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대청봉에서 채화되어 남으로, 남으로 뜨겁게 흘러 온 단풍의 불기둥은 머지 않아 내장산을
한바탕 휘저은 뒤, 한라산 어느 기슭에서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흘러 온 불기둥이 소멸되기
전에 그 찬란한 단풍들을 맞이하여 삶에 부대낀 영혼을 위로받기 위해 오늘도 대간 길에 오른다.
오늘 대간 길은 우리집 막내이와 함께 하는 역사적인 길이다. 평소 산이라면 기겁을 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세태인데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는다는 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 대간 길은 백두대간의 여러 구간 중에서도 난이도 면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잘 마칠 수
있을까? 무사히 종주할 수 있을까? 다른 산우들께 민폐라도 끼치는 건 아닐까? 출발 전 부터
솔직히 나는 우려반, 걱정반이었다.
오늘 산 길 역시 원래는 하늘재에서 출발하여 벌재로 향하는 북진형태를 취해야 하는데 벌재가
통제구간이라서 이른 새벽 통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벌재에서 출발하는 남진형태를 취하기로
하였다. 통제구역을 피하기 위하여 백두산을 향해 오르던 산길을 어느 순간에 지리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개운치 않은 산행이었다.
벌써 몇 번째 변칙산행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산행을 해도 되는 것인가? 이리 걷든 저리 걷든
백두대간은 거대한 하나의 산 줄기이니 상관없는 것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산행 일시 : 2009. 10.9~ 10(금요무박)
산행 코스 : 벌재-폐백이재-황장재-감투봉-황장산-치갓재-새목재-대미산-부리기재-
꼭두바위봉-마골재-포암산-하늘재
산행 시간 : 약 13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새벽 2시 30분,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하늘재를 향해 벌재(625m)를 출발했다. 벌재라는 이름은
'붉은 재'에서 왔다고 한다. 벌재의 남쪽 마을이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인데 이 이름에서 고개 이름을
따 왔다는 주장이다. 적성리의 적자가 '붉을 적'(赤)이어서 고개 이름이 '붉은 재'가 된 것을
이 고장 말로 벌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인다. ▼
벌재 공원지킴터, 지금 시각이 새벽 2시 22분이니 지킴이가 아직 출근 전이다.▼
벌재에서 폐백이재로 향하는 마루금은 탐방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급경사 길이었다. 초반부터
진을 완전히 빼고마는 구간이었다. 그렇게 30 여분을 정신없이 오르다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였다.
폐백이재였다. 하늘을 올려보았다. 수 많은 은하의 별무리들이 금새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별을 보니 위로가 되었다. 지치고 부대낀 몸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우리 막내이도 같은 생각
이었을 것이다. ▼
폐백이재는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혼자서는 이 길을 지나지 않는다는 고개이다.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광경을 떠올려 폐백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폐백이재를 지나 치마바위에 이르렀다. 사진촬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힘이 들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치마바위라는 이름도, 폐백이재라는 이름도 모두 처녀와 관련되어 있는 이름이다.
아무래도 채 전해지지 못한 처녀의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묻혀 있는 듯했다. 확실치는 않으나
어느 산우님께서 치마바위쯤으로 보이는 사진을 촬영해 두셨기에 옮겨왔다. ▼
다시 우리는 무거운 발길을 움직여 황장재에 이르렀다. ▼
황장재에서 황장산으로 오르는 길 역시 심한 급경사였다. 간간이 위험지대도 있었다. 무척 힘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난생 처음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가며 산을 오르는 우리 막내
아이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꼬? 쇠줄이 놓여있는 바위 틈 사이를 통과하는 막내이의 모습이 대견
스럽다.▼
황장산(黃腸山, 1077m)에 올랐다. 황장산은 조선시대 질 좋은 소나무의 대명사인 황장목이 자라고
있었다. 흔히 춘양목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나이테가 누렇게 황금빛을 띤다하여 그 이름을 황장목이라고
하였다. 나무의 뒤틀림이나 갈라짐이 없어 궁궐의 목재나 왕실의 관이나 배를 만드는 데 쓰였다.▼
황장산에서 차갓재로 내려가는 길은 험로 그자체였다. 좌편에는 천길 낭떨어지였고 오른 쪽으로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바윗길을 타고 천천히 걸어야만 했었다. 자일을 타는 곳도 간간이 나타났다.
은근히 막내이가 걱정됐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잘 버텨주고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는 몰라도 간간이 바람이 불어주어 흥건히 젖은 온몸의 땀을
씻어주곤 했었지만 흐르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한방울, 한방울 무겁게 떨어지는 땀방울을 바라
보노라면 절로 눈시울이 적셔오는 건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
차갓재에 내려섰다. 그곳엔 백두대간 표석이 설치돼 있었다. 해발 756m라고 쓰여 있으며 백두대간
남한구간 중간지점이라고도 쓰여 있었다. 백두대간이 용트림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
여리 대간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라고 친절하게 쓰여 있었다.▼
표석 뒷면에는 남북으로 끊겨진 백두대간의 길이 어서 빨리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
통일이여! 통일이여!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 철조망이 걷히고 막혔던 혈관을 뚫고 끓는 피가
맑게 흐르는 날, 대간 길 마루금에 흩날리는 풋풋한 풀꽃 내음을 맘껏 호흡하며 물안개 피는
북녘 땅 삼재령에서 다시 한 번 힘찬 발걸음 내딛는 니 모습이 보고 싶다.
2005년 7월 16일 - 문경 산들모임
백두대간을 지키고 그 의미를 계승시키기 위해 장승도 설치돼 있었다. ▼
새목이재를 향했다. 그런데 새목이재 오르는 길에도 백두대간 중간지점이라는 표석이 있었다. 이번
에는 평택산악회에서 설치한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 것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백두대간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아니다.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을 거닐고 있을 뿐 실제로는 백두대간 종주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있었다. 마음으로 걸어온 길이었다. 몸으로 걷지 않고 마음으로 걸었기에 걸어올 수 있었던 길이
었다. 자연과 소통하면서 걸어온 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백두대간 마루금의 방향을 알려주는 길라잡이가 나타났다. 백두산과 지리산으로 향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
무더운 날씨가 아닌 듯해서 1리터의 물만을 준비해 왔었다. 그런데 준비한 식수가 고갈나기 직전이었다.
대미산 아래 자락에 눈물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70m를 내려가서 물을 받아 다시 오려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물을 받아와야만 했었다. 막내이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
눈물샘에서 목을 축이고 땀에 젖은 얼굴을 씻었다. 물은 시원찮게 나오고 있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심장을 타고 핏줄을 지나 발끝까지 전해지는 듯 싶었다. 그리고 1리터의 물을 담아왔다. ▼
눈물샘의 유래이다. 지금은 백두대간이 산객들이 벗이 되어 온 지 이미 오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옛적에는 산토끼. 산노루가 새벽 어둠을 걷고 즐겨 찾던 그야말로 " 깊은 산속 옹달샘"이었다. ▼
대미산, 즉 큰 눈썹 아래 있는 샘이어서 '눈물 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샘이다. 눈물샘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듯했다. 눈물샘이 있어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걷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렇게
수 많은 생명들이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
대미산(大美山, 1115m)에 올랐다. '크게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는지 산은 부드럽고 너그러웠다.
대미산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큰 산으로 문경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다. 그런데 우리집 막내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눈물샘에서 물을 받아 온 사이에 다른 일행들과 함께 대미산을 지나버린 것이다.
기념사진이나 제대로 찍었는지 걱정이다. ▼
바위가 마치 꼭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꼭두바위봉(838m)을 지나 1062.4봉에서 내려서니
부리기재였다. 부리기재는 몇 년전에도 다녀간 곳이다. 그때는 하늘재에서 출발하여 포함산에 오른 후
이곳 부리기재에서 곧바로 하산했었다. ▼
붉은 단풍의 불길이 아직 이곳까지 내려 올 시간이 아니었지만 성급한 나무에서는 벌써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능선의 날개는 산봉우리들을 신비로움속에 솟아오르게 하는 특성이 있다. 걷히는 듯 하다가 끼이면서
봉우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가까워졌다가는 캔버스에서 하얀 물감으로 지운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손에 잡힐듯 주흘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
출입금지구역, 결코 좋은 인상이 들지 않는다. 이제 이것에 익숙해져 버린지 오래이다. ▼
이제 우리가 마지막 올라야 할 포함산은 2.8km가 남아있다. ▼
비록 백두대간 길은 아니지만 생각같아서는 내친 김에 만수봉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우리 막내이를 생각하면 택도 없다. ▼
해발 962m의 포암산에 올랐다. 포암산은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의 모습이 마치 베(布)로 덮어놓은 듯하다는데서 유래한다. ▼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선 모습이 거대한 피륙을 펼쳐 놓은 것같이 보인다고 하여 '베바우산'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희고 우뚝 솟은 바위가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저 아이를 누가 유약하다고 하였는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가면서 쉼 없이 걸어 온 산길,
이제 지칠 법도 한데 표정을 보니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다. ▼
포함산 단체사진이다. ▼
등산화 끈을 다시 고쳐 맸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오르막에서는 잘 가는 편인데 내리막에서는
발걸음이 더디게 보였다. 자세히 등산화를 살펴보니 등산화 끈이 너무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
이제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하늘재까지는 불과 1.3km를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하산 길 역시
급경사 구간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
조심 조심 자일에 의지한 채 하산하고 있는 우리 막내이의 모습이다. ▼
하산 길에 나타 난 소위 책바위의 모습이다. 마치 책을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이다. ▼
하산 길에 만난 금강 소나무의 멋진 모습이다. ▼
하늘샘에 도착했다. 목을 축였다. 몸의 열기가 식혀지는 듯 싶었다. ▼
'하늘 샘이라니...'
어쩜 이리 간절한 이름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백두대간 하늘샘이었다. ▼
하늘재로 내려왔다. 하늘재의 다른 이름인 계립령유허비에는 이 고개의 간단한 내력과 비를 세운
이유가 기술되어 있었다.
"...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맞아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사, 대원령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 4월에 죽령과 조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로써 죽령보다 2년 먼저 열렸다. ...(중략)...
조선조 태종 1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계립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고개를 넘은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다.
- 2001.1 문경시장-"
하늘재에서 올려다 본 포함산의 전경이다. ▼
이렇게 해서 우리 막내이와 함께 한 길고도 지루한 하루의 산행이 마감되지만 어찌 보면 오늘 산행도
긴 능선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것일 게이고 우리는 무대를 한번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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