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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진첩/늦은목이~백두산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

 

 

겨울철 폭설과 바위 산의 추락 위험 등으로 무려 6개월 동안을 미뤄왔던 백두대간의

점봉산 구간, 마침내 그 대장정에 오르는 날이 왔다. 참으로 가고싶었던 길이었다.

참으로 걷고 싶었던 길이었다. 이 구간은 이미 작년 11월 초에 등반을 시도했다가 추적

추적 내리는 가을비줄기에 여지 없이 좌절되고 말았던 구간이다.

 

그로부터 만 6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그 동안에도 백두대간 마루금 걷기는 계속

됐었다. 당초 백두대간 마루금 이어걷기를 중간지점에서 시작한 관계로 불가피하게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추풍령 남쪽 구간을 끊임없이 걸어서, 멋지게 연결시켜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구간은 설악산의 단 두 구간 뿐이다. 그 중 한 구간을 오늘 걷게 되는

것이니 당연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이토록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잔잔한 흥분에 마음 둘 바를 모르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 민족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었다. 그 길은 어쩌면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고 지혜를 베푸는 우리 민족의 생명의 주체였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민족을 연 것도  그 산이었고, 수많은 성인과 도인들이 깨우침을 얻은 곳도 역시

그 산이었다. 그 산은 생명과 지혜의 산실이었다.

 

오늘 그 산의 길을 걷는다. 잠시 중단했었던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걷는다. 백두대간의

마루금, 그 길은 당연히 일반 산길을 걷는 것과는 다르다. 그 길은 분명히 일반 산길과는

다른 느낌이 있고 울림이 있다. 오늘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보자, 당당히 걸어보자,

온 몸으로 걸어보자, 그리고 백두대간이 품고 있는 모든 자연의 조각들의 울림에 대하여

온전히 느껴 보도록 하자.

 

백두대간 조침령~한계령 구간은 대부분의 대간꾼들이 조침령에서 한계령으로 걷는

소위 북진 형태 보다는 역으로,  한계령에서 조침령으로 향하는 남진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 이유는 통제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설악산의 한계령보다는

조침령 쪽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한계령에서 걷기 시작하면 점봉산을 위시해서 만물상 등 볼꺼리가 많은

곳들을 칠흑같은 어둠 속에 걷기 때문에 주변 절경을 놓치기 쉽고 위험도도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과감하게도 조침령에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의 산길이 더욱 의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안양에서 밤 11시에 출발한 버스가 백두대간 접속지점인 조침령 터널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 새벽 2시경이었다. 식사를 하고 산행준비를 마친 후, 시간이 남아

졸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 많은 은하의 별무리들이 금새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북쪽을 향하여 국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밝고 선명한 별 일곱개가 콕콕

박혀 있는  북두칠성이 내 눈에 다가왔다.

 

아~! 얼마만에 올려다 본 밤하늘인가?

아~! 캄캄한 밤하늘에 이토록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들의 잔치를 보았던 적이 언제

였던가?  문득 유년의 밤하늘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나 긴 여름날밤, 짚으로 새끼날을

싸서 엮은 멍석 위에 드러누워 눈 위로 쏟아지는 별들을 수 없이 바라봤으며,

 

계절에 따라 달리 보이는 별자리도 추적해 보았고. 별자리에 얽힌 애절한 사연들을

하나 하나 음미해 보기도 했었다. 내 유년은 그렇게 보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갔다.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자리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사람 뿐이다. 나도 그 동안 많이 변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산행 일자 : 2010. 5.15~16(토요 무박)

산행  코스 :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망대암산~입산통제소~한계령

산행 시간  : 약 9시간 30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밤하늘의 별이나 쳐다보며 감상에 사로잡혀 마냥 추억 속의 길만을 걸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렸다. 나는 지금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사진은

조침령 터널 입구이다. ▼

 

 

산행 준비를 마치고 주의사항을 듣고 있다. ▼

 

 

드디어 산길에 접어들었다. 만 6개월 여만에 걷는 무박의 산길이었다.

조침령 구간은 접속거리가 길어 터널에서 30 여분을 걸어야만 조침령에

당도할 수 있었다.▼

 

 

조침령(鳥寢嶺, 877m),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기린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여러 개의 다른 의미로 불리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떨어질 조(阻)', '가라앉을

침(沈)'자를 써서 험준하다는 뜻으로 조침령(阻沈嶺)이라 하였고,

 

산경표에는 조침령(曺枕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새도 자고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이라고 쓰고 있다. 조침령은 옛 화전민과 심마니,

약초꾼들의 숨결이 그리운 고갯길이며 예전 양양에서 진동리를 넘나들던 소금 장수와

생선장수들이 너무 힘들어 우수갯소리로 "좆침령"이라 불렀다는 고갯길이다.

 

 

새벽 5시가 넘어서자, 장엄한 태양이 떠올랐다. 얼마만에 맞이하는 일출의 현장인가?

우리가 힘들게 힘들게 산길을 걷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태양은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해발 940m의 북암령이다.북암령은 양양군 북암리와 인제군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북암리와 미천골의 선림원지 북쪽에 있는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북애미"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

 

 

오색과 진동을 이어주는 박달령(단목령)이다. 이곳은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

부르며 박달나무 단(檀)과 나무 목(木)을 써 단목령이라 지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지킴터에 단속요원은 보이지 않았다. ▼

 

 

참고로 백두대간 남한구간에는 선달산과 옥돌봉 사이에, 그리고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도 박달령이 있으며 밝고 큰 고개라 하여 "박달령"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다.▼

 

 

갈림길이었다. 점봉산은 아직 2.1km를 더 진행해야 한다. ▼

 

 

백두대간 조침령 구간에는 아래 사진처럼 이정목이 설치돼 있다. 이정목은

매 500m 단위로 설치돼 있는데 "30"에서 출발한 숫자가 500m를 걸을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래 "4"라는 숫자는 이곳에서 점봉산까지의

거리가 2km라는 의미이다. ▼

 

 

점봉산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한 흙길이었으나 오랜만에 걷게 되는 무박의 산길이었기에

그만큼 힘이 들었다. 거의 뜬 눈 상태에서 밤을 지새우고 걷는 산길, 역시 힘들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새끼발가락의 티눈이 재발하여 더욱 더 발길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힘겹게 힘겹게 산길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마루금 상에 육중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왜 하필 길위에 쓰러졌을까? 아픈 다리로 나무를 넘어 가기보다는 차라리

나무 밑으로 기어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ㅠㅠ▼

 

 

마루금을 가로막은 채 거칠게 너울거리고 있는 산죽들을 헤치고 걷다보니 

드디어 점봉산(1,424m)이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점봉산을 아직도 덤붕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덤붕에서 덤은 둥글다는 뜻이다. 그래서 덤붕이  한자화하면서

점봉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점봉산, 얼마나 그리워했던 산인가?

얼마나 오고 싶었던 산이었는가? 그렇게도 간절히 염원했던 점봉산의 꼭지점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것이다. 통쾌했다. 가슴 후련했다. 여느 산에서 느낄 수 없는

각별한 울림을 지금 점봉산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점봉산 일대는 식물자원의 보고이다. 이 일대에 펼쳐지는 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라고 한다. 아름드리  전나무, 갖가지 희귀 식물이

무더기로 자라며 산나물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또한 산세가 완만하여 들꽃의

아름다움을 세세히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심마니와 약초꾼들이 이용하던 고갯길인 곰배령은 점봉산에서 지척에 있었다.

곰배령은 점봉산의 야생화와 나물들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천상의 화원이다.

또한 곰배령에서 강선리 방향으로는 강선계곡의 1급수가 점봉산의 유명세를 더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곰배령을 애써 외면한채 망대암산으로 향해야만 했었다. 

꼭 이렇게 까지 백두대간 마루금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꼭 가고 싶은 곳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마루금만을 고집해도 되는 것일까? 하긴 대간 길을 걸으면서

좋은 경치만을 고집한다면 그건 유람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점봉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백두대간 마루금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설악산의 힘찬 마루금이 한 눈에 보인다. 사진은 대청봉의 모습이다. ▼

 

 

바로 앞에 펼쳐지는 멋진 암릉군이 그 유명한 만물상이고 그 뒤에 보이는 쫑긋한 봉우리가

귀때기청봉이다. 귀때기청봉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서북으로 뻗어 안산(1430m)에 이르는

능선을 서북능선이라 부르는데 이 능선 중간지점에 우뚝 솟은 산이다.

 

귀때기청봉의 유래는 이렇다. 설악산이 온통 돌산일색인데 유독 귀때기청봉만이 육산(흙산)

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귀때기청봉은 주변의 다른 돌산으로부터 귀때기를 얻어 맞고 왕따를

당해 왔다고 한다. 해서, 귀때기청은 자신도 돌산이 되어 당당히 설악의 일원으로 대접

받고자 다른 산들 몰래 바위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다른 산들에게 들켜 또다시 귀때기를 세차게 얻어맞은 결과 몰래 만들던

바위가 부서져 주변이 온통 너덜길로 변했다고 하며 그 후로 귀때기청봉이라는 별로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설악산에서 망경대와 더불어 가장 전망이 좋다는 대한민국봉의 주변 산군이다.▼

 

 

이제 점봉산을 내려섰다. 만물상을 지나 한계령으로 향하기 위해서이다.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나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멋진 주목나무가 있었다.▼

 

 

발에 밟힐까 조심조심 걸으며 들꽃 하나하나와 모두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정말이지 도끼자루 썩는줄 모를 것 같았다. 아~! 살아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행복감,

바람 부는 들꽃 화원에 배낭을 풀고 그대로 드러눕고 싶었다. 세상 모든 근심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고요히 흐른다.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

 

 

 

 

 

 

해발 1236m의 망대암산이었다. 망대암산은 주전골에서 화폐를 만들던 무리가

망을 보던 곳이었다고 한다. 비록 정상 표지판은 초라하고 허술했지만 망대암산,

그 이름처럼 조망은 좋았다. 그 속살에서 샘솟는 오색약수는 한때 우리나라 약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한계령과 바로 밑의 오색 약수터를 축으로 남쪽방향을 흔히 남설악이라고 부른다.

이제부터는 남설악의 멋진 암릉구간이면서도 백두대간 마루금 중 위험도 면에서

두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 할 위험구간인 만물상 구간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정말이지 아찔한 순간을 몇 차례씩 넘어야 했었다. ▼

 

 

암릉구간을 어렵게 어렵게 통과하자, 이번에는 경사가 급한 계곡길이 나타났다.

계곡 길 역시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길은 미끄러웠고 금새라도 주변 바위들이

무너져 내려 덥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계령 휴게소이다. 이곳도 퍽 오랜만이다.

 

 

오색령이다. 오색령은 조선 영조때의 인문지리학자인 이 중환의 저서 "택리지"에서는 백두대간

강원도 지역의 이름난 "령" 여섯개를 손꼽았는데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의 철령, 그 아래의 추지령.

금강산의 연수령, 설악산의 오색령(한계령)과 그 아래의 대관령, 백봉령이 있었다고 했다.

그 중 으뜸으로 알려진 오색령은 오색, 한계령, 점봉산을 이은 삼각형의 한 축이 되는 산마루

고개이며 원래 이름은 오색령이었다. ▼

 

 

<에필로그>

이제 백두대간 마루금 이어걷기는 북진산행 중 마지막 구간인 미시령~ 진부령 구간의

딱 한 구간만을 남겨두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5월말에 마무리 하게 되있는데

워낙 입산통제가 심해서 또 6월(26~27일)로 넘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또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두대간의 마무리까지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산행 자체도 물론 힘들고 험란하지만 그 기다림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그 날을 기다려 보자, 축배를 조금 늦게 든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