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역시 무박산행이다. 잔인한 배반으로 다가 온 가을 비 몇 줄기 때문에 지난 주
조침령~한계령 구간의 백두대간 산행은 좌절됐지만 지난 주까지 포함하여 연속
3주째 무박산행이었다.
잠을 못 이뤄 피곤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너무 무의미한 산행 같았다. 그랬었다. 그것은
앞 사람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걷는 산행, 아무 것도 볼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런 산행이었다.
물론 일출 후에는 어느 정도의 산맛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그마저 졸린 토끼 눈으로는 온전히 산맛을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오늘은 우리 막내이를 동반한 산행이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단순히 백두대간을 걸어 봤다는 자기 자랑에 빠져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나 할 만한 짓 같았다. 참으로 부질없는 일 같았다. 어찌 대간 길을 걸으면서
대자연의 울림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다시 또 반복해서 그 짓을 해야 하는 처지가 더욱 나를
부끄럽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산행이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그저 아무때나 생각이 난다고
가지는, 가고 싶다고 가지는 그런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험란했고 그 길은 아득히
먼 길이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일도, 그 길에서 빠져 나오는 일도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길의 구간 구간은 생태계와 산림보호라는 미명아래 출입통제가 심했으며 그 출입통제로
인하여 진정으로 이땅과 이 강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범법자로 몰리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산행 일시 : 2009. 11. 6~7(금요무박)
산행 코스 : 벌재~문복대~옥녀봉~저수령~촛대봉~투구봉~시루봉~흑목산~솔봉~묘적봉~
도솔봉~삼형제봉~죽령
산행 시간 : 약 13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새벽 2시에 벌재에 도착했다.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쏟아지는 별들을 미처 마음에 담지도 못했다.
은하의 별무리들이 고요히 잠든 새벽녘에 식사를 하였다. 매일 매일 편안하게 쾌면을 취하다가
명색이 대간 길을 따라 나섬에 따라 잠을 못 이룬 막내이의 표정이 밥을 먹을 뜻이 전혀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지금 식사를 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산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억지로라도 식사를 하게 하였다.▼
출발에 앞서 단체사진은 기본이다. 모두들 잠은 못이루었지만 일단은 용기백배의 표정들이다. ▼
이미 눈에 익숙해져 버린 출입금지 구역 표지판이다. 벌재~하늘재 구간의 출입통제 표시이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다음, 산길에 접어들었다. 우린 문복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
벌재(625m)에서 저수령까지는 암릉의 긴장은 없었지만 문복대까지의 1시간 30분 여의 거리는
시종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산길은 한발,
한발 오를 수 밖에 없다.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의 여정과 다른 점이다.
우리네 인생여정은 때로는 상식과 순리를 무시하고 몇 걸음씩 건너 뛰거나 심지어는 날아 오르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글쟁이가 역설적으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하였지만, 날개도 못
갖춘 사람이 날아오르려다 여지없이 추락하는 꼴을 보노라면 그 무모한 욕심이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힘들게 힘들게 막내이와 함께 문복대(門福臺, 1074m)에 올랐다. 문복대는 경북 예천군과 문경시,
충북 단양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문경 땅으로 들어
오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福)을 불러오는 문(門)과 같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길만큼 소박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저 때는 이미 온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는 상태이다.▼
문복대를 조금 지나니 옥녀봉이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법도 했는데 나무줄기에 붙여 놓은 표지를
보고 발길이 멈춰졌다. "둘산악회와 아미산", 백두대간 마루금 곳곳에서 많이 익숙해져버린 표지였
었다. 거기다가 변함 없이 "힘 내세요."라는 용기를 주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고, 고마운 산악회였다.▼
문복대를 지나서 백두대간 분수령은 한결 널럴하고 편안하게 이어졌다. 가파른 길을 내려섰다.
저수령(底首嶺,850m)이었다. 경상북도 예천군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 이름이 저수령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
첫번째 이야기는 저수령은 "알프스의 목장을 연상케 하는 펑퍼짐한 언덕이 널따랗다."하여 순 우리
말로 "낮은 머리고개"라 하며, 다른 또 하나는 도로가 나기 전에는 길이 험하고 숲이 우거져 지나는
사람들이 절로 머리를 숙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숲이
우거지고 길이 험하여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는 의미의 저수령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 보였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부끄러울 때가 많다. 때로는 오만과 독선으로 오직 나 자신만을 지탱하려 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길만 접어들면 그 모든 악의 축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한결 청량해지고 겸허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산길에서만이 아니고 늘 언제나 어디에서나 겸허해질 수는 없을까?
그리고 보다 부지런할 수는 없을까? 문득 칠흑같이 어둠이 내리는 저수령에서 저수령에 관한 얘기
들을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 산행기를 정리한답시고 다른 분들의 자료를 인용만 해왔지 내 스스로
제대로 된 자료의 발굴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저수령의 유래이다.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 외에도 이곳 저수령에서 은풍곡까지
피난 길로 많이 이용돼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왜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호로 1994년에 개설 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다. ▼
무슨 이유일까? 대개의 경우 해맞이는 높은 산봉우리를 찾아 행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게 "낮은
머리고개"라는 저수령에서 행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수령의
또 다른 이름인 이 길을 지날 때 저절로 머리 숙여야 한다는 의미, 즉 자연 앞에서는 겸손해지라는
의미일 것도같았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작은 마음이 무슨 재주로 산을 움직일 것이며 대자연을
어찌 뜻대로 할 수있겠는가? 늘 무욕의 교훈을 일깨워 준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한낱 미물에 불과할 뿐이다.▼
저수령부터는 온전하게 소백산 (小白山, 1439.5m)줄기이다. 막내이에게 소백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어디서 들었던지 관심이 많은 듯 했다. 다시 우리는 저수령에서 고개를 한번 숙인
다음. 산길로 들어섰다. 졸려서 그럴까? 문복대 올라오는 길에 너무 오버페이스를 한것은 아닐까?
막내이의 발길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큰 일이다. 앞으로의 가야 할 산길에 비하면 지금까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인데...마음 추스려가며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한다는 촛대봉(1081)에 올랐다. ▼
촛대봉을 지나 발자국을 몇 걸음 옳기니 투구봉(1080m)이었다. 촛대봉과 달리 투구봉은 그 흔한
표지석 조차 없었다. 그저 초라한 널판지에 "소백산 투구봉"이라고 투박하게 써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기념사진은 촬영했었다. 훗날 기억을 재생시킬때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다.▼
해발 1110m의 시루봉이다. 역시 둘산악회의 작품이다. 산 봉우리가 시루 모양의 형상이어서
시루봉이었는지 어둠이 짙게 내리는 이 시간에는 확인할 길이 없다. ▼
해발 1084봉이다. ▼
제법 높.낮이의 편차가 심한 유두봉(1059m)을 지나 싸리재에 이르렀다. 좁은 길 곁으로 신갈나무
무성했고 수북히 쌓인 낙엽군이 만추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하고 있었다. 벌써 4시간 가까이 왔었나
보다. 실로 오랜만에 배낭을 벗어 놓고 목을 추겼다. 간식도 먹었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행 중 여성 한 분이 심한 감기몸살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단양유황온천 방향으로 탈출로가 있었다.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죽령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분은 이내 하산하였다. 우리 막내이가 부러운 눈(?)으로
처다본다.▼
흙목산(1033.5m)에 올랐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불과 몇 평 정도의 좁은 공간인 정상에는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금새 떨어질 것 같은 이정표가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
해발 1021m의 솔봉에 올랐다. 이곳이 솔봉이 아니고 도솔봉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솔봉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했다. 그런데 묘적봉이 불과 1.7km밖에 남지않았다는 이정표에 희망을 걸었다.▼
해발 1015m의 묘적령이다. '묘적'은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같은 범인(凡人)이 그 깊은 경지에 이를리도 없고 하여, 그저 그러려니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
묘적봉(妙積峰, 1148m)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저 봉우리겠지" 하고 막상 가 보면
또 다른 봉우리가 우뚝 서 있었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만에 묘적봉에 이르렀다.▼
도솔봉은 이정표상으로는 1.9km라고 하지만 산행도우미의 말에 의하면 지친 체력을 감안해서 족히
1시간은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내이의 눈빛을 보니 무척 실망스럽다는 듯하다. ▼
도솔봉(兜率峰, 1314m)으로 가는 길은 긴 나무계단의 연속이었다. 계단을 오르며 봉우리를 올려다
보았다. 계단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나면 정상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헬기장이었고, 헬기장을 지나야 도솔봉 정상이었다. ▼
어렵사리 도솔봉에 올랐으나 도솔봉은 우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날파리 같은 무리들이 우리가 머무는 것을 거부했었다. 황급히 기념사진 몇 컷만 촬영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
발걸음을 몇 발자국 옮겨 제법 높은 봉우리를 찾아 오르니 이곳도 역시 도솔봉이었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으려니 생각했었지만 그것 또한 오산이었다. 이곳 역시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들
처럼 날파리의 무리들이 극성스럽게 달려들고 있었다. ▼
길은 점점 험해지고 발길은 느려지기만 했다. 막내이와 나는 죽령을 향한 마지막 봉우리인
삼형제봉을 힘겹게 힘겹게 넘고 있었다. 벌써 10 시간을 넘게 걸어 온 산길이었다. ▼
너무 지친 나머지 무표정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기념촬영에 응해주는 막내이가 대견스럽기만 했다.▼
죽령 4.3km, 산행 평균시속 3km정도로만 계산해도 1시간 30분이면 죽령에 도달할 수 있으련만
워낙 엉터리 이정표가 많아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
지나 온 산길을 되돌아 본다. 참으로 아득한 길을 걸어왔다. ▼
도솔봉에만 이르면 오늘 산행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는데 도솔봉을 지나 삼형제봉에
왔는데도 산봉우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있었다. 나도 막내이도 마찬가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삼형제봉은 당연히 봉우리가 셋이어야 맞았다. 그러니 이제 겨우 한 봉우리를 오르고
다 오른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힘들고 지쳐있었으리라...▼
아무리 불신에 불신을 거듭한다고 해도 이정표가 없으면 남은 산길이 궁금했으며 답답했다. 이제
죽령은 적어도 이정표상으로는 1.3km를 남겨두고 있었다. ▼
"여기 산을 좋아하던 우리 친구 종철이가 백두대간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천시 산마을-
몇 살 때 일인지는 몰라도 영원히 백두대간의 품으로 간 그 산꾼 생각에 참으로 가슴이 싸해졌다.▼
오늘 산길은 길도 아득했지만 날씨마저 포근했던터라 많은 물을 필요료 했다. 하지만, 그간 몇차례의
산행에서 물을 되가져 왔던 적이 많아 막내이 물을 포함해서 4리터의 물밖에 지참하지 않았다.
따라서 산길에서는 물(생명수)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금기사항을 깨고 물을 얻어 마셨었다.
그런데 오늘 산길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약수터가 있었다. ▼
몹시 목이 탔던 막내이가 물을 받고 있었으나 가뭄 탓인지 물이 병아리 눈물처럼 감질나게 나오고
있었다.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량이었다. ▼
도솔봉에서 삼형제봉을 거쳐 속세로 나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오르고 내리기를 수없이 거듭한
후에야 아흔아홉 구비의 험하고 힘든 고개로 유명한 죽령(竹嶺, 689m)에 내려 설 수 있었다.
실로 힘든 산행이었다. 벌재~하늘재 산행보다 결코 쉽지 않은 오늘 대간산행을 무사히 마친
우리 막내이가 무척 대견해 보였다. ▼
영주와 단양을 잇는 죽령은 158년(아달라왕 5년)에 신라의 죽죽(竹竹)이 처음으로 고갯길을 열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 백두대간 분수령에서 하늘재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고갯길이다. ▼
삼국시대에 죽령은 하늘재와 더불어 고구려, 신라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며 패권을 다투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죽령은 문경~충주의 새재, 영동~김천의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3대 관문에 속했다. ▼
현재 고갯길로는 5번 구도가 지난다. 1942년국내에서 두번째로 긴 4.5km의 죽령굴이 뚫리며 중앙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였고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백두대간이 4.3km 직선의 죽령터널로뻥 뚫렸다. ▼
죽령의 유래이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竹)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서 신라 아달왕 5년(158년) 사람이 통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계곡과 연결된다. 소백산을 넘는 죽령은 문경새재.추풍령과 함께 영남의 삼관문의
하나로 그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혀 왔다. ▼
죽령의 곳곳에는 해괴망측한 장승들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볼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
'백두대간 사진첩 > 추풍령~늦은목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치령~마구령~갈곶산~늦은목이~생달 (0) | 2010.01.11 |
---|---|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봉-고치령 (0) | 2009.12.13 |
벌재~황장산~차갓재~대미산~포함산~하늘재 (0) | 2009.10.12 |
조령3관문~마역봉~부봉~탄항산~하늘재 (0) | 2009.09.21 |
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조령3관문 (0) | 2009.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