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동안 얼어붙었던 수척한 모습의 대지위에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결과
촉촉한 물기가 내려지고 있다. 때맞춰 안으로 굳게 닫은 나무와 꽃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 신비스럽기만 한 우주는 이렇듯 찬란한 생명의 조화를 이뤄낸다.
누가 산 속에 시심(詩心)이 있고,
시심(詩心)속에 산이 있다고 하였는가?
나는 오늘도 산길을 걸으며 그 속에서 시심(詩心)을 들여다 보고 마냥 그 즐거움과
행복에 빠져보려 한다.
산행 일시 : 2010. 4. 11(일)
산의 위치 : 전북 완주군, 충남 금산군, 논산시
산행 코스 : 배티재~낙조대~칠성봉~구름다리~마천대~군지골~수락리
산행 시간 : 약 5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대둔산은 원래 "큼직한 두메의 산" , 크나 큰 "바위덩이 산"이란 뜻으로 한듬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함은 큰대(大)자로 고치고 듬은 한자어로
고치기엔 마땅치 않고 소리도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가 없어 "듬"소리에 가장 근접한
진질 "(屯)"자로 한것이라고 하며 지금도 논산 사람들은 한듬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두 이름을 갖다보니 산 하나가 두개로 쪼개져 각각 두개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하나의 산을 두고 전북과 충남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대둔산은
한국 8경의 하나로 산림과 수석의 아름다움과 최고봉인 마천대를 중심으로 기암괴석들이
각기 위용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산행 들머리인 배티재이다. 배티재는 임진왜란 당시 골짜기에 배나무(산들 배나무)가
많은 재(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대둔산 등산로, 금산군에서 설치한 아치 문이 이채롭다. ▼
지금이 만추의 계절이던가, 낙엽쌓인 산길을 오른다. 시절도 없이 나무들의 발치에 누워있는
저 가랑잎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참으로 덧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
갈림길이었다. 길라잡이는장군 약수터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장군약수는 옛날에
용천수(龍泉水)라 불렀지만 먹으면 힘이 난다고 해서 장군수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장군수를
마시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는 신비스런 약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갈 길 바쁜 산나그네의 발길은 낙조대로 향하고
있었다. ▼
또 다시 갈림길이었다. 낙조대는 200m의 거리에 있었지만 낙조대를 들러 다시 이곳으로 와야
했다. 그렇다고 대둔산의 비경의 하나인 낙조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
해발 859m의 낙조대에 올랐다. 서해로 지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낙조대이다.▼
낙조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한다. 스멀스멀한 봄 기운이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낙조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쉼 없이 걷는 동안 흘렀던 땀과 더위를 식혀
주는 바람이 달다는 것을...
낙조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끝 없이 펼쳐지는 들녘너머로 뉘엿 뉘엿
서해바다로 잠겨드는 저녁놀의 황홀함을...
낙조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역시 알지 못한다. 해가 넘어간 뒤 땅거미 질때까지
그 여리고 순한 빛깔을 지닌 저녁놀의 잔영을...
낙천대에 들렀다가 다시 갈림길에 왔다. 우린 마천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마천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기암괴석에 앉았다.
조금 전에 마천대로 곧바로 오르는 길이 있었지만 우린 칠성봉 전망대를 가기 위해 가파른
길을 따라 이곳에 내려왔다. 전망대는 60m를 남겨두고 있었다.▼
칠성대 전망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용문굴이다. 당나라 정관 12년 선도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을때 용이 이 바위문을 열고 승천하였다고 하여 용문굴이라 부른다고 한다.▼
산행리더인 산사람님의 멋진 모습이다. ▼
칠성봉 전망대이다. ▼
아~! 칠성봉, 석봉 일곱개가 병풍처럼 아름답게 서 있는데 용문굴에서 용이 승천하기
직전에 일곱개의 별이 이곳에 떨어졌다해서 칠성봉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
칠성봉 전망대에서 칠성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 보았다. ▼
장군봉, 1952년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이 바위에서 전투지휘를 하고 대승을
거두었는데 바위 모습이 갑옷을 걸친 장군 모습을 닮았다 하여 장군봉이라 부른다.
칠성봉을 지나 와 우린 다시 케이블 카 타는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올랐다. ▼
케이블 카 타는 곳이다. ▼
케이블 카 타는 곳에서 다시 계단길을 오르면 나타나는 전망대이다. ▼
우리가 진행해야 할 금강 구름다리는 50m를 남겨두고 있다. ▼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높이 70m, 길이 50m의 금강구름다리는 오금을 펴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금강 구름다리 밑으로도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많은 산객들이 오르고 있었다.▼
금강 구름다리를 건너 우린 다시 삼선계단을 향하고 있다.▼
삼선 계단 바로 밑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101년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김개남 장군이
체포된 직후, 투항을 거부하던 동학 "접주"급 이상의 지도자 25명이 이곳 대둔산 정상으로
피신 요새를 설치하고 일본군과 3개월간에 걸쳐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장렬히 순국하신 역사의 현장이다. ▼
삼선바위, 고려말 한 재상이 딸 셋을 거느리고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며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재상의 딸들이 선인으로 돌변하여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 형태가 마치 삼선인이
능선 아래를 지켜보는 모습과 같아 삼선바위라 불린다고 한다. ▼
삼선 바위로 오르는 삼선계단은 아슬아슬했다. 밑을 내려다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
휴우~! 이제 살았다. 삼선 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기 위하여 숨을 고르고 있다. ▼
다시 갈림길이었다. 정상은 150m를 남겨두고 있었다. ▼
드디어 해발 878m의 마천대에 이르렀다. 마천대는 하늘을 만질 수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선조들이 이 산을 높은 곳으로 생각하고 붙여진 이름이다.
맑은 날 마천대에 서면, 가깝게는 진안 마이산, 멀리는 지리산 천왕봉,
그리고 변산반도의 서해바다까지 한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고 한다.▼
대둔산의 정상은 분명 마천대였다. 그런데 정상에는 마천대라는 이름은 찾아
볼 수 없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산하고는 거리가 먼 개척탑이란 이름의
글씨가 요란하게 새겨 있었다.
또한 개척탑 하반부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개척탑은 1970년 11월에 완주군민의 정성을 모아 군청 청원을
비롯하여 많은 군민이 자재를 직접 운반하여 해발 878m위에 10m 높이의
콘크리트 탑으로 건립하여 대둔산의 상징으로 등반객의 사랑을 받아오다
1989년 기존 콘크리트 탑위에 스테인레스 관으로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저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산 정상에
설치돼야 하는 것인지 대둔산은 자신의 머리 부분을 심하게 훼손 당하면서도
자신의 상징물이라고 흔쾌히 받아들여 준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거듭 거듭 강조하거니와 그들의 개척탑 건립에 따른 자화자찬과는 달리
산과 개척(개발)은 절대 공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자연에 훼손이 갈 우려가 있는 시설물의 설치는 절대 금지
하는 것이 맞다. 설령 그것이 자연환경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감행되어도
그렇다.
마천대를 떠났다. 우린 충남 논산군 수락계곡으로 진행해야 한다. ▼
수락 주차장으로 향하는 갈림길이었다. 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아직은 앓고 난 사람들의
수척한 얼굴처럼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저 나무들도 연두빛의 생생한 잎새를
틔울 것이다. 그런데 갈림길 이정표를 보니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수락주차장이었다.
기왕이면 짧은 거리를 선택했다. ▼
수락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히 환상적인 길이었다. 전에도 대둔산을 두어 차례
다녀갔지만 이렇게 멋들어 진 산길을 걸었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갈림길이었다. 마치 꿈길을 거닐 듯 황홀경에 빠져 무아지경 속에서 산길을 걸어왔다.
아직 황홀한 산길은 끝나지 않았다. 건강하게 자란 소나무와 조화롭게 설치한 목재테크의
계단이 더욱 돋보이는 산길이었다. ▼
멋진 산길을 따라 한 참을 내려오니 수락폭포가 있었다.▼
봄은 대둔산 자락에도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새 내 속뜰에서도 연두빛 새싹이 내리는지
근질거렸다. 사진은 한참 피어나고 있는 생강꽃이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잎이
나기전에 노란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씩 이를 혼돈하고 있다. 하지만,
나중에 줄기와 나무잎을 보게 되면 쉽게 구별된다. ▼
다시 조금 내려가니 선녀폭포가 있었다. 역시 대둔산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이었다.
대둔산 승전기념탑 가는 길이었다. 이 기념탑은 1950년 10. 3~1955년 1. 2 까지 5년간에
걸쳐 대둔산 일대에서 활동중인 빨치산 및 영.호남에서 패주 북상하던 북괴군 등 3,412명을
섬멸하였으며 경찰관, 국군, 애국청년단원 1,376명이 전사하여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충남지방 경찰청에서 1986. 6.23 준공 건립함.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고귀한 희생정신은 추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빨치산,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 역시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들은
오직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어느 날 빨치산이 됐을 것이다. 왜 그들이 빨치산이 돼야
했을까? 그로 부터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역사는 아직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케 하는 개나리꽃은 분홍색 진달래와 더불어 이 봄에 온 대지를
색색으로 화려하게 수 놓는 꽃이다. 양지 바른 곳에서 노란 잎의 개나리꽃들이
도란거리는 소리가 수런수런 내 속뜰에도 전해오는 듯 싶었다. 봄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역시 아름다운 침묵에 있었다. ▼
가로수로 심어 놓은 소나무이다. 하지만, 풍치있는 줄기와는 달리 솔방울들이 방울방울
열려있다. 열악한 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그 수명이 다 돼간다는 증거이다.
한낱 나무도 종족번식의 본능에 따라 여기저기에 생명의 씨앗들을 내려 놓는다.
세삼 자연의 경외심에 숙연해진다. ▼
반딧불이 서식지이다. 반딧불이는 처음 알로 습지, 풀 속에서 20~30일 후 부화하여 25일만에
애벌레로 태어난다. 물속에서 다슬기를 주 먹이로 하여 이듬 해 4월까지 5번의 허물벗기를
한다. 땅 속에서 약 50일간 번데기로 살다가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 성충(반딧불이)으로
태어나며 수명은 약 15일로 이슬을 먹고 살며 숫컷은 짝 짓기 후, 암컷은 50~ 100 여개의
알을 산란하고 그 일생을 마친다.▼
하산 후 맑게 흐르는 시냇물로 세수를 하고 발을 담가본다. 머리 끝까지 전류처럼 흐르는
차고도 부드러운 그 흐름을 통해 더덕더덕 끼어있는 속세의 먼지와 번뇌의 망상까지도
함께 말끔히 씻겨지는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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