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일시 : 2010. 10월의 마지막 날(일)
산행 장소 : 지리산 둘레길 제1.2코스(주천~운봉~인월)
산행 시간 : 약 6시간 30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지리산 둘레길이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도 등 3개도 5개 시군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16개 읍면 80 여개 마을을 잇는 총 300 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현재 70 여km가 개통되어 있다.
제1구간은 주천~ 운봉 구간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km의 지리산길이다. 이 구간은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얼마전 TV프로 1박2일에서 김 종민이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구간이다.
제 1구간 개념도(주천~운봉)
제 2구간(운봉~인월 구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4km의 지리산길로 오른쪽으로는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조선시대의 7대 대로 중 하나인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운봉~인월 구간은 너른 운봉 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 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TV프로 1박 2일에서 이 승기가 걸었던 길이라고 한다.
제 2구간 개념도 (운봉~인월면)
제 1코스 들머리이다. 그런데 거리는 14km였지만 소요시간이 무려 6시간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우린 제 2코스까지 걸어야 하는데 만일 저게 사실이라면 큰일
이었다. ▼
운봉으로 둘레길엔 넓다란 하천도 흐르고 있었다. ▼
비부정(非釜亭), 그 옛날 그 길목에 주막하나 있었다고 한다. 전남지방과 경남 일부에서
한양으로 가는 옛길, 바로 그 위치에 바로 비부정이란 식당이 있었다. 목재로 잘 다듬어
진 길라잡이엔 두개의 화살표시가 있는데 빨간 화살과 검정 화살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점인 것이다. 우린 빨간 화살을
기준삼아 걷기로 하였다. ▼
들판을 가로질러 이제 산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 1.2코스에서는 가장 높고 긴 산길이라고 한다.▼
개미정지가 이르렀다. 개미정지는 임진왜란 당시 남원지역에서는 의병장 조경남 장군
(남원 주천면 은송리 내송마을 출신)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조경남 장군은 활쏘기와 축지
법에도 능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으고 운봉 팔랑치에서 적은 군사를
이끌고 왜적을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왜군들에게는 큰 장애물같은 존재였다.
구례쪽으로 침입한 왜군들이 숙성치를 넘어 밀어닥치고 있을 때 조경남 장군은 솔정지에
활을 걸어놓고 고단한 몸을 잠시 쉬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들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개미가 뒤꿈치를 깨물어 잠에서 깨어나보니 왜군이 내송마을 서어나무숲까지 밀고 올라
왔다. 그래서 개미들 덕택에 왜군의 진입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 개미정지라 불리웠다
고 한다.▼
산길을 따라 한참 오르다 보니 고갯길이 있었다. 그 고갯길 정상에는간이휴게실이
있었다. 우린 베낭에 지니고 있던 막걸리 대신, 이곳에서 막걸리를 사서 마셨다.
둘레길을 만들어 개방한 이곳 지역 주민들의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다. 다음 제3코스부터는 물이외에는 아무것도 지참하지 않기로 하였다. 요소요소에
설치돼 있는 간이 휴게실을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
해발 525M의 구룡치였다.▼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그리고 마냥 행복했다.▼
소나무들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 아니다. 등치가 작은 소나무가 큰 소나무에
일방적으로 붙어 짝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작은 소나무의 사랑은
집요했다. 밑둥을 휘감는 것으로 부족해 윗부분에서 다시 휘감고 있다. ▼
이런 현상을 두고도 연리지라고 불러야할지...엄격히 말하면 두나무가 엉켜 붙은
것은 아니기에 연리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애틋한 사랑에 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무락사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 방언)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무락은 사망의 운봉지역 사투리라 하며 다무락은 담벼락 혹은
돌부터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역시 사투리이다. 즉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돌무더기
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망(事望)은 사업이나 공무따위에서 앞날에 예측되는
좋은 징조나전망을 말한다고 한다.▼
사무락다무락, 등산객들이 돌을 올려놓으며 각자의 소원을 빌고있다.▼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의 솔방울이 유난히 많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에게도 종족번성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즉 자기의 생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느껴지면 저처럼 종족번성의 본능에 따라
많은 씨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
어느 갈림길에서 한 컷 땡겼다. 아마 오늘 산행 중 첫 인물사진인듯 싶다.▼
다시 둘레길은 국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노치마을로 향할 차례이다.▼
국도변에 있는 회덕마을 입구이다.▼
지리산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 보이는 산이 깃대봉인듯 싶다. ▼
논가에 운봉방면 7.0km라는 길라잡이가 나타났다.▼
드디어 노치마을에 이르렀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전국 유일의
마을로 유명하다. 그곳에 만 1년여만에 다시 오니 반가웠다. 눈물이 글썽
거릴정도로 정겨웠다. ▼
노치마을에 관한 소개 글이다. ▼
주촌면의 보호수인 느티나무이다. 작년 9월에는 푸른 잎을 띄고
있었는데 지금은 단풍이 들고있다. ▼
백두대간의 조형도이다.▼
그 유명한 노치샘이다. 백두대간에 오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고마운 이 물을 마셨었다. ▼
노치샘을 알리며 동시에 백두대간 마루금의 방향을 알려주는 길라잡이다.
좌측방향으로는 지리산의 정령치이고, 우측방향으로는 여원재로 향하는
길이다. ▼
둘레길에는 저수지가 있고 들녘이 있고 그리고 그 뒤엔 지리산의 주능선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라보이는 곳은 바래봉 능선이다. ▼
지리산 둘레길을 허락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목판이다.▼
이곳은 동복오씨 묘역이다. 뒷편으로 평화스런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심수정(心修亭)이었다. 글자 그대로 마음을 닦는 정자이다.▼
심수정에서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나오니 소망탑이었다.▼
가족묘원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
노치마을을 떠나와 2.0km를 걸어왔다. 가장마을이었다.▼
둘레길은 다시 국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조각구름 떠있는 파란 하늘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가을들녘을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했다.
덕산 마을 표지판이다. ▼
둘레길은 제방길로 이어지고....하천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제방길을 따라 계속 걸어나갔다. 우린 운봉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
둘레길에는 고랭지 채소밭도 있었다.▼
다시 어느 마을로 들어간다. 빤히 보이는 산은 지리산 바래봉이다.▼
마을 고샅길로 들어서니 마치 고향마을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시골풍경은
정겹기만 하였다. ▼
벽화를 보고 이곳이 행정마을임을 알게 되었다.▼
행림정(杏林亭)이다.
행정마을 입구 표시석이다. ▼
논바닥 한 가운데 자리잡고 평화스레 놀고 있는 귀여운 성만이,
그 성만이가 둘레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여행길이 되길
바라고 있다. ▼
넓은 하천엔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엔 갈대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바로 앞에 산이 나타났다. 어디서 많이 본 산같았다. 고남산이었다.
작년 9월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만난 정겨운 산이었다. 다시 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또 한번 오르고 싶었지만 오늘은 둘레길을
걷는 날이므로 참아야 한다. 마음을 다독거려주었다.▼
춘향 허브마을입구이다. ▼
교통안내 표지판이 나타났다. 왼편은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권포리방향이고
오른편은 둘레길이 이어지는 인월.함양방향이다. ▼
드디어 둘레길 제1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다. 이곳 서림공원에서
중식을 하기로 하였다.▼
서림공원에 있는 방어대장군의 모습이다. 그런데 후미대열에 끼여 뒤늦게
도착한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일행들은 벌써 중식들을 끝내고 10 여분전에
이미 이곳을 떠나 제2코스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곳에 남은 분들은 다리가 아파 더이상 진행하기 힘들어 버스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랑 함께 도착한 후미의 대부분도 둘레길 진행을 오늘은
이곳에서 멈춘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앞서 간 일행들을 만나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아무리 갈길이 멀어도 주요지점에 대한 사진촬영까지 멈출수는
없었다. 제2코스 들어 처음 만나는 매요마을 입구 표시석이었다.▼
둘레길은 계속해서 신기마을로 이어지고 ...
황산대첩비는 둘레길에서 5분여의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평소 같으면
당연히 둘러보고 가야할 테지만 오늘은 일행들을 한 참 먼저 떠나보내고
나홀로 뛰는 길이라서 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어쩔 것이냐? 다시 또
이곳에 온다는 보장이 없는데...해서, 바쁜 걸음을 잠시 멈췄다 가기로
하였다. ▼
삼문(三門)이었다. 무슨 의미일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대첩비각, 조선을 건국한 이 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
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파비각, 고려말 이 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때 세운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
하고 파괴된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
사적비, 이 비는 고종 19년(1882년) 운봉현감 이 두현이 화수산 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 건립취지가 기록돼 있다.▼
비전마을, 본래 운봉의 서면지역으로 비전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전촌리 옥계리 소석리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에 편입되었다고 전한다. ▼
황산교의 깔끔한 모습이다.▼
국악의 성지로 가는 길 입구이다. 이곳 국악의 성지는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
좌측 아담한 한옥이 아마 국악의 성지가 아닐까 싶다.▼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앞서 간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인월은 3.6km 를 더 가야한다. ▼
"이곳은 개인사유지를 경유하는 구간입니다. 길을 허락해주신 대덕리조트에
감사의 마음으로 사업장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운 일이었다. 가슴 뭉클했다. 거듭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대덕리조트 뒷편에 있는 옥계호 표지석이다.▼
아름다운 옥계호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길을 걸을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았다. 옥계호를 돌고도는 산길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하여
물 한모금 못마시고 참을 것 다 참아가며 강행군을 했던
탓이리라.
앞서 간 일행들은 날머리가 얼마남지 않은 흥부골 휴양림에 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마침 그분들도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함께 합류하여
허기를 달랬다. 막걸리도 한 잔 마시고 온 몸을 적신 땀도 닦아냈다.
어느 마을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들이다. 모두 다 둘레길과 관련된 낙서들이리라.
마을회관 건립기념비이다. 월평마을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날머리인 월평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길의 가로수가 특이하다. 외국에 와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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