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봄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남녘으로 부터 올라온다. 이른 봄 남도 특유의 부드러운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결 등이 남도의 정서를 잘 빚어내면서 힘차게 올라
오고 있는 것이다.
남녘의 포근한 날씨와는 상관없이 요 며칠, 서울에는 맵고도 시리게 추위가
시샘을 부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꽃샘추위, 그 이름만 들으면 꽃처럼 향기로울
것만 같은 추위..아리땁게 피어나는 꽃들을 그냥 보아줄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옷섶을 파고드는 그 추위 덕에 망울 터트릴 날만 기다렸던 봄꽃들은 미처
활짝 피어나기도 전에 맥 없이 무너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걸어 본 남도의 산길에선 꽃샘추위와는 무관하게 봄 기운이
활활 넘쳐나고 있었다.
봄은 분명 만덕산 자락에도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스멀스멀한 봄 기운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그 기지개를 타고 봄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봄의 전령이라 부르는 진달래도 피어났고, 노란 생강꽃도 피어나기
시작했고, 청초하기 이를데 없는 수선화도 예쁜 꽃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바람결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활짝 드러내 보인 혼의 빛깔
이었다. 북풍한설의 매서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화려하게 피우는 수선화를
산길에서 만나니 어느 새 내 속뜰에서도 연두빛 새싹이 내리고 있는 듯 했다.
흐르는 땀과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달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만덕산의 하루였었다.
산행 일시 : 2011. 3. 26(토)
산행 코스 : 용문사~삼거리~깃대봉~백련사~다산 초당
산행 시간 : 약 5시간
안내 산악회 : 경기 하나 산악회
함평천지 휴게소에서 우릴 태운 버스는 잠시 멈춰섰다. 집을 떠난 지
4시간 여 만이다. 함평천지는 신 재효의 남도창(南道唱)으로 유명하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 바라보니, 제주 어선 빌어 타고,
해남으로 건너올 제,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 있고,
고산(高山)의 아침 안개, 영암(靈岩)을 둘러 있다…”.
실로 먼 거리였다. 안양에서 강진의 만덕산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한 길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선 시간이 6시 10분 경이었고, 산행 들머리인 이곳 용문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낮 12시 35분이었으니 무려 6시간 여를 달려 온 셈이다.
어느 세월에 산행을 하고 어느 세월에 다시 귀경할 수 있을 것인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만 했다. 버스에 내리자, "정다산 유허지
통로(丁茶山遺墟地通路)" 라는 돌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생활의 근거지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늦은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잰걸음으로 석문교를 건너고 있었다.▼
석문산 용문교 입구였다. 당초 계획은 석문산도 오르게 돼있었지만 부득이
시간 관계상 오를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용문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붉디 붉은 동백이 그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용문사의 큰법당이다. 대웅전이라는 이름 대신 우리 말의 "큰 법당"이라는 표현이
이채롭다. 용문사에는 오래전부터 두구의 토불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두 구의 토굴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로써 고려시대 토불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연꽃 모양이 새겨진 화환과 상투머리에 귀밑머리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을 갗추고 있다고 한다. ▼
만덕산으로 향하는 용문사 뒷자락 바위 틈새에선 수선화가 노란 꽃술을
내밀고 있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천선(天仙), 땅에 있는 것을 지선(地仙),
물에 있는 것은 수선(水仙)이라 할 만큼 수선화의 아름다움은 그 청초하기가
이를 데 없다. ▼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었다. 봄의 전령이라는 진달래 꽃이 남녘의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결 앞에 활짝 제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단, 며칠밖에 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버려야 하는 진달래꽃, 하지만
꽃들은 당당했다.진달래꽃들은 그의 일생을 다하면 그뿐, 절대 철쭉이나
다른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다.
저 하찮은 꽃들도 저리 당당한데 우리네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직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몸의 무늬만을 바꾸는 것이다.
만덕산에는 생강꽃도 한참 피어나고 있었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잎이
나기전에 노란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씩 이를 혼돈하고 있다.
하지만, 나중에 줄기와 나무잎을 보게 되면 쉽게 구별된다. ▼
삼거리였다. 용문사를 떠나 한 참을 걸어 온것 같았지만
이제 겨우 350m를 걸어 왔을 뿐이었다. 그 만큼 마음이
급했으리라.▼
역시 남해바다는 모성의 바다답게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비릿한 갯내음과
부딪히고 고함지르는 서해바다가 삶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분명
남해는 밀어를 나누기 좋은 환상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기암괴석을 돌아 풍광이 좋은 곳에서 아름다운 산천을 배경으로
한컷 땡겨보았다.▼
앞으로 가야 할 만덕산을 바라보았다. ▼
해발 240m의 바람재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국의 산하에는
"바람재"라는 이름을 가진 재가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이한 바위였다. 그것은 흡사 큰 바위 위에 개구리가 걸터 앉아 있는
형상같았다.▼
정상인 깃대봉은 이제 540m를 남겨두고 있었다. ▼
해발 408.6m의 만덕산 정상인 깃대봉이었다.▼
깃대봉 정상석을 담아 인증 샷을 터트렸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필봉을 다녀 오게 되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모르는
일인데.....▼
백련사 방향으로 하산하면서 넘어온 능선을 힐끔 곁눈질해 보았다.
낮은 능선이었지만 아름다운 능선이었다. 산의 높이와 아름다움이
정비례하지만은 않듯이....▼
드디어 천년고찰 백련사에 다달았다. 시간이 없어 경내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주마간산격으로 스치듯이 지나쳐 버렸다.▼
백련사 모퉁이를 지나니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숲탐방로가 있었다.
동백림이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어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산길이었다. ▼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길라잡이였다.
앞으로의 내 인생여정에 있어서 올바른 길을 안내해주는
길라잡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
천일각이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
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부르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000 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연지석 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
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 난 후 제자들에
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
다산 초당(茶山艸堂)이다.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생활 중 강진읍 동문밖에서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총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가 여기서 완성되었으며, 그 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세 권의 책이 매우 유명하며, 선생의 애국애민사상이 스며있는 책
이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지금은 다시 세운 동암,
서암이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서있다.
정석(丁石),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姓)
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다산 초당의 곳곳은 사진처럼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산의 대쪽같이 올곧은 성품을 나타내 주듯이....
오솔길,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어있는 3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입구에서 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이다. 윤 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이 오솔
길 역시 다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을을 오가며 다녔던 길이다. ▼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 백년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 호승 시인은 이곳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
다산 유물전시관이다. 역시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비이다. 강진은 다산 정 약용 선생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 윤씨)에서 마련해 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
다산과 관련된 시설들을 안내해 주는 길라잡이이다.▼
다산 초당이 있는 귤동마을의 안내표지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