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안에 있는 흰바위산 산행이 폭설로 인하여 무기 연기됐다. 그래서 대타로 준비한 곳이 관악산 육봉이었다.
육봉 가는 날,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친듯이 가슴이 먼저 빗속의 어딘
가를 향해서 달려가고 싶다. 아~! 이것 또한 살아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분명할 것이다.
내 마음은 지금 육봉 국기봉을 향하면서 살아 웁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내 자신에게 얼마나 감사하
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은 겨울비가 내리지만 날씨는 포근했다. 관악산에는 며칠 전에 내려
쌓였던 눈들이 봄 눈 녹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처럼 얼어붙었던 눈들이 녹아내려 계곡으로, 강으로, 그리고 다시 저바다로 흘러가듯
늙고 병들어 죽음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생각이 이쯤 미치면 복받쳐오르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내 얼
굴에 흘러내리고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로 찢어지고 만다. 흐느껴 울면서 뭔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헐클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어 아무런 생각없이 물끄러미 들여다 보곤한다. 머릿속에 가득
한 아픈 기억들을 떠올릴때마다 한가지 느껴지는 감상은 60여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눈깜짝하는 한 순
간이었다는 것이다.
이럴 땐 글을 쓰다가 잘못되어 쓰레기 통에 처넣는 파지처럼 내 삶도 구겨 던져버리고 싶다. 그러나 원
고지는 새로 준비하면 되지만 하나밖에 없는 내 삶은 다시 준비할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
다. 가장 외로울 때나, 가장 쓸쓸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오늘은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행복한 날이다. 귀에 익은 선율들이 빗소리처럼 잔잔하게 내 주위
에 울려 퍼지고 있다. 행복이란 그런 것같고, 슬픔 또한 그런 것같다. 비 오는 날이라 어쩔 수 없다. 겨울비
내리는 날의 산행이라서 그럴 것이다.
산행 일시 : 2014. 1. 25(토)
산행 코스 : 비산동~ 산림욕장~ 육봉 정상~ 팔봉 정상~ 불성사~ 서울대수목원~ 안양예술공원
산행 시간 : 약 3시간
산행들머리인 산림욕장 입구이다.▼
비교적 단순한 산같지만 관악산의 등로도 이렇게 복잡하다.▼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들이 홀연히 서 있었다. 나도 저 나무들처럼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다. 나는 묻고싶다. 인생의 어느 계절에 이르면 나도 저처럼 훌훌 털고 초연해질 수 있을까?▼
잠시 비를 피해 전망대 정자로 들어섰다.▼
드디어 국기봉에 이르렀다. 빗줄기가 제법 강해졌다. 기념셧터를 누르고 가장 빠른 하산 길인
불성사길로 향하기로 하였다.▼
운무에 사로잡힌 관악의 능선들이 캔버스에 하얗고 연한 물감을 뿌려놓은 듯 아름답기만 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수목원길을 지나 드디어 예술공원으로 내려섰다.▼
뒤풀이를 하고 짬을 내어 안양사지(安養寺址)를 둘러봤다. 그 동안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치곤 했었지만 오늘은 모처
럼 큰 맘먹고 들른 것이다.
안양사지(安養寺址)
안양사는 신라후기 흥덕왕 2년(827년)을 전후한 시기의 중초사에서 10세기 초 안양사로 바뀌며 16세기 중반까지 존
재하였다고 한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에 걸친 시굴 및 발굴 결과 사찰의 건물배치는 사찰 남쪽의 삼성천
에서 돌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중문과 전탑, 금당, 강당, 승방이 있고 좌우로 회랑이 형성된 사세를 지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초사지(中初寺址)
신라후기의 사찰로 추정되며 현재 보물 제 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명
(寺名)과 조성시기, 참여자 명단 등이 있는 당간지주로서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를 조성하던 826년을 전후하여 황룡
사의 주통 항창화상이 이곳에 머물며 지휘한 기록이 있어 당시 경주 황룡사와의 연관성 및 사찰의 격을 짐작할 수 있다.
서기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중초사를 안양사로 바뀌게 되며 안양사지 발굴시 중초사의 건물지와 관련한
초석 등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김수근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연 건축가 김중업 박물관의 모습이다. 건축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문외한이지만
김중업이 누구인지 자료 검색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
쳐 1939년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김중업은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드문 파리 유학파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를 만나 고전건축이 기저에 깔린 자신의 건축관을 형성
한다. 1941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중업은 1945년 광복 이후 월남해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건축가 김중업의 삶은 세계적인 건
축 명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나면서 큰 전환을 맞는다.
김중업이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곳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예술가회의’였다. 이 행사에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에게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그의 건축연구소에 입소해 1955년까지 3년간 사사받았다. 1956년 2월 귀국한 김중업은 한 달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사무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 활동에 들어갔다.
프랑스에서 배운 서구의 근대건축과 한국적 미를 조화시키며 활동을 이어갔다. 서강대학교 본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 본관,
진해 해군본부 등 규모가 큰 건물부터 개인주택 설계까지 활동 폭이 넓었다.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이 김중업의 삶의 빛이었다면, 그림
자도 있었다.
김중업은 5·16 군사정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개발에 반발하며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1971년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197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김중업은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전성기였던 김중업은 해외 생활
로 인해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설계 수주가 어렵자 김중업은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학교, 하버드 건축 대학원 객원 교수로 잠시
활동했다. 1978년 11월 귀국한 그는 그동안 축적했던 모든 역량을 발휘해 활동을 재개했다.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욱일빌딩, 평화의
문 등이 이때 지어진 대표적 건물이다. 김중업은 1988년 5월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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