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도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들뜨게 하고 몹시도 힘들게 하면서 산에 오르게 하는가?
어쨌든 나는 산행이 좋다. 여행이 좋다. 그렇다. 산행도 하나의 여행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에
서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언제나 긴장과 설레임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 걷게되는 백두대간 마루금, 물론 낯선 구간이다. 그 미지의 산길을 걷기위해 설램과 긴장
을 동시에 안고 나는 오늘도 미시령에 왔다. 잠을 못 이룬 탓일까? 청량한 동해의 해풍이 살결
까지 스며왔지만 까칠한 모습을 지닌 나는 그 청량감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 산행 역시 백두대간 마루금의 순서에 따라 이어지는 정상적인 산행이 아니었다. 원래 순
서는 지난 주에 끝난 대관령에서 진고개로 이어지는 구간이었지만 오늘 걷게 될 구간이 환경보
호를 위한 연중 통제기간이라서 미리 대한산악연맹측에 통보를 하고 승낙을 얻은 날짜가 오늘
이기에 불가피하게 순서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순서대로 산행을 하지않는다고 해서 문제될게 없다. 왜냐하면, 백두대간은 전체가 하나
의 산줄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순서대로 걷는다면 좋겠지만 꼭 순서대로 걸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산행준비를 마치고 새벽 3시경에 산길에 들어섰다.
산행 일시 : 2009. 8. 29~30(토요무박)
산행 코스 : 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오세암~영시암~수렴동계곡~백담사~용대리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산행 시간 : 약 10시간
미시령은 인제와 양앙을 연결하는 인근의 여러 고개들 중에서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만해도
통행량이 가장 많은 주요 고갯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주민들이 미시령
고갯길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잊혀진 고개가 돼버렸다가 조선말기에 다시 통행이 잦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괴나리봇짐 지고 겨우 지날 만한 오솔길 미시령에 차가 드나들수 있는 큰길이 뚫린 건 1960년
대에 들어서이다. 도로가 뚫리면서 인제에서 속초를 연결하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됐다. 하
지만 역시 미시령길은 구불구불 돌아가는 고갯길로 험란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5월에 터널이 개통되기에 이르렀다.다리품을 팔아야 하던 시절 꼬박 하룻길
이 이 터널을 이용하면서 10 여분으로 단축됐으니 이것이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미시령은 터널개통과 동시에 옛 미시령의 정취를 느끼려는 사람들이나 백두대간 산꾼들
이 이용할뿐 인적이 뜸한 고개가 되어버렸다.
산행준비를 끝내고 산길에 접어들려는 자세들이다.▼
굳게 쳐놓은 철조망을 월장하여 산길에 접어들었다. 습도가 무척 높았고 몹시 후덥지근했다.
초입부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은 내 몸을 어루만
지며 지나갔고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는 내 몸에 그대로 머물렀다. 바람은 잠시였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기에 갈림길 삼거리에서 보면 최고의 절경이라는 울산바위의
웅장함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어느 위치가 갈림길인지도 몰랐었고 울산바위는 그 형체마
저 볼 수가 없었다. 울산바위는 아주 오랜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을 빚을 때 멀리 울산에서
올라왔으나 마감시간에 맞추지 못해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의 바위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천후산 즉, "하늘의 울음같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울"은 "울음"이 아
니라 울산바위의 생김새가 설악산의 큼직한 울타리 같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서글펐다.
이렇게 미리 울산바위에 대하여 대강을 정리해왔는데도 볼수 없다니 아쉬움이 컸다. 한참
산행 속도를 올리고 있는데 헤드랜턴이 말썽을 부렸다. 할 수 없이 랜턴을 손에 쥐고 걸었다.
때문에 오른 손엔 두개의 스틱을 동시에 쥐어야 했었다.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일행의 도
움을 얻어 간신히 수습을 했는데 너덜지대 진입지점에 이르자, 이번에는 상의에 꽂은 안경이
땅바닥에 떨어져버렸다. 그렇잖아도 힘든 산행길에 소지품까지 말썽을 피우고 있었다. 산행
중 느끼는 안경에 관한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언제 기회가 주어질 때 상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오늘 백두대간 마루금의 특징은 한마디로 너덜지대를 걷는 산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시령에
서 마등령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덜지대를 걸어야 했었다. 너덜지대도 그 동안 걸어왔던 그
런 단순한 너덜지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돌들이 아닌 큰 바위들로 이뤄졌다.
날카로운 바위들도 있었다. 바위와 바위 틈으로 큰 구멍이 있었다. 너덜지대는 더 이상 길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다니고 있었기에 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
일정구간은 통제구역이었지만 국립공원 측에서 가느다란 밧줄을 설치해 놓고 밤에 반사되게
야광장치를 해 놓았다. 그 만큼 험한 바위지대였다. 혹시라도 이 곳을 지나는 산꾼들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간 길에서의 이탈을 방지하는 장치일 뿐 안
전을 답보할 수는 없었다.
너덜지대는 어두컴컴한 밤에 걷는 바윗길이었다. 그 길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길은 대체적
으로 오르막이 많았다. 힘들고 위험했다. 그러나 그곳을 피해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마음을 다독거려주었다. 참기 힘든 고통과 위험의 공포로 부터 평정심을 찾기위해 그래서 온전한
산행을 하기위해 마음을 다독거려주었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자연을 사랑하느냐?" 힘든 탓
에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다. 내 정녕 자연을 사랑한다면, 자연이 주는 아픔까지도 사랑해 주자.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스스로 선택한 산, 산행에서 얻는 즐거움이나 고독함 역시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것
이라면 그것은 오직 홀로 걷는 나만의 아픔이어야 한다. ▼
너덜지대를 통과하며 황철봉에 올랐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뿐인 산이다.
카메라를 꺼내 들었으나 촬영할 곳이 별로 없었다. 무엇을 촬영할 것인가? 그냥 크고 작
은 바위뿐이다.
그러나, 저 바위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싶었다. 막상 가슴에 간직한다고 하여도 얼마 간
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어느 산의 바위인지 조차 모를 일이다.
그래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다. 이처럼 힘들게 올라 온 황철봉에 정상석 하나 없다는사실을 미리 간파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철봉(1,331m)"이라고 쓴 종이를 정성스럽게 코팅해서 갖고 온 것이다. 당연히 황철봉을
이루고 있는 저 바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후일에 성스러운 대간 길인 이곳을
지나가는 대간꾼들을 위하여 그곳, 그 자리에 놓아두기로 했다.▼
정상에 발을 딛고 몇 발자국 내려왔다. 어둠이 서서히 가시면서 주변의 절경들이 눈에 들어
왔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는다면 황철봉은 더욱 빛나고 장엄했을 것
같았다. 밋밋한 바위들까지도 울림을 빚어내고 있었다. 촬영할 곳이 없었다는 조금 전의 불평
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촬영할 곳이 너무 많았다. ▼
저항령으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물론 이곳도 너덜지대이다.
하얀 운무 넘어로 험준한 1249봉이 보인다. ▼
저항령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1249봉으로 향했다. 물론 이 길도 너덜지대였다.
아니 길이 아닌 너덜지대였다. ▼
힘겹게 힘겹게 1249봉에 오르고 있는데 바위 틈에서 피어난 구절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행에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단하고 지친 내
삶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부는 바람에 가녀린 꽃대가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었다. 밝음, 고상함, 순수의 상
징인 구절초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함께 또 다른 삶의 지혜를 배운다. ▼
드디어 1249봉에 올랐다. 간혹 바위 틈으로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피어났을 뿐 산 전체가
온통 바위뿐인 바위 산이었다. 이곳을 오르면서 산우 한 분이 그만 바위에 미끄러져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통제구역이었기에 구조요청도 할 수도 없었다.
응급조치를 하고 몇 분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하산하였다고 한다. 그 분의 쾌유를 빈다.
큰부상이 아니길 바란다. 다음 대간산행에서 만나기를 바란다.
1249봉을 지나 1327봉에 이르렀다. 험하기로는 1327봉도 1249봉 못지않았다. 1327봉을
떠나면서 잠시 뒤돌아보았다. 정말이지 바위봉우리가 금새라도 무너져 내릴듯 아슬아슬했다.
저 바위 봉우리가 무너져 내리면 또 다른 너덜지대가 형성될 것이다. ▼
마등령 상봉에 올랐다.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바람이 지친 내 몸을 위로해주는 듯
했다. 지금까지 걸어 온 산길과는 달리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동네 뒷산처럼 상봉은 완만하
고 부드러웠다. ▼
마등령에 내려섰다. 마등령(麻登嶺)은 '산이 너무 험준하여 손으로 기어서 올라야
오를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가 얼마나 험준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피로를 잊으려 약주도 한 잔 하였
다. 허기 진 배를 채우고 술 기운이 체내에 스며드니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
마등령 갈림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대간 길을 멈추고 오세암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
오세암에 내려섰다. 이 곳은 봉정암에서 내려오는 길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
유서깊은 사찰,오세암의 모습이다. ▼
오세암에서 바라다 본 풍경이다. 뒤에 용아장성의 모습도 보인다. ▼
망경봉에 올랐다.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그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바로 뒤에
보이는 능선이 그 유명한 용아장성이다. 그러나, 봉정암쪽에서 보는 것처럼 날카
롭고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가 없었다. ▼
망경봉에서 내려다 본 오세암의 경내이다. ▼
망경봉에서 분재처럼 아름다운 소나무도 만났다. ▼
오세암에서 내려 와 봉정암에서 오는 길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
영시암이다. 이곳에서 국수를 무료 제공하였지만 왠지 "무료"라는 말에 먹고싶지가 않았다.
일행들과는 달리 나혼자 백담사로 내려왔다. ▼
백담계곡으로 들어섰다. 과연 계곡물은 명경지수였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이렇게 말하였
다고 한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되 웅장한 맛이 없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되 수려
하지 못한데, 설악산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하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 같았다. 지나 온 산에는 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푸르른 산 같은 정겨움이 있어서 좋았고 지금 걷고있는 백담의 골짜기엔 그리
움이 함께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있어서 좋기만 하였다. 고달픈 심신을 위로 받는 듯 싶었
다. ▼
백담사에 이르렀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운 시인은
이곳 백담사를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이제 언제 들어도 좋은 그의 시를 한 구절 듣기로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 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에서
백담사 ▼
전 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이다. ▼
만해 한용운 시인의 기념관과 교육관의 모습이다. ▼
만해 한 용운 시인의 동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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