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내 마음과 영혼의 모든 감각이 그대들을 갈망할 때 그대들이 나와 함께 해 주지 않으면
나는 곧 기가 죽어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네..우린 함께 해야만 하네...꿈과 희망, 그리고 계
획되고 보여지고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서로에게 너무도 절실하다네...
- H.엘포트의 "그대 그리고 나" 중에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런 진한 우정을 갈망하는 절실함이 내 뇌리를 꽉 채우고 있었기에
간밤엔 줄곧 잠을 이룰 수 없었으리라...오늘 대간길은 백두대간 마루금 중에서 개인 사정에
의하여 빠진 구간을 땜질하는 구간이다. 언제쯤 이 구간을 통과할 것인가? 또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상당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나의 애로사항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의외로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고 말았다. 기꺼이 우정산행을 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일에
바쁜 시간을 할애해서 동참해 주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래서 나도 금쪽
같은 연가를 내어 결행하게 된 것이다.
그랬었다. 우리들이 행복이라고 또는 불행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그 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터득한 어떠한 기준에 또는 편의에 의해서 합의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같은 목적을 지닌정신적 가치의 공유, 내지는 남은 삶의 공존이라는 어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
"싸각싸각"........!!
낙엽을 밟는 감미로운 발의 감촉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모처럼 도심 속에서 한적한 가을의 정취를
맘껏 느끼게 될테지만 평일인 오늘도 우린 도심을 벗어나 장쾌한 대간의 능선을 거닐면서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것이다.
산행 일시 : 2009. 10. 21(수)
산행 코스 : 이화령~황학산~백화산~이만봉~시루봉~희양산~은티마을
산행 시간 : 약 8시간
누구 누구 : 안양산죽회 대간팀 4인(무랑태수, 바람소리, 상록수, 나)
오늘 산행 역시 차를 이화령 휴게소에 주차시켰기에 편의상 이화령을 들머리로 하는 남진형태를
취하게 됐다. 이우릿재라고도 부르는 이화령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통행이 적은 자그마한 고갯길이었으나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열리면서 중부와 영남을
잇는 큰 길이 되었다고 한다. ▼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부와 영남을 잇는 길도 변화되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하늘재가 고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조령이 감당하던 것을 근대에 들어서는 이화령으로 이름이 바뀐
이우릿재가 감당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산과 산이 만나고 고을과 고을이 만나고 길과 길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 고개이건만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화령의 고갯마루는
고요하기만 했다. 사진은 이화령에 있는 충청북도의 홍보석이다. ▼
산행들머리이다. 처음부터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
산길가에 멋진 소나무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죽은 나목이었다. ▼
조봉(鳥峰, 673m)에 올랐다. 마치 조각된 듯 보이는 각종 기암괴석의 바위 만물상들이 마치 새의
입부리처럼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하여 조봉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다. ▼
황학산을 향해 한참을 오르다 보니 왼쪽에 물이 제법 많이 고인 큰 웅덩이가 있었다. 백두대간상에
있는 못 중에서 유일하게 물이 고여있는 못이라고 한다. 지난 겨울에도 이곳을 통과한바 있지만
당시에는 눈이 쌓여 있어서 그랬는지 못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다. ▼
해발 912m의 황학산에 올랐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있는 황학산은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바로 곁에 있는 큰 산 백화산(白華山, 1063.5m)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다. ▼
정상석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귀가 이채롭다. "산꾼들 구슬땀 목도로 세우다." 이 먼곳까지 저 무거운
돌을 목도로 매고 와서 설치한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이 자리를 빌어 "문경산들 모임" 측에
감사 드린다. ▼
오손도손 4인의 산꾼들이 백두대간 이야기에 빠져 길을 걷다보니 어느듯 해발 1063m의 백화산이었다.
남으로 뻗어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이화령에서 잠시 몸을 낮춘 후 속리산을 향해 치달리기 전에
솟구친 산이다. 백화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행 시작 2시간 여만에 처음으로 갖는 휴식
이었다.▼
백화산을 출발하여 20여분쯤 걸어왔을까? 그런데 길라잡이에는 백화산이 50분 거리라고 한다.
우리 일행의 걸음이 빠른 건지 아니면 길라잡이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는 이만봉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
평전치(平田峙)에 이르렀다. 평전치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몸을 숨겼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백화산 기슭에 천주교의 마원성지가 있다. 마원 성지에는 병인년
박해를
피해 그 당시 선교사인 깔레 강신부님과 평신도 박상근 마티아가 백화산 산중에서 겪어야했던 고난의 길을 한 사제와 평신도가 번민과 갈등속에서 다졌던 장한 믿음과 우정을 표현하는 동상이
있다.
한 실에서 문경읍내 자기 집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강신부님을 모신 박마티아, 졸지에 포졸들에게 들켜
백화산으로 한밤중에 달아나면서 넘어져 상처투성이로 강신부님을 모시고 피신을 했건만 죽을 지경이
된 마리아, 신부님은 본 마음과는 달리 마티아를 위해서 준엄한 명령을 내렸었다.
신부님, 죽어도 함께 죽겠다던 마티아의 통곡을 안된다고 외쳐대는 이 부르짖음을 어이 보고만 있을
쏜가! 신부님도 울고 마티아도 울었다. 이를 지켜보던 산새들도 초목들도 모두가 울었으리라, 서로를
사랑하기에 헤어져야만 하는 이 쓰라린 아픔을 그 누가 알리요, 가져 온 것이라고는 마른 과일
(곶감) 조금 뿐, 그것을 반으로 나눠갖고 천국에서 만나자던 이별의 한을 그 어느 누가 풀어주랴!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깨달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이 한을 풀어주시리라!
"어서 오게 친구여, 어서 들라 천국으로! 장하다. 그 믿음! 장하다. 그 우정! 길이 길이
천국에서 빛나리라."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린 이야기가 평전치에서 느껴졌다. ▼
"고사리밭등"이라고도 부르는 사다리재에 이르렀다. ▼
사다리재에서 서로 서로 지친 몸 위로 받으며 잠시 배낭을 맨채 서 있다가 곰틀봉으로 향했다. 그리고
곰틀봉에서 식사를 하였다. ▼
지나 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저렇게 많은 능선을, 저렇게 높은 산을 걸어왔단 말인가? 참으로 아득한
산길이었다. ▼
이만봉을 뒤에 둔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 ▼
곰틀봉을 지나니 바로 이만봉(二萬峰, 989m)이었다. 임진왜란 때 2만여 가구가 이 산골짜기로 피난을
왔기에 이만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봉우리이다. ▼
다시 발길은 시루봉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붉은 단풍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황홀하였다. 이 황홀함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조화로웠다. 이 조화로움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저 대자연의 위대한 향연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
시루봉에 가까이 다가가니 지척에 있는 희양산이 선명했다. ▼
떡시루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다 해서 이름 붙여진 시루봉(876.2m)에 올랐다. 시루봉은 백두대간 길에서
빗겨 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시루봉 정상은 조망이 일품이었다. 산행 들머리였던 이화령도 보이고 조령산과 신선암봉, 그리고 부봉
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저 먼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았다. ▼
앞으로 진행해야 할 희양산 능선이다. ▼
시루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희양산이 50분 거리라고 표시돼 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됐지만 제아무리
준족이라고 해도 50분에 희양산 정상에 오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마 희양산 정상을 봉암사측에서
통제하므로 산 입구까지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지난번 대간산행때 희양산을 다녀왔었지만 오늘 우정산행에 참여한 산우들은
통제가 심해서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은티마을로 바로 하산하지 않고
희양산으로 향해야 했다. ▼
배너미 평전을 지나 희양산성을 통과할 무렵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바람에 휘날렸다.
시원한바람이 지친 몸 달래주었다. 한껏 위로가 되었다. 힘을 받아 통제표시도 무시하고 희양산
정상까지 줄달음질쳤다. 암릉으로 된 희양산 정상은 전망이 빼어났다. 누가 써놓았는지 지난번에는
희미했던 정상에 있는 돌맹이의 희양산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고 뚜렷했다. ▼
희양산은 봉황이 나래를 펴고 나는 것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웅장하고 아름답게 펼쳐있는 봉암사를
감싸고 있으며 일찍이 지증대사가 "하늘이 내린 땅"이라고 했던 용암계곡을 품고 있는 산이다. ▼
지난 번 대간산행때 힘들게 오르고 힘들게 내려왔던 구왕봉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
희양산 입산통제판이다. 첫째는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봉암사 소유의 임야로서 봉암사측의 요청으로
입산이 통제된다는 내용이고, 둘째는 시루봉에서 지름티재까지의 백두대간 마루금 산행시 스님들의 참선
수행을 위하여 정숙보행해 달라는 내용이다. 통제의 주체가 봉암사측인지, 행정당국인지 참으로 알쏭
달쏭하다. ▼
낡은 밧줄을 잡고 하산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구간의 지름티재 대신, 지난번에도 내려왔던 희양산성
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무너진 산성을 다시 보았다. 이 지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 지역이어서
삼국시대부터 잦은 충돌과 전투가 있어왔기 때문에 유난히 산성이 많다. 이 성의 축성에 대해서는 928년
견훤이 군사를 보내 축성했다고도 하고 신라의 경순왕이 축성했다고도 한다. 또한 신라가 망한뒤 제 조국을
사랑하던 이들이 이 산성을 근거지로 항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마음 스산했다. ▼
산성을 떠나 은티마을로 내려왔다. 지난 번에도 내려왔던 길이었건만 길은 멀기만 했고 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울창한 숲은 형형색색의 단풍들로 치장하여 아름다웠고 깊은 계곡은 맑은 물 품어 흘려보내고 있었으며 거대한
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이 꼭 떡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시루떡바위도 내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었다. ▼
마을에 거의 다 내려오고 있는데 느닷없이 희양산 정상석이 나타났다. 아마 정상이 통제되는 바람에
정상에 오르지 못한 산꾼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었다. ▼
은티마을로 내려오는 길가의 사과나무에서는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
드디어 은티주막에 도착했다. 사람 좋은 주막의 아주머니께서 손수 만드셨다는 두부와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몇사발을 마셨다. 이곳 주막 역시 백두대간의 산꾼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유명한 주막이다. ▼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었다. 그 형세가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
(女根谷)이어서 이 기를 죽이기 위해 마을 초입 가겟집 노목 아래 남근석(男根石)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마을의 풍성함과 무사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바람이었고,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매년 섣달 20일 동구제(洞口祭)를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면 전혀 남근석 같아 보이지
않는다. ▼
연풍택시를 불러서 차가 있는 이화령으로 향했다. 어느 분의 블로그를 보니 택시요금이 들쑥 날쑥이다.
그러나, 친절한 기사 아저씨께서는 굳이 12,000 원 정도의 메다 요금만을 고집하셨다. 너무 고마워서
여기에 홍보 좀 해드려야 겠다. 연풍개인택시(김 영 뢰 : 011-49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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