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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 사진첩/금북정맥

금북정맥 제4구간(요셉의집~곡두고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산행이 바로 우중 산행이다. 물론 비 오는 날 구질구질한 날씨에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유난히 비오는 날의 산행을 거부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나다. 혹자

큼한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하는 것도 특별한 묘미가 있다고도 하지만 암튼 내게는 절대 금물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근자에 이르러 비 오는 날 산행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오늘 금북정맥을

며칠 앞두고부터 일기예보는 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고가의 수퍼컴퓨터 덕택인지 요새들어서 일

예보는 빗나가지 않고 거의 적중하고 있다.

 

 오늘처럼 산행이 잡혀 있는 날 등에는 마음 속으로 가끔씩 일기예보가 틀려주기를 바라기도 했었지만 

얄미울 정도로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오늘도 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무정한 비는 아침부터 내리고 있

었다. 왠만한 산행 정도는 그냥 접고도 싶었지만 금북정맥이라는 목적산행은 그럴 수가 없었다.

 

 비 오는 날 이른 아침, 버스 집결장소인 한성병원 앞으로 향했다. 산행 후에 갈아입을 옷가지며 신발 등

이 한 꾸러미였다. 배낭의 무게에 짓눌려 쭉 쳐진 어깨에다가 한 손엔 짐꾸러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든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 같았을 것이다.

 

 

산행 일시 : 2015. 4. 19(토)

산행 코스 : 요셉의집~ 버스이동~양곡리~국사봉~국수봉~차령고개~봉수산~장고개~곡두봉~곡두고개

산행 시간 : 약 7시간

 

 

 

 

산행 들머리인 양곡리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강한 빗줄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오늘 산행도 그리

만만한 산행이 아님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강한 빗줄기를 피해 경로당 건물앞에서 산행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터벅터벅 봄비를 맞으며 신작로를 걸어나갔다. 국외자의 입장에서는 이 모습을 보노라면

충분히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킬만도 했을 법하다.▼

 

신작로를 지나 드디어 산길에 접어들었다.▼

 

해발 402미터의 국사봉 정상이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비맞은 생쥐모습이었다.▼

 

해발 382.8 m의 국수봉 정상이다.

 

 

해발 382.8미터의 국수봉 정상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꽃비가 내렸을 터인데 오늘 산행은 봄꽃을 시샘하는 봄비 덕택에

꽃비를 만날 수 없었다.아쉬움에 만개한 산벚꽃 앞에서 한 컷 땡겨보았다.▼

 

 

 

 드디어 오늘 산행의 중간지점인 차령고개였다. 차령고개는 오늘날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불씨가 됐던

고개이기도 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불러 훈요

십조를 전하였다.

 

 그는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 이남과 금강외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

다고 한다. 차현(車峴)이남 공주강(현재 금강)밖의 산형지세가 배역(背逆)하여 인심도 그와 같으므로

조정에 등용치 말라는 내용이 바로 이 훈요십조이다.

 

 차현은 현재의 차령고개를 발한다. 물론 차령산맥 또한 이 고개 지명을 이용하여 유래되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고개였지만 표지석만큼은 기념으로 담아두고 싶었다.▼

 

 

 이 고개는 공주에서 천안으로 통하는 기경계로써 호남지방에서 한양으로 넘나드는 삼남대로의

가장 큰 고개로 이름나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강진에서 천안까지 국도 23호선에서 가장 높은

고개로 알려져 있다.

 

 산의 높이가 360m나 되고 고개 양쪽의 산봉우리가 쌍으로 솟아있어 옛날에는  이 고개를 쌍용

고개라고 불렀다.▼

 

차령고개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제2라운드 산행에 접어들었다.▼

 

 

 

봉수산 정상이었다.▼

 

 

 

 

 

곡두봉을 넘어 드디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곡두고개에 이르렀다.▼

 

 

 

 

곡두터널입구이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흐르는 시냇물에 몸을 씻고 뽀송뽀송한 새옷으로 갈아입고...

뒤풀이 시간, 그래도 이 시간만큼은 절대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