

남기기 위해 철조망을 월담하여 전망대에 있는 어느 분께 부탁을 해서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인물사진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일 것 같았다. ▼

 

송신소 갈림길이었다.

나는 화율봉 방향으로 일단 진행하다가 정상이 있는 송신소에 오르기로 하였다. ▼

 

해발793.5m의 모악산 정상이다. 이곳이 진짜 모악산 정상인 것이다. 다행히 kbs측에서

이곳까지 걸어올수 있도록 배려해 준 덕에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모악산은 전주시 완산구와

김제시 금산면, 완주군 그이면의 경계를 이룬다.

 

진안 주화산에서 시작되는 호남정맥이 정락산과 오봉산을 거쳐 무등산으로 흐르다가 묵방산

에서 잠시 북서쪽으로 지맥을 형성,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 하다는 정상 서쪽에

솟은 쉰질바위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상 삼거리였다. 나는 금산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금산사로 하산하는 길은 역시 된비알 구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곳 저곳에서

등산로 정비공사를 하는 바람에 등산로가 깜끔하지 못했다. 한 참을 내려오니

심원암 북강삼층석탑이 있었다. ▼

 

 

심원암이었다.

 

심원암의 연혁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심원암 경내이다. 심원암에는 산객들 몇명이서만 웅성거릴 뿐 그야말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있었다.

 

모악 예찬이었다.

 

심원암 삼거리이다.

 

금산사를 향하여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사랑의 나무인 "연리지 가는 길"이 있었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불과 200m의 거리에 있다는데....▼

 

 

연리지 ~! 백두대간 마루금을 걸으면서 나는 수 많은 연리지를 만나왔다. 그런데 오늘 또

모악산에서 그 연리지를 만났다. 오늘 본 연리지는 그 동안 만나왔던 연리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명한 모습의 연리지였다. 연리지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묘한 삶을 살아가는 연리지, 오랜시간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면서 서로에게 동화되고 겉모습까지 닮아가게 된다. 그렇게 둘이지만 한 몸처럼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연상하고 그리움을 떠올린다.

 

오늘 나도 그랬었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가슴 가득하기 때문인지 오늘 또 연리지를

보면서 초록빛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싶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도 연리지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

 

 

어쩜 저렇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두 그루의 소나무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라

오다가 어느 날부터 하나가 되기 시작했으리라.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주는 연리지는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연리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하며 자녀의 지극한 효성과

친구의 돈독한 우정,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이 나무에 빌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서로 다른 몸으로 태어나 살아가려다가 하나의 몸으로 살아가는 나무들. 가지들이 맞닿은

채 살아가면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뿌리도 몸도 하나가 되면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어느 새 금산사였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찰로 산중암자 규모로

창건하였으며 신라 혜공왕 2년(76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며 경덕왕 때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꽃을 피웠다고 한다. 천년사찰 금산사는 내가 본 사찰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

 

 

 

 

 

 

 

시민 체육공원의 산책코스를 거닐었다.

 

푸르른 수목들이 싱그러웠다.

 

모악산 금산사의 일주문이다. ▼

 

모악산 입구 시민공원의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쭉들의 화려한 유희로 머리가 몽롱했다.

한참 동안 멀미를 느껴야 했다. 심한 꽃 멀미로 정신을 잃을 듯 했다. ▼

 

 

 

 

<100대 명산 선정사유>

진달래와 철쭉이 유명한 호남 4경의 하나이며, 도립공원으로 지정(1971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신라 말에 견훤이 이 곳을 근거로 후백제를 일으켰다고 전해짐.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대적광전(보물 제467호)·혜덕왕사응탑비(보물 제24호)

5층석탑(보물 제27호)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있음. 특히 미륵전에

있는 높이 11.82m나 되는 미륵불이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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