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려우나,
성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10여석의 쌀을 파종할 수 있을 정도의
논이 있고 풍부한 수량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
정성스레 조성돼 있는 탑공원........▼
남한산성입구에는
유난히 돌탑이 많았다.
통일기원탑, 소원탑, 통일탑 등....
그 탑들을 차례대로 스캣치해 보았다.▼
남한산성 성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이중 남한산성 행군 복원사업에 따라
이전되 11기와 현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 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는 기회를
제공코자 비석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남문...
산성의 정문으로 정조 3년(1779)성곽을
개축하면서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임금은 남문으로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소나무,
일명 솔나무라고도 하며
바늘 잎은 2개씩 뭉쳐나고
비늘은 2년이 지나서 떨어진다.
번식은 종자번식이나 접붙이기로
한다. 꽃은 4~5월에 피며
건조에 잘 견디므로 모래땅에서
잘 자란다.
잎은 소화제로 송진은
고약의 원료로 쓰이며 껍질은 송기떡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가팔라 우마차가 다닐 수
없지만 송파, 거여, 마천, 광진 방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조 15년(1637)1월 30일 아침에
임금과 세자와 신료들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 청진에 투항했다.▼
이 옹성은 원성과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74미터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고 한다.
이 옹성은 암문(비밀문)을 통하여
성내를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갇힌 성안에서
김류가 지휘하는 정예병 삼백여 명이
북문을 열고 싸웠다고 한다.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운
유일한 전투이다.
당시 김류의 군사는 전멸했으며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고
전해진다.
북문을 가리켜 전승문이라고도 한다.▼
동장대와 북장대지 ▼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인조 15년(1637) 1월 18일
청병이 동문에 몰려와서
"투항 하던지 나와서 싸우든지
결판을 내자." 며 협박했다.
조정은 응답하지 않았다.
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이 동문 밖에서
처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명 좌익문이라고도 한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수는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 갈 수
밖에 없으리...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
투항했다. 길은 땅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간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김 훈의 "남한 산성"에서.....
그랬었다.
지금으로 부터 370년전, 치욕의 병자호란...
청나라 병사들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어간 임금, 구원군도 없이 고립무원
상태의 47일....
결구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3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풀려나게 되지만.....
오늘 그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던 날, 그 초입길에서 마침
새 생명을 만나게 된다.
축축한 날씨에 엄마 잃은 새 한마리가
마냥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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