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 사진첩/천왕봉~추풍령

무룡고개-영취산-전망대-977봉-깃대봉-육십령

 

지난 주 무박산행과는 달리 오늘 산행은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편안한 산행이 예고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 6시 조금 지나 아파트를 빠져 나올려고 하는데 전날 일기예보와는 달리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차거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

몸은 잔뜩 움츠려들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막내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내내 창밖을 주시해 보았다. 어느 곳에는 비가 그쳐 있었고, 또 어느 곳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걷게 될 지역의 날씨는 어떠할까? 지금 전개되고

있는 차창 밖의 날씨는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우리에겐 오직 오늘 걷게 되는 백두대간

마루금의 날씨만이 크나 큰 관심사였다.

 

비 보다는 당연히 눈이 나을 듯 싶었고 눈은 지난 주에 원 없이 보고 즐겼기 때문에 눈 보다는

청명한 날씨가 좋을 듯 싶었다. 물론 날씨는 겨울날씨이니 만큼 그저 바람이 없는 상태에서

섭씨 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가 가장 이상적일 듯 싶었다. 그러나, 우리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현지의 날씨는 악천후, 그 자체였었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산행 일시 : 2009. 12. 5(토)

산행 코스 : 무룡고개-영취산-큰바위전망대-977봉-구시봉(깃대봉)-육십령

산행 시간 : 약 4시간

안내 산악회 : 경기우리 산악회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관계로 도로가 미끄러워 차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하여 우린 산행

들머리에 훨씬 못 미치는 지점에서 하차할 수 밖에 없었다. 들머리인 무룡고개까지 무려 40 여분을

걸어야 했었다. ▼

 

 

40 여분을 걸어 지난 번 산행 날머리이자, 오늘 산행 들머리인 무룡고개에 도착했다. 무룡고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무시로 백두대간을 넘나들었고 주민들은 아직 호랑이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믿는 고개이지만,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겐 여전히 쉼터로 사랑받고 있는 고개이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적설량도 많아졌다. 날씨는 추웠고 하늘은 어둡기만 했었다. 영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은 어느 새 하얀 눈으로 덮혀 있었다. 자연이 조화를 부렸기 때문일까, 똑같은

영취산 정상석이지만 지난 번에 보았던 정상석과 지금 만나는 정상석은 확연히 달라보였다. ▼

 

 

육십령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취산을 내려서는 길에는 무너진 영취산성이 있다고 들었다.

그 옛날 삼국시대 신라 지마왕(祗摩王) 때 신라의 침범을 막기위해 가야에서 축성했다고

알려진 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왜적과 접전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성이다. 1983년 12월 20

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85호로 지정된 성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무너진 성은 고사하고

그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도록 하얀 눈만이 온통 대지 위를 뒤덮고 있었다. ▼

 

 

무너진 영취산성을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을 접어두고 덕운봉(956m)으로 향했다. 논개 생가가 4.6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편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가 전사하자 왜군의 승전을 측하하기 위해 모인 촉석루로 나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으로

뛰어내려 충절의 상징이 된 논개였다. 논개의 발자취는 지난 번에 이미 살펴보았기에 덕운봉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

 

 

덕운봉 정상에 이르렀다. 혹독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산악회에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의 몸도 바람에 흔들렸다. 손끝이 시리다 못해 아려왔다. 떨어져나가는 듯 아팠다.

길라잡이 겸 덕운봉 정상목이었지만 이곳이 해발 몇 미터의 높이인지 눈자국에 가려 알수가 없다. ▼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은 끊겨졌다가는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다시 끊겨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선두가 러셀(Russel)을 하면서 앞서 나갔지만 바람이 잔인하게도 그 흔적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연이 부리는 교태는 너무 자연스러웠고 너무 아름다웠다. 한떨기 눈꽃으로 피어 난 소나무가
발길을 멈추게 하기도 하였지만 온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때문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

 

 

덕운봉을 떠나 한 참을 걸어 온 것 같은데 덕운봉은 겨우 3.7km만을 지나왔을 뿐이었다. 민령은 1.4km를

남겨두고 있었다. ▼

 

 

해발 977m의 북바위에 이르렀다. 아무리 추워도 기념사진이나 촬영해 두려고 막내이를 찾았는데

막내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멈춰 서면 온 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추위인지라 다소 힘은

들어도 계속 움직이고 싶었으리라. 어서 빨리 산행을 마감하고 싶었으리라. ▼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속절없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참으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다. 사람이 얼마만큼 참아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듯

싶었다. "默言", 수도자의 자세가 되어 산길을 걸어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민령에 이르렀다.

민령은 백두대간의 어느 산길이 아니라 어린 시절 뒷동산처럼 평화스러웠다. 이곳에서는 추위도

한풀 꺾이는 싶었다. ▼

 

 

배가 고파왔다. 그러나 마땅히 먹을 장소도 없었고 설령 그럴만한 장소가 있었더라도

이 추운 날씨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걸어나갈 수도 없었다. 막내이에게

물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는 것이 어떻느냐?"고..  기다렸다는 듯이 막내이가 대답했다.

"배고파서 더는 진행할 수 없다고...."

우린 서 있는 자세에서 빵 몇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지나 온 능선을 뒤돌아 봤다. 참으로 숨가쁘게 걸어 온 길이었다. ▼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 1,014.8m의 구시봉에 올랐다. 이제 고통스러웠던 오늘 산행의 마감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

 

 

얼마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지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손끝이 시려서 스틱을 올바로 쥘 수가

없었다. 막내이에게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고통이면 충분할 것을 일정부분 아이

에게 전가시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렇게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다. ▼

 

 

구시봉 정상석의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그 아래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기를 꽂았다고 하여 깃대봉이라

불렸었으나, 옛날 한 풍수가 이 산에 올라 산의 형태가 구시형이라 하여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지명이 변경되었습니다." ▼

 

 

 

깃대봉 정상석이다. ▼

 

 

분명 대낮인데도 하늘은 어둡기만 했었다. 오늘 산길을 걷는 동안 내내 잿빛 하늘이었다. 멀리 하얀

눈으로 뒤덮인 덕유산 능선이 희미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내려가는 길에 깃대봉 샘터가 있었다. 길가 한 쪽에 있었다. 길가에 있는 데도 눈에 언뜻 띄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눈 속에 샘터 주위가 흐르는 샘물에 녹아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샘터가 있음을 모르고

지나는 이들은 그저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맛은 따뜻하고 정갈했다. 오늘 산행으로 언 몸을 말끔히

녹여주는듯 싶었다. 역시 약수는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이었다. ▼

 

 

샘터 곁에는 작은 팻말이 서 있었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 하나 풀어 던진 약수 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
의 약수 물에서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한 모금의 약수 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니다.'
  
약수를 마시는 순간, 아름다운 글귀를 읽는 순간, 인적이 드문 깊은 산길에서 위로가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깃대봉 약수터을 사랑하는 사람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

 

 

깃대봉 약수터에서 약수 한 잔 걸쭉히 마시고 멋진 설경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

 

 

깃대봉에서도 육십령으로 내려서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눈은 계속 내렸고 바람은 그침없이 불어

댔다. 도로로 내려서자, 충령탑이 서 있었다. 6.25 사변 때 공비를 토벌하다 산화한 용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한 탑이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

 

 

 

육십령 휴게 매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인적은 거의 끊어진 상태이다. ▼

 

 

26번 국도가 지나는 도로변에는 장수군(長水郡)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장수는 본래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이 높고 물이 긴 고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름이

장수(長水)이다. ▼

 

 

반대편에 세워져 있는 경상남도 함양군 표지판의 모습이다. ▼

 

 

매점 주차장 한 켠에 '육십령'이라고 써 있는 큰 비(碑)가 보였다. 물론 추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

 

 

남에서부터 오르는 백두대간 덕유산 종주는 육십령(六十嶺)에서부터 시작한다. 육십령은 고개가

길고 완만하여 여슨(느슨)고개라 했는데 나중에 여슨을 예순으로 보아서 육십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

이라고 한다. 사진은 함양군에서 설치한 표지석이다. ▼

 

 

 

표지석 뒷면에 있는 육십령 소개글이다.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는

이곳 육십령(734m)은 지금은 경남과 전북의 경계이지만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두나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고개였으니 전하는 사연도 하나 둘이 아니다. 이곳에서 안의

감영까지의 거리가  60리이고, 장수 감영에서도 60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크고 작은 산굽이를 60개나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한, 산적이 많아 이 고개를 지나려면 60명이 모여 올라가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을 유력한 설로 본다면, 산적의 무리가 대단히 컸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흘러 온 세월 탓일까? 육십령의 산적은 자취가 없고 그들이 머물었을지도

모르는 그 자리에는 휴게소가 들어서 있으며 아울러,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26번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지금도 주요교통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육십령 마을의 진입로와 육십령 마을의 모습들이다. 옛날에 산적들이 많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을은 평온하기만 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