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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 사진첩/호남권 산행

강천산

 

"해 따라 달 따라 세월이 흘러, 내 나이는 자꾸자꾸 늘어만 가는데 가버린 시간도

옛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씩 우리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를 두고서도 어이없게도 얼룩진 마음으로 허허한 공간을 향해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가버린 세월을... 늘어버린 나이를...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을 두고

어쩌라는 것인지 참으로 부질 없이 객기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잠시 상념에 잠겨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눈을 감아보았다. 그 순간, 나와 함께 했던 무수한 이름들이 떠오르고 그 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다시 진하게 오버랩되는 듯 했다. 그렇다. 강천산이었다. 2001년 8월, 그 무덥던 여름날에

실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출렁거리는 초록잎 사이로 가려진 그 사람의 얼굴을 처다보는 것으로도

마냥 행복해 했었던 곳이 바로 그곳 강천산이었다.


그로부터 근 10년만에 콘크리트 문화로 뒤범벅된 회색도시를 빠져나와 불타는 단풍의 황홀함을

느끼면서 그때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산길을 걷기 위해 강천산을 찾아 온 것이다. 물론 오늘도

우리 막내이랑 함께 하는 산행이었다.

 

산행 일시 : 2009. 11. 14(토)

산행 코스 : 주차장~현수교~신선봉~광덕산~시루봉~산성산~강천산~깃대봉~주차장

산행 시간 : 약 5시간 30분

안내 산악회 : 경기우리 산악회

 

 매표소를 지나 현수교 방면으로 진행하다 보면, 좌편에 맑은 계곡수가 흐르고 그 틈새에 서식하고

있는 갈대를 만난다. 잔뜩 흐린 날씨를 타고 부는 바람에 부드럽게 출렁이는 갈대를 보면서 벌써

내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한다. ▼

 

 

사실 강천산의 아기 단풍도 지난 주를 고비로 한물 간 느낌이었는데 막상 와 보니 수 많은 인파들이

깊어만 가는 만추의 정취를 느끼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결코 만만찮은 산행시간을

감안하여 인파들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분명 청정수역이 맞았다. 참으로 맑은 계곡수가 흐르고 있었다.

 

 

강천산의 얼굴 마담격인 병풍폭포 앞에서 발걸음은 절로 멈춰졌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포토존에서

한 컷 땡겼다. ▼

 

 

병풍폭포는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고 있는 폭포로 높이 40m, 물폭 15m, 낙수량이 분당 5톤이며

작은 폭포는 높이 30m, 물폭 5m로 전설에 의하면 병풍바위 밑을 지나오는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

해진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일까? 평소 죄 짓고 살 사람도 아닐진데

이곳을 지나면서 마음이 한결 청량해지는 것 같았다. ▼

 

 

금강교를 지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강교(金剛橋)라는 글씨가 새겨 진 다리 난간의 조형물들을

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의력이 산만한 사람들은 아무런 느낌없이 통과하고 만다.

이곳 강천산의 행정구역이 어디이던가? 고추장으로 유명한 바로 순창지역이다. 따라서 조형물들은

당연히 빨간 고추의 모습인 것이다. ▼

 

 

깃대봉 갈림길이다. 여기에서 나와 막내이는 무심코 우리 산악회와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색깔로

제작한 리본을 착용한 다른 산악회를 따라 깃대봉 방향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 참을 오르다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져 확인해 보니 방향이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쏜살같이 되돌아 와

일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수 많은 산객때문에 알바를 하였던 것이다. ▼

 

 

강천산에는 붉은 단풍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풍 못지않게 아름다운 메타쉐콰이어 길이 있었다.

일행을 쫓아 뛰고 뛰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런 길은 놓칠 수 없었다. 강천산은 참으로 우리에게

다양한 풍경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

 

 

 

정녕 가을은 깊어만 가는가? 만추의 계절이 때로는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아직은 철 늦게 피어 난

단풍의 무리들이 잔존하고 있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었다. ▼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이다. ▼

 

 

강천사의 대웅전이다.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887년)때 도선국사가 개창했다고 한다. ▼

 

 

가까이에서 바라 본 대웅전의 모습이다. ▼

 

 

삼인대, 삼인대를 지나면서 잠시 힘을 주어 역사를 회고해 본다.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에

이어 공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왕비인 신씨(愼氏)를 폐출(廢黜)하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새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 윤씨는 결혼한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에 왕자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이때 순창군수인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 세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페위된 신비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기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이곳을 삼인대(三印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순창 삼인대의 안내판이다. ▼

 

 

절의탑(節義塔), 2003년에 순창삼인 선양문화회에서 순창 300개 마을에서 각 2개씩의돌을 모아

절의탑을 세워서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삼인대는 절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7호이다. ▼    

 

 

 

현수교를 건넌다. 좁다란 현수교 다리를 건너는 데에는 실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수 많은 인파

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에서 앞서 간 일행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

 

 

50미터 높이의 구름다리 현수교를 통과할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오늘은 동시에

30명 이상이 통과할 수 없다는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수십 명이 한꺼번에 통과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현수교를 통과하고 나면 곧바로 깔닥고개가 시작된다. 한참을 올라 신선봉의 전망대에 이른다. ▼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강천사가 아득하다. 오늘은 날씨가 몹시 흐려 주변 조망은 별로였었다. ▼

 

 

전망대에서 다시 신선봉으로 되돌아 왔다. 광덕산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

 

 

빽빽히 소나무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숲하며, 늦으막스레 물들기 시작한 연청색 떡갈나무 잎하며, 

간간이 내리고 있는 비에 젖어 쌓여있는 이름 모를 수목들의 낙엽이 벌이는 희귀한 자연적 축제가

산 나그네의 발길을 가끔씩 멈추게 했지만 우리는 어느 새 해발 578m의 광덕산 정상에 이르고

있었다. ▼

 

 

 

광덕산을 지나면서 잠시 일견 무질서 해 보이는 바윗길이 나타난다. 바위들이 들쭉날쭉 급준한

산사면을 혼란스레 뒤덮고 있는 양상을 보이다가 곧바로 철재계단이 이어졌다. 다시 산봉우리들을

몇 개 오르내리다 보니 시루봉 가는 길이었다. ▼

 

 

시루봉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정상석이 없어 허전했다. 지난 주 13시간의 백두대간산행 경험덕분에

오늘 같은 산은 일도 아니다는 듯 막내이의 모습이 여유롭기만 하다. ▼

 

 

 

시루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순창 뜰이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던 탓에 시계까지 좋지

않았다. ▼

 

 

 

시루봉에서 훌륭한 목재테크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막내이의 모습이다. ▼

 

 

지나 온 시루봉을 되돌아 봤다. 하나의 산 봉우리가 단 하나의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다. ▼

 

 

시루봉을 조금 지나니 동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금성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금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9년에 개축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년)에 보수,

광해군 14년에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였으며, 효종 4년(1653년) 성 위의 작은 담을 수리하여

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 소실됐다고 한다.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있다. ▼

 

 

산성터이다. 그러나, 산성의 역사나 유래에 대하여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 온 시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고,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과 또 그 이후의 아이들이 살아갈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란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수 천년, 또는 수 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란 언제나 오늘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참으로 무상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세월 탓일까?  아니면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이 시대의

몰 역사성 때문일까? 지나 온 우리의 삶과 역사에 대해 이토록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

일까? 성 위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천 수 백여 년 전의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못 다한 삶이 아직 그 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방향에서인가 성을 지키던 그 때

그 병사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했다. 성을 쌓고 지키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린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 명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

 

 

성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신비하게 시간의 문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시간의 문을 지나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물론 시간여행이란 것이 별것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런 것이 시간

여행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

 

 

강천사 갈림길이다. ▼

 

 

운대봉이다. 어느 분이 촬영해 주신다기에 모처럼 막내이와 함께 했다. ▼

 

 

강천저수지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1코스는 북문방향으로 제2코스는 구장군폭포 방향으로 하산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산길을 더 걷기위해 제1코스를 택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구장군 폭포의 유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길을 더 걷기위해 구장군폭포로 하산하지 않았다. ▼

 

 

구장군폭포의 위용이다. 물론 이 사진은 제2코스를 선택한 어느 산우님의 작품이다. ▼

 

 

금성산성의 북문이 있던 터이다. ▼

 

 

모처럼 북문에 대한 소개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적에 설치했었는지 탈자가 생겨나고 안내판이 낡아 흉물스러웠다. ▼

 

 

북문에 있는 성의 잔존하는 모습이다. ▼

 

 

북문의 성에 올라 내려다 본 담양호의 모습이다. 건너 편의 산은 추월산으로 추정된다. ▼

 

 

낙엽쌓인 길을 따라 걸었다. 아니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 산길을 찾기가 힘이 들었다. 뿐만 아니다.

낙엽이 쌓인 산길은 실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간간이 단풍나무가 짙게 물들어

빛나고 있고 떡갈나무를 비롯한 이름모를 수목들이 가을의 숲으로 변한 풍광이 주는 감동은 누구

라도 여지없이 시적인 감수성을 폭발 시키고야 만다. 어느 사이 형제봉 삼거리이다. ▼

 

 

다시 우리는 왕자봉 삼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을 다녀 와서 다시 깃대봉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

 

 

해발 583m의 강천산(왕자봉)정상이다. 1981년 국내 최초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강천산은 역시

호남의 소금강답게 수 많은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었고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과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아기 단풍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

 

 

왕자봉을 지나 깃대봉 삼거리에 이르렀다. 날머리인 관리사무소 까지는 1230m를 남겨두고 있다. ▼

 

 

드디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고 주차장에 모였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뒷풀이를 하고 비단결 같이 잔잔한

강천호수를 바라 봤다. 추위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와 함께 문득 그리움이 내렸다. 10 여년 전, 바로

이곳에서 함께 했던 그 친구를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