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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진첩/천왕봉~추풍령

우두령~여정봉~바람재~황악산~운수봉~여시골산~궤방령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은 산을 닮아가고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물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의 의미를 문학성과 연결시켜 볼때 산과 연을 맺고 산 밑에 살았던 사람이 쓰는 글에서

나무냄새, 풀냄새, 산바람냄새가 나고, 물가에 사는 사람이 쓰는 글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청아하고 수초냄새가 나고 물비린내가 난다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내 어쭙잖은 글에서는 과연 어떤 냄새가 풍겨날까? 아니 냄새라는 것이 나긴 나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물 보다는 산쪽에 가까운 존재이니 냄새가 난다면 당연히 나무냄새,

풀냄새가 나야 할 것이다. 글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을 담아내고 사람을 담아내고 사람의

자리를 담아낸다.

 

내글에서 어떤 냄새, 어떤 향기가 풍겨나던 오늘도 나는 새 봄의 희망을 가슴 깊숙이 끌어

안고 자연의 싱그러운 내음을 듬뿍 느끼고자 산길을 걷는다. 그리고 느끼는 감정의 이완

방지하기 위하여 언제부턴가 녹음기를 준비했다. 산길을 걸으면서 연초록빛 새생명이

트는 소리,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 가랑잎 구르는 소리 등을 들으며 그때 그때 떠

오르는 시상(詩想)을 고이 간직해 두고자 함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소박한 생각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산길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큰소리로 휴대폰

통화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자랑거리라고 이어폰도 없이 고음질의 음악이나

라디오를 들어가며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태들은 여지없이 내 시상(詩想)에 대한 잔인한 배반

으로  다가오고 만다. 이럴 땐 정말이지 등산바지 깊숙이 들어있는 녹음기를 꺼내 허공을

향하여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어서 빨리 그 분들의 올

바른 양식(良識)이 정립되길 바랄 뿐이다.

 

 

산행 일시 : 2010. 3. 20(토)

산행 코스 : 우두령~여정봉~바람재~형제봉~황악산~운수봉~여시골산~궤방령

산행 시간 : 약 5시간

안내 산악회 : 경기우리 산악회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날씨는 비도 내리고 황사현상도 있고 거기에다 강한 바람도

분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악천후로서 등산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집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현명할 듯 싶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걷는 사람들이 어디 날씨

따위에 구애를 받겠는가?

 

황간휴게소에 이르렀다. 날씨는 흐렸지만 일단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

이었다. ▼

 

 

휴게소 길 건너 뒷편에는 제법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산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 산일까 궁금했다. ▼

 

 

우두령은 우등령(소의 등)이 구전되어 우두령으로 변했다고 전하며 질매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질매재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아니라 대항면 주례리와 구성면  마산리를 넘나드는

고개로서 질매는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인 길마의 사투리라고

한다. 사진은 우두령의 상징인 소의 형상이다. ▼

 

 

오늘 백두대간의 산행입구이다. ▼

 

 

우두령을 지나 능선에 접어들면 첫 봉우리인 삼성산(986m)을 만난다. 삼성산이라고 해봐야 표지석도

없는 그런 밋밋한 봉우리였다. 사실 삼성산은 아무 느낌없이 지나치고 여정봉에 올라서야 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삼성산 지나 여정봉 미처 가기 전 전망대에서...

 

 

앞으로 걸어야 할 긴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바라보면 그것은  아득한 그리움이자 설렘이었다.

어쩜 슬픔이고 아픔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사랑이고 희망이었다. 따스한 어머니의 품같기도

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웠던 생의 한 순간이었다. 이런 저런 상념 속에 편안한 산길

을 걷다보니 여정봉(1,030m)이었다. ▼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 현수막 뒤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푸르른 편이었다.▼ 

 

 

여정봉을 지나 바람재로 향했다. 길이 몹시 질퍽거렸다. 지난 며칠간에 내린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결빙구간이 없어서 아이젠은 착용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렇게 질펀한

길은 차라리 아이젠을 착용하고 결빙된 구간을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

 

 

드디어 해발 810m의 바람재에 이르렀다. 필시 바람이 많아 바람재라고 붙여진 고갯마루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불어오던 바람은 마침내 바람재에 도달하면서 "바람재"라는 그

이름값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바람 많은 바람재에서 식사를 하였다. 바람 많은 바람재였지만 아직은 훈풍이 불어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재, 시원한 바람소리와 함께 산새들의 우짖는 소리도 들

었으면 좋겠다. ▼

 

 

바람재를 떠나 형제봉으로 향했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날씨도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금새 내릴 것만 같았다. 발길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 해발 1040m의 형제봉에 이르렀다. 이 곳은 재작년 겨울에 이미 다녀간

길이었다. ▼

 

 

형제봉에서 황악산(黃岳山. 1,111m)으로 오르는 길 역시 가팔랐다. 그러나 거칠지는

않았다. 황악산은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지만 어찌된 일인지 골산(骨)이 아닌 전형적인

육산이다(肉).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는 이름도 지니고 있는 산답게 부

드러웠다. ▼ 

 

 

직지사를 멀리 놓아둔 채 우리는 황악산을 내려섰다. 신라 눌지왕2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집인 직지사가 황악산 동쪽에 안겨있다.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켜 절을 짓

게 함으로써 직지사가(直指寺)가 되었다고 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

佛) 즉 사람이 갖고 있는 참된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 밝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곧 마음속의 부처를 갈고 닦으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지나 온 황악산을 되돌아보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사위가 몹시 어두웠다. ▼

 

 

황악산 2260m, 쉬었다 가세요~! 하지만 갈길이 바쁜 산객들은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다. ▼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세차게 불어닥치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갈길은 멀었다. 우의를 입을까도 생각했었지만 가능하면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걷고 싶었다.

운수봉(680m)이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천후가 될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날씨가 좋기만

했었는데 지금 날씨는 역시 슈퍼 관측기의 위력때문이었는지 일기예보는 정확히 맞아떨

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상석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

 

 

운수봉을 지나니 비바람은 더욱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더는 참아내기가 힘들 것 같아서

막내이와 나는 배낭덮개도 씌우고 우의도 갈아입었다. 여시골산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

"여시굴"인듯한 굴이 하나 있었다. 

 

 

해발 620m의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여시골산이었다. ▼

 

 

바람이 통하지 않는 레인코트를 입으니 몸이 더웠다. 땀이 많이 흘렀다. 그래서

얼굴은 홍당무였다.

 

 

몹시 질퍽거리는 산길을 걷다보니 힘도 더 들었고, 신발과 등산바지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궤방령으로 내려서며  힘이 든 표정을 짓는 막내이의 모습이다.

 

 

궤방령에 내려섰다. 궤방령은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을 오가는 세 관문중의 서쪽 관문으로서

주로 상로(商)로 이용되었다는 고개이다.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갈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를 믿는 마음 약한 유생들은 추풍령 대신

이 궤방령을 넘었다 한다. 하긴 과학이 신의 영역을 넘보는 21세기에도 시험에 관한 한 얼

마나 속설이 많은가.

 

사진은 궤방령 표지석 설치공사 현장의 모습이다.

 

 

사진은 궤방령 도로변에 쌓은 돌탑이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이 있고 그 밑에 다시 매곡면의

여러 마을(里)의 이름의 표석이 있다.▼

 

 

 또한, 괘방령(掛榜嶺. 357m)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

(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장사꾼들이 관

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였다.▼

 

 

 

 괘방령에 관한 안내표지판이다. 상세한 설명이 깃들여져 있다. ▼

 

 

과거를 보러가던 조선 선비들의 조바심을 달래 주었던 궤방령을 벗어나 다시 백두대간 산길로

들어서면 가성산, 장군봉, 눌의산을 차례로 넘게 된다. 4월 3일의 대간 마루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사진은 충북 영동방면의 도로이다. ▼

 

 

오늘 산행은 후반부에 날씨가 좋지않아 급히 달려온 덕에 하산시간이 비교적 빠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흙투성이인 등산화며 등산바지며 배낭을 정리하느라 단축된 시간 이상으로 소비하고 말았

다. 사진은 경북 김천시 방향의 도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