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전국에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서울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상 주차장이
붕괴되고 인명피해도 있었다. 그러나 백두대간 산행길에 오르는 지금의 날씨는 어떤가? 아주
맑음이다. 요즘들어 전개되고 있는 여름날씨에 무척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평일에는 때로는 줄기
차게 때로는 가끔씩 빗줄기를 뿌리다가도 내가 산행하는 주말쯤에는 어김없이 날씨가 청명하곤
하니 어찌 이를 고맙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년 봄 백두대간 산행시에는 가끔씩 우중산행을 하기도 했었지만 1년중 가장 변덕이 심하다는
여름철의 날씨인데도 이렇게 유별나게 빗길산행을 싫어하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니 참으로 고맙기
그지 없는 것이다. 지지난주에는 댓재에서 백봉령구간을, 지난 주에는 지리산 대종주를 하는 등
연속되는 무박산행의 피로감에 온 몸은 지쳐있는 상태이지만 이처럼 날씨까지 도와주니 힘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간 길에 오를 수 있다.
금요일밤 11시 정각에 안양을 출발한 봉고차가 은티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딱 두시간만인 토요일
이른 1시경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은티마을 농산물 직판장을 겸하고 있는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약 40 여분 가량을 달려 산행 들머리인 버리기미재로 이동하였다.
산행 일시 : 2009. 7. 10~11일(금요무박)
산행 코스 : 버리미기재~ 장성봉~막장봉~악휘봉~구왕봉~지름티재~희양산~은티마을
산행 시간 : 약 10 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이제 버리미기재는 불 놓아 마련한 손바닥만한 밭뙈기에 목숨 의지하던 궁벽한 화전민들의
삶의 흔적도, 빌어 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해야 했던 이들의 아프고 가슴 절절한 사연들도 느낄 수
없었다. 다행스런 일이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버리기미재에서 간단한 스트리칭을
하고 기념촬영을 한 다음 곧바로 백두대간의 위대한 산 길에 접어들었다. ▼
으악! 징그러버라~~버리기미재에서 잠시 용변을 보고 오는 사이에 왠 두꺼비가 배낭에...▼
처음 목표지점인 장성봉을 향하여 약 1시간여 동안 낯선 산길을 달렸다. 급경사가 심한 길이었다.
암릉구간도 여러 곳 있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나, 오르는 시간내내 설레임으로
가득했었다. 내고향 장성땅과 똑 같은 이름인 장성의 봉우리가 내게 어떤 감동으로 다가올 것인지
생각만 해도 희망 가득한 일이었다. 드디어 장성봉(長城峰)에 도착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상세히 조망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보아도 그 웅장한 모습이 마치 그 이름처럼
거대한 만리장성의 일부를 닮은 것 같아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장성봉(915미터)
을 명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백두대간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산이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희봉,
구왕봉(898m),희양산(998m), 대야산(930.7m), 군자산(910m)등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는 깊은
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장성봉을 지나니 산길은 대체적으로 부드러웠다. 막장봉 갈림길을 지나 한참을 달리다 보니 악휘봉
갈림길이 나타났다. 악휘봉은 막장봉처럼 대간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기 위해
지친 몸에 배낭을 내려놓고 악휘봉으로 향하니 당당히 선 촛대바위가 외롭게 서 있었다. 정상은 촛대
바위 뒤에 있었다. ▼
악휘봉 주변조망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
앞으로 진행해야 할 희양산을 배경으로...▼
악휘산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촛대바위이다. ▼
악희봉을 지나 적당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였다.지금 식사는 아침인가, 점심인가? 시간상으로는
아침 9시이니 아침이 맞을 듯 싶고 새벽1시에 식사를 하고 지금 또 식사를 하니 점심이라고 불러도
틀리지는 않을 성 싶었다. 암튼 식사를 한 후 은티재를 지났다. 은티재는 백두대간이 구왕봉과
희양산으로 치솟아 오르기 전 잠시 몸을 낮추어 생명을 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이라고 한다.
은티재에서 구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은 가파른 산길이었다. 사진은 은티재이다. ▼
은티재를 지나 첫번째 만나는 봉우리가 해발 683미터의 주치봉이다. 어느 산우께서 정성드려 붙여 놓은
정상 표지가 앙증스럽다. ▼
앞으로 진행 할 구왕봉은 아직 50분이나 남아있다. 오늘 산행의 최종 날머리인 은티마을을 곧 바로 내려가면
불과 20분거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왕봉과 희양산을 돌고 돌아 은티마을로 내려가야만 한다. ▼
드디어 해발 887미터의 구왕봉이다. 구왕봉(구룡봉이라고도 한다.)은 지증대사가 봉암사 주춧돌을 세울때
그 자리의 연못에 살고 있던 용을 신통력으로 쫓아냈는데 당시 쫓겨난 용들이 자리를 잡은 산봉우리라 해서
구룡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
구왕봉에서 내려다 본 산 기슭이 깊기만 하다. 멀리 그 유명한 봉암사의 모습도 아스라이 보인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년(879년)에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 봉암사 자리를 대찰자리라고 정한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흙으로 메우려는데 큰 용이 살고 있어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구왕봉)으로 쫓아내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운곡에 계암(鷄岩)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봉암사를
세울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하여 절 이름을 봉암사라 하였다고 한다.▼
구왕산에서 멋진 희양산을 배경으로 한컷 땡겼다. 그나저나 오늘 저 아름다운 희양산을 갈 수 있으련지..? ▼
구왕산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오는 길은 무척 거칠고 험한 암릉구간이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대형사고를
일으킬수도 있는 장소이다. ▼
가을에는 왜 단풍이 들까요? ▼
드디어 지름티재에 내려섰다. 희양산으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봉암사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눈에 띄인다.▼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목책이 촘촘히 쳐져 있었다.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봉암사에서 쳐 놓은 것이다. 수행 도량인 봉암사의 참선과 정진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조치인 듯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인 희양산을 오르고야 말겠다는 나의 평소
집념에 굴한 탓일까? 희양산으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당연히 당번을 서는 스님들의 모습이
보여야 할텐데도 그분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 지자체의 산림감시요원이 나와 서 있었다.
조심스레 예를 갖춰 희양산을 열어줄 것을 부탁했다. 대충 인원수를 체킹하더니 조용히 올라가시
라고 한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뿐만 아니다. 기념사진까지 촬영해 주신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린다. 그렇게 해서 우린 1년에 딱 한번, 4월
초파일 하루만 개방한다는 그 희양산에 오를 수 있던 것이다. ▼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험로였다. 수직 로프구간도 많았다.
더구나 우린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로프에 의지한 채 오르다가 어깨에 힘이 빠져 자칫 로프를 놓치는 날에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만다. 힘들게 힘들게 희양산에 올랐다.▼
희양산에 오르니 그곳에는 상상했던대로 화창한 날씨속에 멋진 절경들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
희양산 정상에 올랐다. 위엄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희양산(998미터)의 정상은 빼어났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솟아오른 암봉의 자태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돋보이는 명산 희양산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1600 여년간 우리겨례의 정신을 이끌어온 사찰답게 육중하기만 했다. 산 정상엔 조심스럽지
못한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당번을 서는 스님들도 만날수 있었다. 단지 사람들이 많이 다닐 수 없는
곳이기에 그런지 누군가가 써 놓은 글씨의 초라한 정상석이 옥에 티였다. ▼
조계종의 소유의 경계라인에 희양산성이 있었다. 이곳 역시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
다음 백두대간 산행의 들머리격인 산성터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
산행 날머리인 은티마을로 향했다. 지쳐있었을까? 하산 길 역시 지루한 길이었다.그러나 아직도
은티마을까지는 800m를 더 가야만 한다. ▼
은티마을 어귀에는 개망초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국화과의 두해살이 풀인 이 풀의 꽃은 그 모양새
때문에 원래'계란꽃'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넓은잎잔꽃풀'이라는 어여쁜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꽃 이름이 '개망초'가 된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1910년에 이 꽃이 유독 많이 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할 때 눈치도 없이 여기 저기 많이 핀 것이 너무나 미웠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망할 망(亡)'자를 넣어 '개망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라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들일진데 꽃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넓은잎잔꽃풀'
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러주면 어떨까. 아니면, 그냥 '계란꽃'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
하산 길 길가에 탐스러운 산딸기가 주저리 주저리 열려있었다. 물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
은티주막! 백두대간 산행을 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거쳤을 아담하고 정겨운 주막이다.
수 많은 대간 리본의 모습들이 이채롭다. 그러나 우리는 따로 예약을 해둔 집이 있었기에 이곳에서는
간단히 막걸리 한잔만 마셨었다. ▼
은티 마을은 아늑하고 평온했다. 산자락 드리운 골짜기에 들어선 낮은 집들은 안온했고 잘 닦여 있는
길들은 나무들과 어울려 편안했다.▼
마을을 지키려고 우뚝 서 있는 장승 곁에 커다란 마을 유래비가 서 있었다. 글씨가 변질됐는지 바위가
변질됐는지 글씨를 잘 알아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은티 마을은 계곡을 중심으로 한 그 형세가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어서 이 기를 죽이기 위해 마을 초입 가겟집 노목 아래 남근석
(男根石)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마을의 풍성함과 무사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매년 섣달 20일 이곳에서
동구제(洞口祭)를 지낸다고 한다. ▼
드디어 우리가 잠시 마물게 될식당에 도착했다. 우선 계곡으로 달려 가 알탕을 하고 땀에
젖은 옷부터 갈아 입었다. 몸은 날아갈듯이 가벼웠지만 뜬눈으로 지새고 야간산행을 한 탓인지
눈은 충혈돼 있었고 얼굴은 까칠했다. 동동주를 곁들인 백숙을 먹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산행은 힘들어도 역시 뒷풀이는 즐거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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