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들처럼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민감한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으리라. 물론 나 역시도 그렇다.
월요일부터 산행 전날 밤까지는 수시로 일기예보를 체크해 보는 습성이 있다. 여름철에는 비 소식이
있나 없나가 큰 관심사였다. 물론 비소식이 있다고 해서 산행을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비가
내린다면 그만큼 준비물이 많기 마련이다. 겨울철에는 당연히 산행지역의 눈 소식과 추위가 관심사
일 수 밖에 없다.
산행중에 눈이 내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는 일 같기도 하여 가히 싫지
않지만 매서운 북서풍을 동반한 강추위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금요일 오후였다.
주말 산행지인 덕유산 지역의 일기예보를 살펴보고 있는데 막내이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감기 몸살이 너무 심하다며 이번 주 대간산행은 빠지면 안되느냐는 것이다.
백두대간이 어디 아이들의 장난인줄 아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귀가해 보니 어머님과 집사람이
한사코 막내이의 산행을 만류하는 것이었다. 낮에 병원에 다녀왔는데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입안이 신열때문에 다 헐었다는 것이다. 직접 병세를 확인해 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도 없어서 카페에 들어 가 산행 취소 댓글을 달고 내 배낭만 챙겨서 홀로 나서기로 하였다.
산행 일시 : 2009. 12. 19(토)
산행 코스 : 육십령-할미봉-서봉-(동봉.남덕유산)-월성치-황점
산행 시간 : 약 5시간
안내 산악회 : 경기 우리 산악회
오늘 백두대간 마루금은 육십령에서 출발하여 할미봉, 장수 덕유산이라고도 불리는 서봉, 남덕유산,
그리고 월성치를 지나 삿갓봉으로 해서 삿갓골재 대피소까지 이어지는 덕유산 구간이다. 할미봉과
서봉을 오르내리는 구간은 산세가 거칠고 암봉이 많아 난이도 면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백두대간의 위험 구간 중 몇 안되는 구간의 하나이다. 아래 사진은 지난 번 산행의 날머리이자,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육십령고개이다. ▼
육십령부터는 온전히 덕유산의 품속이다. 덕유산은 산꾼들로 부터 사계절 내내 사랑받는 산이다.
특히 겨울이면 눈꽃과 상고대가 아름답게 피어나 산행에 지친 산객들을 위로해 주곤 한다.
덕유(德裕), 크고 넉넉한 산이라는 이름은 나라에 난리가 날 때마다 주변 고을의 민초들이 숨어
들어 화를 피할 수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서 수도할 때 수 많은 맹수들에게 한 번도 해를 입은 적이 없다고 하여
덕이 넘치는 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덕유산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향적봉(1,614m) 일대는 북덕유산, 육십령에서 올라서는 서봉은(1492m) 장수 덕유산이라 부르고
남쪽 봉우리는 남덕유산(1,507m)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드는 모습이다. ▼
할미봉의 암능구간이다. 어떻게 저 구간을 무사히 통과할 것인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
육십령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2.2km를 걸어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할미봉에 올라야 할 차례이다.
할미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듯 가팔랐다. 너무나 가팔라 주위를 살펴 볼 여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길엔 하얀 눈이 덮여 있었고 그 눈은 차가운 날씨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 길은
아주 미끄러운 길이었다. 조심조심 발 디딜 곳을 찾아 몸을 움직여야 했다. ▼
해발1,026m의 할미봉 정상 일대는 온통 바위였다. 말 그대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절벽처럼 깎아내린 듯 매끄러운 바위들이 보기에도 위태로웠다. 날씨가 흐려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상주변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할미봉은 백두대간의 정통성있는 맥으로서 너무도 당당하고 억센능선이었다.▼
할미봉이라는 이름은 할미봉 아래에 있는 할미성이라고 부르는 성터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쌓았기 때문에 할미성이라 했고 자연스럽게 할미성이
있는 봉우리를 할미봉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정상석에 써 있는 할미봉이라는 붉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전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 수 많은 바위에 새겨져 있는 붉은 글씨를 보는 듯 해서
싫었다. ▼
할미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암벽이었다. 로프에 의지해 조심조심 내려갔다. 과연 백두대간의
난이도 A구간 다웠다. 어느 여회원께서 로프에 매달린 채 어렵게 어렵게 내려오고 있다. ▼
말로만 듣던 대포바위가 불과 430m의 거리에 있었다. 마음 먹고 다녀오면 20 여분이면 충분하겠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대포바위(일명: 남근석)에 관한 안내판이다. 이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진주성을 치기위해 함양을 거쳐 육십령재를 넘어와 고갯마루에서 할미봉 중턱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큰 대포가 서 있음에 깜짝 놀란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운봉을 거쳐 남원방향으로
선회해 창계지역이 화를 면했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그 생김이 대포처럼 보이기 때문에 대포바위라
부르지만,
실상 가까이 다가가 보면 남자의 성기와 같아 남근석 혹은 "ㅇ바위"라 부른다. 다만 부르기에
너무 상스럽다 하여 남근석으로 통용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옛날부터 사내아이를 갖지못한 여인들이
이 바위에 절을 하고 치마를 걷어올린 채 소원을 빌면 사내아이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금도 대포바위 보다는 남근석 혹은 "ㅇ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닌 대포바위를 직접 가 보지는 못하고 멀리서 사진으로만 감상하기로 한다. ▼
할비봉 내려오는 길은 이렇게 가파른 계단도 설치돼 있었다. 밑을 내려다 보면 정말이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
일단 할미봉을 내려서면 능선은 비로소 부드러워진다. 이제 서봉은 3.5km를 남겨두고 있었다. ▼
백두대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수 많은 산악회의 리본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
벌써 육십령을 떠나온 거리도 5.2km나 됐다. ▼
서봉으로 향하는 길은 오름길의 연속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간간이 소리 죽인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가 숲에는 아름다운 눈꽃이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위로가 되었다. 그 황홀함이 있었기에 쌓인 피로가 잊혀지는 듯 했다. ▼
강풍이 휘몰아치는 음산한 날씨 속에 서봉의 암능이 버티고 서 있었다. ▼
가무잡잡한 바위사이로 솟아난 나무도 분명 아름답다. 그런데 다시 그 나무위에 피어 난 눈꽃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표현하랴. 할 말이 없었다. 입이 닫혀져버렸다. 일단 추위 때문에 닫혀진
입은 백색 절경앞에서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
거뭇거뭇한 나목들이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음울하게 서 있는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였다. 그것은
회색껍질의 나무위에 하얀 순백의 물감을 곱게 곱게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
백색의 황홀함에 빠져 한 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 새 "장수 덕유산"이라고도 불리우는 서봉(1,492m)
이었다. 서봉에는 구름 가득한 컴컴한 날씨였고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어서 빨리 이곳을 피하고 싶었다. 온도계가 없어 정확한 온도측정은
어려웠지만 체감온도는 족히 -30도는 됐으리라. ▼
사진이고 뭐고 다 싫었다. 다만,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서봉에서 내려오는 길 또한 심한 급경사였다. 그 길을 따라 조심조심 남덕유산(1,507m)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은 여기서 동남쪽으로 월봉산(1279m)~금원산(1353m)~기백산(1330m)으로 이어지는 튼튼한
산줄기 하나를 가지친다. ▼
남덕유산은 대간 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지만 춥다고해서 알현(謁見)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진정한 산꾼의 자세가 아닐성 싶었다. 물론 남덕유산은 금년 초에도 왔었던 곳이다. 드디어
해발 1507m의 남덕유산이다. ▼
강풍이 휘몰아친다. 체온이 급강하되는 것 같았다. 몹시 추워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진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
재빨리 기념사진만 촬영하고 우리는 삿갓재 대피소 방향으로 하산했다. ▼
남덕유산에서 월성치로 가는 길은 뚝 떨어지는 것처럼 경사가 급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가
다 돼가고 있었지만 온 누리를 밝혀주어야 할 태양은 떠 있기나 하는 것인지 하늘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었다. 추위도 잊을 겸해서 발길을 서둘렀는데 얼마나 빨리 달려왔던지 20여 분만에
월성재에 이르렀다. ▼
그런데 월성치를 지나 내친 김에 삿갓봉으로 향하려는데 앞서 간 선두그룹이 더 이상 진행하지
말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후미의 산행시간을 고려한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월성재
에서 황점마을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
산행 날머리인 월성 공원지킴터이다. ▼
뒷풀이 장소인 황점 마을이다. ▼
<에필로그>
겨울 산은 확실히 힘들다. 눈이 있어 진행 속도가 더디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뿌듯함이 있고
성취감이 있어 좋다. 오늘 걸었던
겨울 덕유산, 매서운 북서풍이 할퀴고 간들 어쩌랴, 날씨가 조금추웠던들 어쩌랴. 산 전체가 온통 화사한 눈 천지이고 하얀 순백의 세상이고 아름다운 서리꽃으로
뒤덮혀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
드러누운 들풀에도 키 작은 철쭉나무에도 웅크린 곰 같은 바위에도 겨울 덕유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 감격을 담아, 이 황홀함을 담아 나는 또 다음 산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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