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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세계/모락산 통신

흑백 색깔논리에 대한 단상

 

 작년 8월 미국 퍼거슨 지역에서 흑인소년이 백인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국 전역에 걸쳐 또 한번 흑백갈등의 도화선이 된 바 있다. 미국사회에서의 흑백갈등은 물

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 잊혀질만하면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게 바로 이 인종차별의 문

제이다.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는 거슬러 올라가면 흑인 노예제도의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며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186311일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람 링컨이 남부 연합 정부의 노예들에 대해 해방을 선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 뒤, 흑인 노예제도의 폐지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인권상황은 전혀 개

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당시 무폭력 무저항주의로 인도의 간디에 비교될 정도로 높

은 존경과 찬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차별주의에 대한 인권운동을

시작한다.

 

 1963828, 마침내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많은 미국

인들에게 흑인 종차별에 대한 공분을 가져오게 한다. “오늘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today)로 시작되는 연설은 인권과 평등을 갈구하는 전 흑인들의 간절한 호소였고

절규였었다.

 

“100년 전,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상징적 그림자의 주인공인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

해방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중대한 법령은 억압적 불평등의 불길에 타들어가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위대한 희망의 횃불로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들

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100년이 지난 후에도 분리의 수갑과 차별의 쇠사슬에 의해 흑

인들의 삶은 여전히 슬픈 불구의 상태입니.”

 

불과 3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한 마틴 루터 킹 목사, 그가 죽고 난 뒤 미국정부는

매년 1셋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해 그가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미국사회는 흑인 대통령이 태어나고 킹 목사와 같은 이들의 처절한 인종차별 철폐노력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흑백 인종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흑백 인종갈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흑과 백의 색깔에 대하여 생각해 보

기로 한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 ”(Black is beautiful) 물론 이 슬로건은 백인 중심의 가치관

대한 흑인들의 반발적 행동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검정색은 악마나 마녀, 심지어는

저승사자를 상징하는 색깔처럼 느껴지곤 한다. 공포와 죽음을 뜻하는 색깔 또한 당연히 흑색이다.

 

 심지어는 1930년대 미국경제의 대공황을 촉발시킨 미국의 증권시장 붕괴일인 19291028

일이 요일인 을  이유로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이라 하지 않은가? 이처럼 검정색은

온갖 부정적언어에만 사용하는 몹쓸 색깔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검정색과는 달리 하얀색은 천사나 성자, 그리고 평화와 환희를 상징하는 긍정의

색깔로 자리매김오고 있다. 백색이 긍정의 색깔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있다. 이런 의미에서만 본다면 검정색은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색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검정색이 반드시 부정적인 색깔로만 상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검정색은 우선 엄숙과 존경과 의리의 색깔이며 겸허의 색깔이기도 하다. 장례식장에서나,

전행사에나 의리를 중시하는 조폭들의 복장만 봐도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 사람이 나이가 면 머리가 하얘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얀머리 보다는 검

정머리가 더 젊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흰머리를 검정색으로 염색을 하는 것이다.

 

 검정색이 흰색 보다 왜 더 긍정적인지 그 이유를 또 살펴보자. 우선 색의 바탕위에 두 색이

아닌 다른 특정의 색깔을 지닌 티끌하나를 떨어트려 단순비교해 본다. 그 결과 얀색 바탕위

 티는 금세 알아보게 되지만, 검정색은 그 티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다시 말해 흰색은 모든

색을 거부하지만 검정색은 모든 색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직 나의 검정색 애찬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옛시조에서조차 백색보다는 검정색을 더욱 찬

미하였다.

까마귀 옷깃이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겉이 하얗고 속이 검은 백로가 겉은 비록 검지만 속이 하얀 까마귀를 비아냥대는

것을 질타하고 있는 것으로 당연히 검정색편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글의 전개로 보면 흰색과 검은 색을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처음엔 흰색을, 그리고 나

중에는 검정색으로의 긍정적인 입장변화가 있는 듯해 보이지만 사실 나는 백색 우월주의를 비

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Black is beautiful.“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만 재단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된 우리의

시각을 지금부터라도 달리해 보자는 의도일 뿐이다. “흰색좋다.”는 말이 편견인 것처럼

”Black is beautiful.“도 당연히 편견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참다운 논리일?

 

 결론인즉, 흰색이든 흑색이든 두 가지 모두 그저 하나의 색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흰

색이나 검은 색 모두 각기 그 색 나름의 장단점이 다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색

깔에 있어선 좋고, 있을 수 없고, 긍정과 부정 뿐만아니라 우월과 열등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흰색과 검정색은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색깔중의 두 가지 색일 뿐이라는

것이다.

 

 

 흑과 백, 두 모습의 산 : 아래 사진은 작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첫 기착지인 지누단다(1,780m)

롯지서 이른 아침에 맞이하는 안나푸르나의 모습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아직 새벽녘이기

때문에 어둡게 보이고, 산이 높아 해가 빨리 뜨는 안나푸르나는 밝은 햇살과 더불어 백색설원의 아

름다운 자태를 맘뽐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