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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사진첩/일본, 홍콩, 동남아

대마도

 

 

언제부터인가 벼르고 별러왔던 대마도 여행,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것도 내가  소속된

산악회 주관의 테마여행이었다. 출발 당일 밤엔 몹시 많은 비가 내렸다. 일행과 일찍

만나 한 잔 술에 저녁식사를 하고 우린 택시를 타고 승차지점으로 향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자정이 조금 넘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출발한지 2~30분 지났을까? 갑자기 내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났다.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안절부절할 수 없었다. 진통이 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서야 비로소 함께 떠나는 일행들을 생각해서라도 몸과 마음을 어서빨리 진정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던지 간신히 진정시킬수 있었다.

 

그런데 평생 건강할 것만 같았던 내 몸과 마음이 왜 갑자기 흐느적거리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택시에서 내릴 때 우산이며 소지품들을 챙기느라 경황이 없이 내리는

바람에 그만 지갑이 빠진 것도 모르고 그냥 내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30여분

가까이 지난 시각에야 알았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행히 지갑 안에는 현금과 신분증만 있었고 카드는 스마트폰 케이스 안에 있었기에

여행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분실했던 그 지갑이 끝내는 내 소유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지

한사코 내 신용카드로 택시요금을 결재하려 했었건만 조수석에 승차했던 일행이 운전

기사와 지근거리에 앉아있다는 잇점으로 내 고집을 쉽게 꺾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날 내 신용카드로 요금 결재가 이뤄졌다면 지갑분실 사실을 발견한 즉시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갑의 행방을 물어볼 수 있었을테고 그렇게만 됐다면 쉽게

찾을 수도 있었을텐데...ㅠ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하자. 잃어버린 그 돈은 처음부터 내 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그 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지금부터는

지갑이야기는 옛날 옛적의 추억거리로나 돌려버리자..이렇게 버젓이 카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

 

부산으로 향하는 길위를 달리는 차량천정으로  빗소리가 요란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어느 순간 요란한 빗소리가 그치기도 했지만 그때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조용한

게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수많은 터널 중 어느 하나라도 통과할때면 쥐 죽은 듯

차안은 조용했다. 비록 잠결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느낄수 있었다.

 

 

여행 기간 : 2012. 9. 7(금)~9. 9(일)

                  *1무1박3일

여  행  지 : 대마도(일본)

여행 주관 : 안양 산죽회

 

 

 

 

 

밤새 부산으로 달려 와 부산 여객선 터미널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우린 "오션 플라우어"호에 몸을 싣고 부산항을 출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이즈하라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입국수속이 너무 더디었다. 무박으로 달려 온

피곤한 몸이라서 더욱 기다리는 시간이 힘 들었을 것이다.

 

어느 분의 말처럼 입국심사를 하는 첫번째 사람과 마지막 사람의 소요시간의

차가 무려 두시간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심사는 까다롭게 이뤄졌다.

최근의 급냉해진 양국관계 탓인가? 설마 여행객에게 까지 그 영향이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빗속을 뚫고 우린 대마도에서의 첫 관광지인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올랐다.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도 불리우는 아소우만은 겹겹으로 이어지는 산, 그리고

바다위에 둥둥 떠있는 크고 작은 무수한 섬들이 선명하지는 못했지만 자욱한

안개와 하염없이 내리는 비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나타났다.

 

 리아스식 해안의 조용한 바다가 웅대하게 펼쳐졌다. 날씨가 좋으면 북동

쪽으로 부산의 산들도 볼수 있다는데...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엔

내 고국의 산을 보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부질없는 것이었을테고...하지만,

가까이에서 나마 볼 수 있는 주변경관에 마음을 빼앗긴 채 우린  몹시 빠른

손놀림으로 정신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대마(對馬)도는 시라다케의 바위산이 마치 두마리의 말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말 쓰시마가 바로 그런 뜻이다.

 

 

 

소위 바다의 수호신을 모시는 해궁이라는 와타즈미 신사에 들렀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나라 전체가 지정학적으로 자연재해로부터 쉽게 노출돼 있어 옛부터 무수한 "神"을

믿어왔다고 한다. 와타즈미 신사 역시 아마도 그 신(神)의 일종이었으리라.

 

 

 

 

 

 

 

 

 

 

 

 

 

"고려문(高麗門), 그 역사적 슬픔과는 상관없이 참으로  반가운 이름이다.

 

 

 

 

"조선통신사의 비"의 모습이다.▼

 

 

 

 

"이왕조종가결혼 봉축기념비"의 안내표지판이다. 어째 표지판의 이름부터가

무시받고 조롱 당한 한 나라 왕조의 몰락한 모습을 보는 것같아 씁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왕조종가결혼 봉축기념비" 앞에 섰다. 덕혜옹주, 그가 누구인가? 1215년 고종의 고명 딸로

태어나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다가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일본국의 방침

에 따라 1925년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역사적으로

가장 비운했던 주인공이다.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조선의 옹주.

 

기울어가는 왕국의 슬픈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했던 가슴이 쓰리도록 슬픈 이름, 덕혜옹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3년만에 결코 축하받을 수 없는 그  결혼봉축비 앞에 서서 약육강식의

엄격한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보며 말없이 서성거려야 했다.▼

 

 

 

아래 새겨진 본문을 먼저 읽어보도록 한다. 조선족 제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종무지공과 결혼하여 동년 11월에는 대마를 방문했다. 옛 대마도주

종가당주가 조선의 옥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래도하였으므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비는 두분의 성혼을 축하하며 대마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했다.

 

결혼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들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에 이혼하였으며 무지공은 1955년에,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후 1989년에 별세하였다.

 

이제 역사에 묻혀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

 

지금 이 비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 가냘픈 인간이 지닌 원초적 그리움과 아픔마저

외면해 버린 일제하에서  풍전등화같은 조선의 운명처럼 한 인간의 고독과 불안, 외로움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던 옹주의 운명도 애처롭기만 했다. 오래오래 가슴이 쓰리도록...

 

 

 

아리아케(유명산) 등반길에 올랐다. 다행히 등산할 때에는 비가 멈춰주었으나

등산화를 비롯해서 전반적으로 등산준비를 하지않았던 내겐 그리 달갑지 않은

등반이었다. "국내에서 신물이 나도록 산길을 걸었었는데 굳이 외국에 까지 와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중이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라."라고 했듯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등반에 합류

할 수밖에 없었다. ㅠ

 

 

 

일본인들의 숲조성에는 정말이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마도는 그 면적에 있어서

제주도의 4할크기라고 하며 거제도의 1.5배의 면적을 지녔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대마도는

산지가 약 88%이다. 산지에는 온통 삼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인구가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수입과 같다고 한다. ▼

 

 

 

 

 

 

 

드디어 해발 558m의 유명산 정상에 이르렀다. 이날은 습도가 높아 땀을 억수로 흘러야 했었다.▼

 

 

 

 

 

 

 

우리가 머무르게 될 민숙의 모습이다. 시설수준은 우리나라의 여인숙 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한적한 시골분위기를 느끼게 해서 좋았다. ▼

 

 

 

 

민숙 바로 앞에는 저렇게 평화로운 바다도 있었다.▼

 

 

 

 

티아라 소핑물에 왔다. 언제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쇼핑열은 전 세계가 알아준다.

나는 지갑도 없었고 원래 외국나들이 때 선물을 사지 않은 편이라서 이번에도 쇼핑

대신 그냥 밖에서 주변관람을 하고 있었다.▼

 

 

 

 

쇼핑센터 밖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왕년 4전5기의 신화를 이뤄 낸

세기의 복서 홍 수환 선수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방관교(만제키바시)는 상대마와 하대마를 연결하는 다리라고 한다.

1900년 군사상의 이유로 당시의 제국 해군이 만제키 지협을 함선이

통행할 수 있도록 철교를 만들었다. 현재 이 지역은 쓰시마의 해상 및

육상교통의 요지로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새토의 우즈시오와

함께 부근의 만제키 전망대를 포함하여 쓰시마의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 와나우나 지구는 쓰시만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고 한국과는 불과 49.5km의

거리에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국의 산들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역 산사면에는

3,000 여개 이상의 히로쓰바타고(이팝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5월 초순 개화시에는 마치 눈이

내린듯한 꽃이 산골짜기를 가득 매우고 있다고 한다. 

 

 

 

 

쓰시마와 한국은 교류의 역사가 깊어 일본 서기(가장 오래 된 일본의 정식 역사서)에도

그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근세에는1607년부터 시작된 조선 통신사 사절단이 내방

하였을 때 이곳 쓰시마를 최초의 기항지로 하여 본토로 도항하였다고 한다. 또한 실질적

외교 교섭을 한 조선역관사절단도 50회이상 쓰시마에 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 1703년 이곳 와니우리를 눈 앞에 두고 조난하여 역관사 108명과 쓰시마 번사

4명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 그 바다를 내려다 보는 이 언덕에 애도의 뜻을

담아 역관사조난추도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또 일본 자위대의 해상기지가 있기도 하다.▼

 

 

"Tsushima Island Kankdu", 우리를 태운 일본 관광버스의 모습이다.▼

 

 

오늘 중식으로 현지식인 일본 우동을 먹기로 했다.

식당근처에 있는 일본사찰 풍만사 입구이다.▼

 

 

 

 

대마도의 마지막 관광코스인 미우라 해수욕장에 왔다.

이곳에는 해변가 숲속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있었다.▼

 

 

 

 

 

 

 

 

 

 

 

 

일본은 본디 작은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봉고차 같은 수준인 일본의 차량이 해수욕장 근처에 있었다.

보면 볼수록 깜찍하기만 하다. ▼

 

 

그 차에는 일본 여성이 해수욕장 손님들을 상대로 커피를 팔고 있었다.

함께 포즈를 취해보았다.▼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에 왔다.▼

 

 

 

 

 

 

<에필로그>

그 어느때 보다도 작금의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처럼 외교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일본 땅 대마도에 왔다. 그것은 단순히 관광

이라는 어쩌면 사치스럽고 달갑지 않은 냄새를 풍기려 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역사적으로도 우리와는 뗄려야 뗄수 없는 대마도에 관하여 이해하기 위해 왔다는

측면이 훨씬 강하리라.

 

짧은 일정속에서도 그리고 강우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일단 어느 정도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자평을 하고자 한다. 언제고 일본에 올때마다 느끼는 현상

이지만 이번에도 나는 평범하면서도 우리로서는 실로 행하기 힘든 일본인의 배려

정신에 또 한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일행이 이면도로 어느 집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조그만 도로였기에

당연히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미안한 마음에 사진촬영을 멈추고 차량을

향해 먼저 지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도로를 지나던 차량은 꿈쩍않고 우리가

사진촬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차랑의 숫자는 서너 대가 줄을 서서 정차하고 있었다. 우리가 촬영을

끝내고 나니 그제서야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떠했을까?

보나마나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려대며 난리부르스를 췄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양국의 가장 민감한 현안인 독도문제는 일단 정치적인 문제로 재껴두고라도 이와같은

사람중심의 사람을 배려하는 정신만큼은 본받아 마땅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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