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 사진첩/천왕봉~추풍령

주촌리-수정봉-여원재-고남산-통안재-권포리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 하듯 백두대간도 사람이 그리웠을까? 백두대간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그리웠던 것일까?  큰고리봉을 통과하면서 백두대간은 몸을 급격히 낮추어 문득 고기삼거리 길가로

내려와 있었다. 우린 길가까지 내려 온 백두대간을 만나기 위하여 주촌리에 다시 왔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어가기 위하여 주촌리에 다시 온 것이다.

  

산행 일시 : 2009. 9. 19(토)

산행 코스 : 주촌리-수정봉-여원재-고남산-통안재-권포리

산행 시간 : 약 5시간

안내 산악회 : 경기우리 산악회

 

 

오늘 산행 들머리인 주촌리이다. ▼

 

 

덕치마을의 버스 정류장인듯 싶다. 버스가 하루에 몇 차례씩 다니는지 과연 다니기나 하는지 알수가 없다.▼

 

 

그 유명한 노치마을 입구이다. 달리 유명한 게 아니라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전국 유일의 마을이라서 그렇다.▼

 

 

노치마을을 향하여 걷는다. 지금 분명 60번 지방도로 위를 걷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는 것이다. 가을 들녘엔 어김 없이 형형색색의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대간 길을 이어가는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주촌리를 출발하여 10여 분 쯤 걸어왔을까? 드디어 노치마을에 들어선다. "갈대 노(蘆), 언덕 치(峙)'

즉 "갈대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운치 있는 이름이다.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다.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위치해

있어 한 마을에서도  두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하는 곳이다. 사진은 백두대간 조형도이다. ▼

 

 

한편, 노치마을은  한국전쟁 때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수호신격인 큰 당산나무가 백두대간 조형도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는다는 노치 샘이 있다. 한 모금의 물을 정성스레

마셨다. 뜨거웠던 몸이 서늘해졌다.가슴이 차가워졌다. 참으로 고마운 물이다. 백두대간에 오른 수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나처럼 고마운 노치샘의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

 

 

수정봉에 접어들었다. 크고 탐스러운 소나무들이 웅장한 자태로 버티고 있었다. 역시 듣던대로 수정봉의

소나무 숲은 깊고도 울창했다. ▼

 

 

드디어 해발 804m의 수정봉 정상에 올랐다. 수정봉은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계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기도 한다. ▼

 

 

임망치를 사이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개의

산봉우리를 이룬다. ▼

 

 

해발 545m의 입망치이다. ▼

 

 

우리는 여원재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

 

 

수정봉과 입망치를 지났다. 이제  여원재를 넘어 고남산으로 향해야 한다. 이 일대를 소위 운봉이라

부른다. 운봉을 지나면서 운봉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운봉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

구름 덮인  멧부리"라는 뜻이다. 운봉읍,아영면 인월면 산내면을 포함하여 보통 "운봉 4개면"이라고

부르며 동쪽은 팔량재.북쪽은 복성이재,서쪽은 여원재,남쪽은 뱀사골의 화개재가 있다.

 

또한 운봉 4개면은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남원과 수계가 갈린다. 남원은 요천으로 해서

섬진강으로 운봉 4개 면은 임천강으로 해서 남강으로 흘러든 뒤 낙동강에 합류된다. 결국 여원재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이 서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되고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것이다.

말에 "물은 사람을 모으고 산을 가른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양쪽 지역은 생활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운봉 4개 면의 사람들을 외지에서 만나면 말씨만 듣고는 "고향이 경상도 어디냐?"고

다짜고짜 묻는다고 한다.

 

다시 백두대간 마루금은 도로로 이어졌다. 이제 여원재는 600m를 남겨두고 있다. ▼

 

 

 

도로를 지나 다시 산길에 막 접어드는데 갑자기 주막 옆에 우리를 환영하는 프레카드가 설치돼 있었다.

다소 의아한 마음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산악회 회원 중 한 분이 설치해 놓으셨다고 한다. ▼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해발 470m의 여원재에 내려섰다. 여원재는 백두대간 가장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다. 영.호남의 길목이면서 비옥한 고원지대가 있으니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유사 이래 전투가 있을 때마다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한반도를 오랫동안

약탈해 온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그랬었다.

 

고려 말, 고갯마루 주막에서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의 전설은 그래서 슬프다. 영남과 호남을 오가는

길손들에게 웃음으로 밥과 술을 내놓는 신세라 해도 어찌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랴 하며 왜놈 손을 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당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여원재를 지나던 이 성계의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은 이성계에게 왜적을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알려주었다 한다.

 

이 백발의 여인이 바로 여원재 주모의 원신(怨神)이라고 말한다. 이성계가 고려 말 신군부의

수장으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1380년 황산대첩의 승리는 아마 이 여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이성계가 활로 쏘아 떨어뜨린 왜장 아지발도의 피가 묻었다는 광천 물가의 피바위는 여전히 붉은

빛이고 운봉고원서 팔량치 가는 길목에 솟은 황산은 예나 지금이나 뽀족한 생김새로 오가는 이의 눈길을

끈다.

 

어쨌든 이성계는 전투가 끝난 후 고갯마루 오르른 길목에 여원이란 사당을 짓고 여인의 넋을 달랫고,

주민들은 이후 이 고개를 여원재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 여원재 도로 아래의 암벽엔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고 한다. 전설의 여인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인적드문 고갯마루 여원재를

지나면서 문득 그 여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필시 한 서린 옛 이야기를 전해줄 것만 같았다. ▼

 

 

운봉고원에서는 마을 입구마다 돌장승인 벅수가 많다고 한다. 당시에 벅수의 밀집분포는 그 지역의

경제력과 정비례했다고 하니 그 당시에 운봉지역의 경제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벅수의 일종인 "운성대장군"의 상이다. 운봉일대에서 가장 잘 생긴 벅수라고 한다. ▼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백두대간.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알려진 성이 있었는데 당시

쌀을 저장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성은 무너져 있었지만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치한 표석만이 남아있었다. 지나는 이들을 위한 배려일까. 역사에

대한 무지일까.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졌다. ▼

 

 

다시 대간길은 마을 한 복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나와 계신 할머니 두분이 묻지도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백두대간 지나는 길을 설명해 주셨다. 수 많은 대간꾼들이 귀찮았을 법도 한데 사람이 그리운

오지의 마을이라서 그런지 전혀 그런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

 

 

고남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나무 한그루가 옆으로 뻗었다가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기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산행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을까? 부대끼는 삶을 위로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막상 앉고보니

나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앉았을 법한 저 나무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섯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마침내 해발 846m의 고남산 정상에 올랐다. 지나 온 길이 눈앞에 가득했다.

"고남산은 전체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반야봉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 만복대가 있었고

다시 위에는 고리봉이 있었고, 고리봉에서 내려오면 고기리(古基里)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지난

수정봉이 보였다. 지나고 지나 온 길이 그저 아득하고 첩첩하였다.▼


   

 

 

 '저렇게 많은 산을 지나왔다니...'마음이 편안해졌다. 위로가 되었다. 구름조차도 맑기만 한 하늘이었다.

맨 뒤에 있는 능선이 바래봉 능선이다. ▼

 

 

고남산에서 내려다 본 운봉지역의 가을들녘의 모습이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가을들녘은 점점 황금들녘으로

채색되어 가고 있었다. ▼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정상석이 또 있었다. 엄격히 따지면 분명 이곳이 정상은 아닐진데 정상석만은

제법 운치있고 뽐나게 설치돼 있었다. ▼

 

 

정상석 뒷면의 백두대간 개념도이다.▼

 

 

통안재로 내려갔다. 통안재로 내려가는 길 뒤로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그 길엔 구절초가 만발하고 있었고

송이 송이 밤송이도 영글어가고 있었다. ▼

 

 

 

날머리인 권포리 마을어귀에는 억새꽃이 만발하였다. 눈부시게 찬란한 햇살을 받아 역광으로 반사되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억새꽃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억새꽃과 더불어 그리움에 젖은 내 마음도 그렇게

그렇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권포리의 버스정류장인듯 싶다. 권포리(權布)는 운봉읍에서 북으로 4km, 여원치에서 동으로 3.4km, 고남산을

배경으로 권포재와 넓은 들로 펼쳐진 평화롭고 깨끗한 마을이다. 고려말 우왕6년(1380년), 황산대첩 당시

이 성계 장군이 천재단을 태조봉(고남산을 지칭)에 세워 전승을 기원할 때 동행한 정도전이 제왕봉의 기운

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권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