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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 사진첩/수도권 산행

북한산 13성문 종주

 

 

 

그것은 애시당초 무리였었다. 금요일밤에 단 세시간 가량 눈을 붙이고 강행한 사량도 지리망산,

어젯밤..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 1시에 도착하여 다시 4시간도 못자고 이른 아침에 기상하여

13성문 종주에 나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이다. 따라서

이미 약속이 된 상태...어쩔 것인가?  답은 한가지다.

 

산행 일시 : 2009. 5. 31(일)

산행 코스 : 북한산성 종주(대서문=>중성문=>가사당 암문=>.......=>북문=>시구문)

산행 시간 : 약 7시간 30분

 

북한산성은 원래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던 성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11세기 초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관을 옮겨 온 일도 있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한 뒤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

(1711년)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7,620보의 석성이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년)에 스님 성능이 지은 북한지에는 이 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 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군창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사찰 12개,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킬로미터이며 성안의 면적은 6.611.600평방미터로 훼손된 대남문.대성문.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복원되었다.

 

 

북한산성 입구이다. 중성문을 거치지 않고 12성문만 종주한다면 바로 의상봉으로 곧바로 오르면

되지만 우리는 13성문을 종주하기 위해서 산성 안으로 더 직진하였다.▼

 

대서문에 이르기 전에 나타 난 용암사 입구이다.▼

 

오늘의 첫 성문인 대서문이다.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

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서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 동시에 북한산성의 정문

로써 군사상 적(당시 청, 왜)의 목표가 되기 쉬운 취약지이기도 하였다. 대서문은 대서문은 홍예식에

문루를 갖추고 있다. 현재 문루는 복원된 반면 문짝과 문루 양편의 협문 그리고 담은 아직 복원이 이루

어지지 않고 있으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의 일부가 폭풍우로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되고 있어 최근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육축은 무사석으로 정교하게 수축하였으나 전쟁의 상처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차량진

동으로 인하여 벽석이 균열되는 등 파손이 심화되고 있다. 육축위에는 몸을 숨기고 총포를 쏠 수 있는 문

루여장 전면에 10개 두었는데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한 덩어리의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며,

총구가 아래로 향한 근총안을 1개씩 둔 것이 독특하다..

 

이 문은 성내 북한리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하던 애환이 깃들인 문으로 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를 하여

달구지에 싣고 새벽같이 이 문을 통하여 서대문 영천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또한 이 일대는 살구나무

가 많아 이른 봄철이면 화사한 살구꽃을 보기 위해 상춘객들로 붐비었으며 성곽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아름다워 문인, 화가 등 예술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지금의 문루(門樓)는 1958년에 당시

경기도 지사였던 헌길이라는 분의 주도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무량사와 대웅전의 모습이다.▼

 

가사당 암문을 가려면 국녕사 방향으로 중성문을 가려면 대남문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린 중성문을

가기위해 대남문 방향으로 직진했다가 중성문을 보고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오늘 두번째 만나는 중성문이다. ▼

 

 

중성문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 해인 숙종 38년(1712년)에 산성수비 보완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한

성이다. 당시 별도의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 유영, 창고 등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

 

법용사 입구이다. 북한산에는 참으로 절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용학사 가는 길이다. 이곳으로 직진했다가 중성문을 보고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중성문을 둘러보고 다시 되돌아 왔다. 가사당암문을 보기 위해서는 국녕사로 향해야 한다.▼

 

 

국녕사를 끼고 우측으로 돌면 길라잡이가 나타난다. ▼

 

 

오늘 세번째 만나게 되는 가사당 암문이다. 袈裟堂暗門(가사당암문)은 용혈봉과 의상봉

사이의 해발 448m 지점의 험한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높이 2m, 폭2m의 작고 아담한

이다. 이곳에서 성밖으로 내려가면 중골이 나오고, 성안 계곡으로 내려가면 국녕사를 경유하여

성내 주차장이 나온다. 국녕문이라고도 불리우며 규모나 구조가 청수동암문과 흡사하다. 근래

에 화강암으로 말끔히 단장되어 새롭게 느껴진다.

 

 

 용출봉 앞에 나타 난 봉우리, 뒤에 있는 봉우리는 의상봉이다.▼

 

 

해발 571m의 용출봉이다.▼

 

 

해발 593미터의 증취봉이다.▼

 

 

오늘의 네번째 성문인 부왕동 암문이다.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은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산 능선 해발 521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7개 암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식 홍예(虹霓)는 아니지만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문처럼

만든 아름다운 성문이다.

 

최근까지 성문 우측에 '소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듯이 이 암문(暗門)은 처음에는

소남문(小南門)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에 원각사(圓覺寺)가 있었기 때문에

원각사암문(圓覺寺暗門)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그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 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으로 보인다. 암문중 제일 규모가 커서 폭은 16~54㎝, 높이는 53~81㎝

차이를 보여 폭이 2.54m, 높이가 2.83m에 이르고 있다.

 

 

부왕동암문에 있는 길라잡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대남문 방향이다.▼

 

 

중성문에서 직진하여 대남문 방향으로 올라오는 길, 우리는 국녕사로 우회하여 왔었다.▼

 

 

이제 대남문까지는 400미터를 남겨두고 있다. 벌써 지치면 안되는뎅....

용출봉을 오르면서 용을 쓰고 올라왔더니 몸이 지치는 듯 하다.▼

 

 

다섯번때 성문인 청수동 암문이다. 암문은 성곽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 출입구로 북한산성에는 청수동 암문을 비롯하여 서암문.

동암문. 백운동 암문. 용암 암문. 부왕동 암문. 가사당 암문 등이 있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격전지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한양 도성을 수비, 방어하고자 숙종 37년(1711년)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승려 성능이 지은 북한지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990년부터는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용암암문. 청수동 암문 및 성벽 등을 보수

하고 동장대를 복원하였다.▼

 

청수동암문에 있는 길라잡이, 청수동암문은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 해발 694m에 위치한 성문으로

승가사 뒷산 능선에 있는 비봉과 연결되며 대남문과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인에

이 문도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네모 난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문에는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 있다.▼

 

 

여섯번째 성문인 대남문이다.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이다.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이라는 두 거봉을 잇는

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鞍部)에 위치해 있다. 앞뒤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마치

평창동 일대를 긴팔로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대남문은 백운대쪽에서 바라보면 성문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하게 보이며 보현봉에서 백운

대를 뒷배경으로 내려다 보는 맛도 일품이다. 이문은 대동문과 구조가 흡사하다. 오늘 13성

문 종주도 이제 절반 가까이 마쳐가고 있는 셈이다.▼

 

 

해발 683미터에 위치한 대남문의 길라잡이이다. ▼

 

 

대남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는 불암봉이다.▼

 

 

일곱번째 성문인 대성문이다. 보현봉(普賢峯) 동북쪽 형제봉을 거쳐 보토현봉으로

이어지는 해발625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문으로는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 원래 처음에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

하고 있어서 임금이 이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

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위용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대성문에 위치하고 있는 길라잡이이다.▼

 

 

여덟번째 맞이하는 보국문이다. 보국문의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의 높은 지점에 위치하여 정릉을 내려다보고 있다. 성문 아래에 보국사

가 있었다고 하여 현재 보국문이라 불리우고 있다.

 

 

보국문에 위치한 길라잡이. ▼

 

 

아홉번째 성문인 대동문이다.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의 소위 "진달래 능선"이 시작되는 해발 540m지점에 위치하고 있

으며 대서문과 같은 큰문이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되

었다.

 

대동문은 산성을 지키는 삼군의 하나인 금위영 본부자리다. 대동문이 지키고 선 고갯마루

일대를 옛날에는 석가령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동문의 현판 글자는 북한산성을 쌓은 숙

종왕의 어피을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대동문에 위치한 길라잡이.▼

 

 

동장대, 동장대(東將臺)는 북한산성 내의  3기 장대 중의 하나이다.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로 성안의 지형이 높은 곳에 설치한 건물이다. 성안에는 각 국문별로 적정장

소를 선정하여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를 두었는데 그 중 동장대의 규모가 제일 크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드디어 열번째 성문인 용암문에 도착했다. 용양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선사,북한산장, 노적

봉과도 맞닿아 있으며,

 

 옛날에는 중흥사, 태고사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한편 부근에는 과거 이 일대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무너진 탑과 석축이 남아 있으며, 북한산

장이 자리하여 많은 등산인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용암문에 위치한 길라잡이.▼

 

 

 

해발 716미터의 노적봉이다. ▼

 

 

노적봉에도 신록은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위문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백운대를 뒤로하고 한컷 땡겼다.▼

 

 

오늘의 열한번째 성문인 위문이다.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출입구

는 네모 난 형태이며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당초부터 없엇으나 문짝을 달았던 흔

적은 남아있다.

 

출입문 주위는 대체로 양호하나 여장을 비롯한 상단의 성돌이 무너져 내려 높이가 상당히

낮아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위문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

리어 왔다고 한다.이제 북한산 성문은 북문과 시구문...두개의 성문만 남아있다.

 

 

13성문 중 유일하게 성문의 표시가 없는 문이 위문이다. ▼

 

 

대동사 입구이다.▼

 

 

대동사 경내이다.▼

 

 

위문에서 산성매표소 방향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길라잡이. 이곳에서 무심코 내려가면

북문과 시구문을 놓치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원효봉으로 올라야 한다.▼

 

 

열두번째 만나는 북문이다.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현재 염초봉의 본래 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한 당초 홍예식에 문루를 갖춘 큰문으로 축조되었다. 문루는 오래

전에 소실된 채 육축상단을 마감한 장대석은 전부 무너져 내리고 홍예돌 윗부분이 완전

노출된 채 균열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부의 초석도 절반은 없어지고 5개만 위험한 상태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1988년 큰비에 육축을 포함한 성벽이 15m가 무너져 성문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는 바 대책이 절실하다. 이제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힘들게 힘들게 해발 505미터의 원효봉에 올랐다. 원효봉에서 북한산의 여러 절경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른편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는 의상대사가 참선

수도 하였다 하여 의상봉(표고 503미터)이라고 불리며 그 오른쪽에 있는 대서문에서

의상봉. 용혈봉. 문수봉까지의 능선을 의상능선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표고836미터)는 이 성계가 조선 창업

이전 이곳에 올라 "흰 구름 가운데 있다"하여 이름 붙여졌고 그 우측에 보이는 만경

대는 조선 조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가 이곳에 올라 도읍을 정하였다고

해서 국망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또 우측으로는 노적봉이 위치하고 있고,

 

백운대 앞에 위치한 인수봉(표고 810미터)은 공자의 " 인자요산인자수(仁者樂山仁

者壽)" 즉,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는 뜻에서 어질 "인(仁)"

자와 목숨 "수(壽)" 자를 사용하여 인수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 등 세개의 봉우리가 뿔같이 솟았다 하여 삼각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원효봉의 암봉이다.▼

 

 

원효봉의 암봉에서 아슬아슬하게 암벽훈련을 하고 있다.▼

 

 

하산길에 나타 난 원효암이다. ▼

 

 

오늘의 마지막 열세번째 성문인 시구문이다.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성내에서 생긴 송장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이 시구문(屍久門)이라 불리웠고,

원래 성문 이름인 서암문(西暗門)을 대신하여 고착화되어 현재도 성문에 '시구문'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서암문은 대서문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으므로 방어상 취약지

임을 감안, 주변 성벽을 구축하고 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 되도록 축조하여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

 

 

무더운 여름 날씨 속에 시도했던 북한산 13성문 종주...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만끽했다.

이제 대장정을  끝내고 속세로 돌아가야 한다. 산성계곡에서 뜨거운 몸의 열기를 어느정도

냉각시키고 구파발을 경유하여 이수역 근처에 있는 집불 삼겹살 집에서 소맥을 곁들여

포식을 하고 밤 여덟시 경에 귀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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