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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사진첩/킬리만자로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일러두기

    본편 킬리만자로 등정기를 먼저 읽다보면 킬리만자로 산행 전.후 다시 말해, 킬리만자로에 입산하기

   전까지의 과정과 사파리 여행 등 등정 후의 얘기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본편에 앞

   서 미리 정리해 둔 케냐와 탄자니아, 그리고 사파리 여행기를 먼저 읽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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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어렵고 힘든 산행은 그쯤에서 접고, 앞으로는 가볍게 둘레길

위주로 트레킹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오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던 말이다.


 허나, 그 분들의 따뜻한 충고는 분명 고맙지만 아직 내겐 꼭 올라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하지만 쉽게 엄두가 안 나는 곳, 그러기에 내 인생

의 버킷리스트 중 최상위에 랭크돼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이름만 불러 봐도 가슴 떨리게 하는 검은 대륙의 하얀 산 킬리만자로이다

나는 이 산을 오르기 위해 지금껏 무수한 산행을 하여 왔고  몸 만들기라는 이름으

로 그동안 분주히 산을 찾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킬리만자로 등정은 나의 산행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판이 될 것이

틀림없다. 등정계획이 확정된 순간부터 내 마음은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를 다녀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킬리만자로, “다시는 안 가가 아니라 절대 안 가라고 한

.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들 말할까? 마치 제대군인이 부대

를 향해서 오줌도 눕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내 나이에, 이 체력에 과연 등정에 성공할 수 있을까? 등정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도

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가슴은 설렘이 가득했다. 거친

길이 아름답다고 하듯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기에 행복해 했는지 모른다.


 산모가 모진 산고(産苦)를 겪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옥동자를 분만할 수 없듯이 우리 인간

근본적으로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나로 하여금 강렬하게 킬리만자로로 향하게 했던 것일까?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일까? 물론 우리는 산을 보고 산을 오른

. 때로는 산이 나를 불러서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안에서 그 산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힘, 그것이 곧 살아있는 생명력

이 아닐까 싶다.

 

  사실 킬리만자로라는 산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E.M.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을 통해서이며, 우리나라 역시 국민가수 조용필이 불렀던 공전의 히트곡

"킬리만자로의 표범" 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


 여기에서 잠시 그 소설의 유명한 서문을 인용해 본다.

킬리만자로는 높이가 19,710피트나 되는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

이다.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語)누가예 누가이, ()의 집이라고 불린다.

서쪽 봉우리 정상에는 얼어붙은 한 마리의 표범의 시체가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정상에는 아직도 표범의 시체가 온전히 남아있을까? 나는 당시 미지의 세상에 도전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60대 중.후반의 나이에 부리는 만용도 객기도 아니었

을 것이다은 이루어질 때 보다 꿀 때가 더 설레고 행복하다는 말처럼 말이다.


 가슴이 뛰도록 행복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으니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행복했

꿈은 일단 접고, 헤밍웨이의 소설과 조 용필의 노래에 등장하는 표범을 찾기위해 직접 킬리

만자로 속으로 녹아들어가 보도록 하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7시간 여를 달려 탄자니아의 모시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킬리만

자로로 향하기 직전 1박하게 될 스프링 호텔이다.▼



 여장을 풀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내일부터는 비록 처절한 산행이 시작될지언정 오늘

만큼은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도록 하자고 나 자신을 미리 다독거려주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저녁식사였다. 맛있고 없고를 떠나 오직 살기위해, 킬리만자로 등정을

성공리에 이루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식사였다.▼



  이튿날(산행 첫날), 호텔에서 두어 시간을 달려 산행 들머리라 할 수 있는 마랑구 게이트

(해발 1,980m)에 도착했다. 탄자니아 국립공원 안내판 앞이다. 이곳에서 만다라 산장까

는 8km, 3시간 소요되고, 다시 호롬보 산장까지는 19km 에 8시간이 소요되며,


 키보 산장까지는 28km에 13시간, 마지막으로 킬리만자로 정상인 우후르 피크까지는 총

34km에 19시간이 소요된다고 적혀있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실제 소요시간은 

록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소요됐었다.▼



마랑구 게이트 스타팅 포인트이다. 이곳을 통과해야 비로소 킬리만자로로 향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를 축소한 모형이었다. 축소모형의 정상엔 만년설도 하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만년설이 녹아 없어진 상태였다.▼



 역시 킬리만자로를 축소한 모형이다. 하지만 정상인 우후르 피크에 설치돼 있는

정상 표지 시그널이 실물과 너무 닮음꼴이었다.▼





 인간이 세계 최고봉을 정복한 빛나는 역사의 뒤안길에는 험로를 개척하고, 캠프를

준비하고, 짐을 나르고 식사 등을 지원하는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

. 이번 킬리만자로 등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기로는 이번 등정에 등반객 1인당 탄자니아 포터 2명, 쿡 1명, 세르파 1명 등 총

4명이 배속된다고 들었다. 비록 피부 색깔은 달라도 이들 덕에 우린 보다 편안한 등

반이 이루어 진 것 같았다.▼



  5~ 60대 중년의 나이에 산을 오르는 모습은 마치 인생의 오십고개를 넘듯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것이 인생을 아는 사람들의 발길인지 모른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고, 관계를 배우고 그 다음에 다시 자연을 배운다고 한다.


 자연을 통하여 높이 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삶의 리듬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만 청춘"인 우리 자신을 "몸도 청춘"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월은

살결에 주름을 만들지만,


 우리가 삶의 열정을 상실할 때는 우리의 영혼까지 주름지게 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도 그들

의 산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몸도 청춘, 마음도 청춘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프리카는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자연으로부터의 침묵을

배우러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다녀 온 뒤 가장 큰 변화는 마음이 편안해졌

는 것이다.


 지금껏 자신을 눌러왔던 무엇인가로 부터의 벗어남과 함께 뭉클한 해방감을 느낀

는 것이다. 사진 속 분위기는 밀림 어느 곳에서 금세 타잔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만다라 산장으로 향하여 울창한 열대우림을 가로지르는 길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자연은 스스로 자(), 그럴 연()이다. ,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다소 어수선해 보이지

만 이것이 자연의 참 모습인 것이다.


 이래야만 생태계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나무가 있어야 벌레 등 곤충이

식하고, 곤충은 다시 새들의 먹이가 되고...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이자, 순환의 질서인

이다.




 만다라 산장까지는 1시간이 소요되고 하산 길 중 도로는 관리인력과 포터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표시이다.▼



 해발 2,700미터의 만다라 산장에 이르렀다. 마랑구 게이트에서 시작되는 킬리만자로의 등반

보통 4박 5일에 걸쳐 이뤄진다. 만다라 산장까지 향한 첫날은 짦고 편한 길이었다. 분홍빛

작은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있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함께 계곡을 가르고 있었다.▼








 만다라 산장은 작지만 깔끔하고, 비록 희미하지만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도 들어온다.

킬리만자로에서의 첫날은 만다라 산장에서 1박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초저녁에만 해

도 많은 비가 내리더니 자정이 지나고 나서는 맑게 게여 있었다.


 화장실로 가기위해 랜턴을 들고 나와 하늘을 쳐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머

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별들이었다.세상에는 아

름다운 것들과 슬픈 것들이 있고 그 둘이 같이 합쳐져 별이 된다고 한다.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별들이 위치 바꾸는 것이었다

머리 위의 별이 움직였다. 순간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복받쳐오르는 슬픔이 눈물이 되

내 얼굴에 흘러내리고 내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다.


 흐느끼며 울고 싶었다. 왜 별들을 보면 감정이 축축해지며 옛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별과 인간의 감정과는 어떤 상관관계일까? 많은 시인들은 그 축축해지는 시상을 노래

뿐 그 이유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





 둘째날이었다. 오늘은 3,720m 의 호롬보 산장까지 5시간 동안 이어지는 길이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숲은 끝나고 잡풀이 무성한 지대로 들어선다. 이른바

캪틴 세르파가 계속해서 "뽈레, 뽈레(천천히 천천히)라고 외친다.


 평소 국내 산행시에는 빛의 속도로 뛰다싶이 했는데 할 수 있는가?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수 밖에..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걸었다.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말이다.▼



 고산지대에서 노란 꽃을 만났다.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청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 준다. 나도 꽃과 새와 별을 닮을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나의 있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닌 당신에게 꼭 필요한 절대적인 존재였으면 좋겠다.





 호롬보 산장으로 향하는 중간지점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양은 풍성했지만 품질은 글쎄였다.

하지만 남김없이 해치워야만 했다. 호롬보로 가기 위해서 킬리만자로 정상 등정을 위해서도

그렇다.▼





 계곡과 계곡을 연결해 주는 고마운 다리였다. 산행 중 큰비를 만나 불어난 계곡수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때 이 다리는 천군만마와 같은 역할을 해 낼것임이 분명했다.

어쩜 다리 하나라도 이렇게 듬직하게 설치했을까? 절로 고개숙여 진다.▼



 심하게 할퀴어진 등산로의 모습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비바람에 할켜지고

수 많은 등산객에 의해 할켜진 등산로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산행 시작 5시간 여만에 해발 3,720m의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호롬보 산장은

마웬지봉과 킬리만자로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이곳에서 우리

는 무려 3박을 하게 된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은 고소 적응을 위한 훈련을 마치고 다시 1박한 후,

 정상 등정을 마치고 하산시에 다시 이곳에서 1박하게 된다.▼



 이제 겨우 둘째날에 불과하지만 마치 정상이라도 오른 듯 기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어딘지 자신감이 충만해 보였다.▼



 호롬보 산장은 말이 산장이지 외형만 놓고 볼 때는 선진 제국의 어느 나라 건축

보다 세련되고 듬직해 보였다. 뿐만아니라 주변의 풍광이 너무 좋아 건축물의

적 효과가 극대화 되는 느낌을 받았다.▼




 호롬보 산장 일대에는 까마귀 떼들이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그 음산한 울음을 울어댔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그 모습만큼 칙칙하고 괴기스런 울음들을 까욱까욱 울어대며 산골

짜기를 빙글빙글 돌다가 어느 한곳에 내려앉아 고기냄새를 맡고 있는 듯했다.


 옛부터 사람들은 까치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길조(吉鳥)라 하고 검은 깃털 까마귀

는 흉조(凶鳥)라고 하여 좋아하지 않았다. 어미 까마귀는 새끼가 부화되면 63일간 지극

정성으로 먹이를 물어다주며 건강하게 성장시킨다.


 그후 어미가 기력이 쇠잔하여 사냥을 하기 어려워지면 새끼가 어미를 먹여 살린다. 까마

귀가 어미를 되먹이는 습성을 은혜 갚는 새, 즉 반포지효(反哺之孝)라 한다. 기왕 말이 나

온 김에 까마귀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까마귀는 새 종류의 하나이다. 몸이 검고 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새 조(鳥)자의 눈

부분의 한 획을 생략해 까마귀 오(烏)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말에 까막눈이라는 말도

눈이 먼 까마귀 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까마귀는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대단

하다. 까마귀는 사람의 얼굴도 구분하는데 한 번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기억했다가 두고

두고 덤벼들어 공격한다.


 까마귀는 최소 40개 정도의 까마귀어(語)를 구사한다. 먹이를 발견했을 때는 까~까~까

(여기 먹이가 있다.), 천적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깍깍깍(위험하다.), 보금자리로 돌아갈

때는 콰~콰 (안전하다)하고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산장 주변에 앉아있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마냥 대견스러워 보인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분다. 이렇게 신선한 바람을 맞는 것도 나들이의

행복일 게다. 그래서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오는 일

이라고 하지 않던가.


 난 생 처음으로 대하는 풍경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혹은 100년 후로 안내

하곤 했다.



 등정 중 마지막으로 자게 될 키보 산장까지는 10.16km 라고 한다.▼





 호롬보 산장에서의 첫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마휀지봉(해발 5,149m)

갈림길인 얼룩무늬 바위까지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고소 적응 훈련일이다.


 집을 떠나온지 5일째, 서서이 지쳐가는 몸을 이끌고 목표지점을 향해 뚜벅뚜벅 길을

걸어나갔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산꽃들을 외면하

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꽃들은 반가운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산행에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등정을 미리 축하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단하고 지친 내 삶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얼룩무늬 바위 앞에서 한 컷 댕겼다.▼



 어제 고소적응 훈련을 끝내고 오늘은 키보 산장으로 향하는 날이다. 키보산장 까지는

10.16km 의 거리로 7시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 구간이야말로 킬리만자로 정

상 등정의 승패가 걸린 구간으로 고소와 체력안배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호롬보를 출발하여 서너 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양손이 저려왔다. 드디어 올 것이

것이다. 고소증세가 덮친 것이다. 물론 아침에 아스피린과 타이제놀은 한 알씩 먹

둔 상태였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는가?


 일행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때맞춰 일행 한 분도 나와 같은 증세를 느낀다고 하였

다. 우린 즉석에서 이뇨제를 반 알씩 나눠 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저렸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료가 됐다. 정말 신통한 약이었다.


 우측에 우뚝 서 있는 산이 킬리만자로이다. 정상부분에 만년설도 보인다. 가없는 하늘

끝에 솟은 킬리만자로의 흰 이마를 마주하며 걷는다. 길은 고즈넉하고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다.







  5,149m 의 마웬지봉 바로 앞에서 한컷 땡겼다. 마웬지봉은 아프리카에서 세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마웬지봉을 지척에 두고도 오를 수 없다는 사

실이 안타까웠다.


 어느 순간 이마가 시큰해질 정도의 슬픔이 찾아왔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부른다.

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에 취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비루한 수필가인지라 그럴듯한

감성의 달필로 이 아름다움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하지만 슬픔마저 감출수는 없었다.



 마지막 샘터인 라스트 워터포인트를 지나 마웬지 능선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키 낮

풀들은 자취를 감추고 사막의 풍경으로 변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

.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고요히 흐른다.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구름이란 영원히 흩날리고 찢기는 존재, 구름은 어차피

하늘의 바람과 무지개에 쫓겨다니는 그런 존재였다.▼





 어느 새 키보산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풍요의 여신, 킬리만자로

만나려 가는 날이다. 세상에는 거저가 없더라, 꿈도,  희망도, 사랑도 노력이고 쟁취더라.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마저도 저마다의 노력으로 존재하고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고 느

끼는 것도 노력없인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호롬보를 출발하여 7시간 여의 산행 끝에 드디어 해발 4,720m의 키보 산장에 이르렀다.

온 몸이 쑤시고 결려 옴짝할 수가 없었다. 문득 두고 온 산하에 대한 그리움이 솟았다.

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져 전에 없던 향수에 젖게 된 것이다큰 일이었다.


 오늘 산행은 새벽 11시에 기상하여 자정부터 시작된다. 정상인 우후루 피크 까지 거리는

불과 6km 에 불과하지만 소요시간은 8시간이 넘는다고 한다. 등산로는 가파르고 먼지가

많이 나는 길이라고 하였다.


 왜 정상 등정을 밤 12시에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우선은 해지기 전에 하산해야 하고, 또

낮에 이 길을 오른다면 눈 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올라도 올라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은

정상에 질려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며칠간 나는 킬리만자로와 마주하면서 무심(無心)을 익혔다. 명산과 마주하고 있으

수성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모양이다. 명상에 잠기기엔 아주 적합한 대상이다. 지치

고 닳아내 심신이 킬리만자로에 기대면서 맑고 투명하게 씻겨지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이뇨제 한 알을 미리 먹어두었다. 이뇨제의 약효는 낮에 이곳에 오면

서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먹을 수 있었다. 등정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잠을 청했다.▼



  밤 11시, 고요하던 산장이 부산스러워졌다.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과 용기,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마침내 킬리만자로 정상 등정을 위한 산행이 시작

되었다.


 어둠에 깔린 밤하늘을 수 놓는 별들 만큼이나 밝은 랜턴 불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졌다. 길은 가파른 모래 자갈길이었다. 한 발을 딛으면 두 발쯤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바람은 살을 에이듯 매섭게 불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한 매서운 추위였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정상에 이르기도 전에 동사라도 하는 건 아닐까? 정신과 육체의 한

계와 마주치는 시간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은 오르고 또 올라 어느 듯

길만스 포인트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드디어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따스한 태양이 얼어붙은 산과 나의 몸을 녹혀

줄 것이다.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뜨는 해를 주시해 보았다.

해돋이 때의 킬리만자로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눈을 아래로 뜬 소년처럼 앳된 모습, 온화하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이런 미소

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근원적인 속 모습이 아닐까? 평안과 고요를 머금은 잔잔한 이런

미소야말로 인류 구원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드디어 해발 5,685m의 길만스포인트에 이르렀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는

그 넓다란 품으로 우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었고

산행이 한참 진행중일 때도 그랬으며 오늘 이 시간 마지막 종착점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어쩔 것이냐? 킬리만자로, 그 길이 아무리 험란해도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산길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 역시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것인 것을.....


 순간 순간 나타나는 너덜길은 몹시 미끄러워 자칫 발을 헛딛기라도 한다면 중상 정

도는 각오해야 했다한편으론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이 길이 다시 오기 든 아련한

그리움을 지닌 성스러운 곳이라 생각하니


 하늘의 품에 안긴 듯 내 마음은 더 없이 평온해지기도 했다 참기 힘든 고통과 위험의

공포로부터 평정심을 찾기위해 그래서 온전한 산행을 하기위해 마음을 다독거려주

.



 길만스포인트를 출발하여 두어 시간쯤 올랐을까?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서 인증샷을 하였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인 우후르 피크는 이곳에서도 한 시

간 가량 더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산은 위험한데 왜 가느냐? 사람들이 산악인들에게 묻는다. 산에 왜 가느냐고.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위험한 고산을 왜 오르느냐고 진지한 눈길로 묻는다. “죽음의 지대라 스스로 일컫는

험난한 고봉을 제 발로 올라가서는 다시 살아 내려오려고 투혼을 불사르는 산악인들의 모순된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왜 또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일까? 이렇게 말문이 막

힐때 준비해 둔 말이 있다. 바로 조 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의 가사 한 구절이다.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

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천신만고 끝에 정상인 해발 5,895m 의 우후르 피크에 이르렀다. 감개가 무량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 올랐다. 그 동안 느낀 것이지만 산행은 내게 있어 사색이고

종교였다.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에 위치한 킬리만자로는 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멋진 산이었

으며 이 산을 오르게 된것은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었다. 이곳이라면, 여기에서라면

맑은 정신을 인간에게 걸 맞는 종교적 광희(狂喜)로 가꿔갈 수 있으리.


 이곳은 험하고 초인간적인 정상도, 게으르고 풍성한 평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

다운 맛을 잃지 않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곳으로 더도 덜도 아닌 최적의 장소였다.

,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 고독.. 이 행복..어찌 감당할 것인가.


 

 < 느림의 미학>에 대하여....


 속도는 시간의 창조이며 생명 연장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 그래서 사람들은

"더 빨리, 더 빨리" 하면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

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질주일까?


 남들이 무조건 다 뛰니까 나도 덩달아 같이 뛸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추어 서서 지금

까지 걸어 온 인생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목적의식 없이 무작정 달리는

것은 파멸을 향한 질주에 불과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한참 대지를 달리다가 갑자기 한참 동안 멈추어 선

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처 따라오지 못한 정신을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들에

겐 육체는 벌써 여기에 와 있는데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서 멈춰

서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남 보다 빨리 가려는 마음, 남 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지배하려는 마음, 남 보다 빨리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 따위의 인간의 무한 속도경쟁은 결국 인류의 파국을 불러

고 말 것이다.

 

 이제는 정말 속도 보다는 여유를 느끼도록 하자. 느림의 미학을 추구해 가며 살아가자.

이번 킬리만자로 산행 중에 " 잠보(Jambo: 기본 인삿말)) 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했

던 언어는  "뽈레(pole)~ 뽈레(pole)~ (천천히, 천천히)였다.


 그 만큼 이번 산행에 있어서 등정의 승패를 가르는 중대 요소는 느림의 미학을 여하히

실천하는지 여부였기 때문이다. 대오를 이탈하여 세르파 보다 먼저 뛰어 나가게 되면

뽈레, 뽈레는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되고, 고소증세가 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호롬보 산장을 출발하여 키보 산장으로 향하는 넓고 평평한 등로에서 우리나라 가이드

가 지나치리 만큼 일열 대오만을 고집하다가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내용인

즉, 이 같은 처사는 일행 전체의 고소적응 훈련을 위한 조치라기 보다는


 뒤쳐져 걷고 있는 가이드 본인의 친구를 보호하기 위한 속셈에서 그랬다는 것이 밝혀졌

다. 물론 "천천히, 천천히"가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곤란하다. 어떤 상황에서나 융

통성 없이 일열 대오와 "천천히, 천천히"를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제고 "불의" 앞에서는 침묵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고 정의롭기

없는 사랑하는 아우님의 충고로 사태는 일단락 되었지만 넓고 평평한 길에서까지 일열

대오를 강요하는 것은 가이드의 그 구에게도, 일행 전체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얘기가 잠시 곁으로 새나갔는데 여기에서의 결론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무리 우리가 살아

가는 사회가 속도 전쟁을 일삼는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숨 고르기라고 할 수 있는 느림의

학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암튼 우리 아홉 사람 모두는 캪틴 세르파가 하지 말라는 건 무조건 하지 않았고, 하면 좋다

것은 무조건 다 했기에  저렇게나 높은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너 너무 추운 날씨에

소리마저 얼어붙어서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부지런히 외치

고 또 외쳤다.

 

 한편으로는 킬리만자로의 정상 우후르피크에서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그 세월을 제대로 살아왔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나는 몹시 우울해 했다.▼



 나는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크고 웅장한 킬리만자로의 그 모습 앞에 아직도

내가 많이 작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 부모님

회상해 보면서 여행은 말문을 막히게 하기도 하고 이야기꾼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

을 세삼 느끼게 된다.▼



 속세로부터의 긴급 소통요청이 있었다. 마침 킬리만자로의 대장정도 끝났고 해서 빛의

속도로 하산했다. "아~ 이제 나는 또 다시 문명세계로 가야 하나?" 이곳은 킬리만자로

하는 문이 아니고 그 반대편에 있는 즉, 킬리만자로에서 빠져나오는 게이트였다.


 이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산행이 끝났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 마랑구 게

이트 공원사무소에서 하산 신고 후, 자랑스런 등정증명서를 발급 받으면 된다. ▼




 킬리만자로의 최정상 우후르피크에 올랐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등정증명서이다.

물론 이 증서를 받기 위해 산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뿌듯한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킬리만자로 등반 개념도이다.▼


 <에필로그>

 "킬리" 라는 애칭으로도 통하는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자료에 의하면 1889년 10월 5일, 독일 지리학자 한스 메이어와 오스트리

아의 산악인 푸르첼러에게 처음 발길을 허락 하였다고 한다.


 최정상인 "우후르피크(자유)" 라는 이름은 1961년 탄자니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킬리만자로는 고독한 표범의 안식처만이 아니라 넉넉하게 인간의 발

길을 품어왔다. 따라서 전문 산악인이 아니어도 체력과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산이 되었다.


 몇년 전,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이어 오랜만에 세계적 명산인 킬리만자로에 올랐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킬리만자로는 산을 좋아한다면 평생에 한 번쯤은 가 볼만 한 산,

산을 통해 배우고 느끼며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편리한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문명은 인간에게 편리함

을 가져다 주긴 하지만 평온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인간을 다독여주고 따뜻하게 안아 줄

자연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는 우리를 그 넓은 가슴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앞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힘들게, 힘들게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들이여~

자연이 건네주는 위로의 힘을 믿는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킬리만자로를 꿈꿔도 좋다.


 모든 것이 낯설고 다르기만 했던 지구 저 편 이국땅에서 똘똘 뭉쳐 한 팀이 되어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두 배로 늘리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은 서로 서로 나눠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더더 인간애가 물씬 묻어났던 아홉 분들...


 한 없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운 아홉 분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불러보고 그간의 우정에

하여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이 글이 일정부분 공적 성격을 띄기 때문에 그러

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대신 그 뜻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아울러 한결같이 예쁘고 좋고 바른 분들이었다는...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는..그래

계속 좋은 인연을 이어가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이만 줄입니다. 정말 수고들 많으

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