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문학세계/산행(여행)기 모음

금강산 여행기..

 

 

 

 

2005.12.23. 새벽 4시! 이른 새벽시간이지만 전날 초저녁부터 충분히 잠을 자뒀기 때문에 전혀

수면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못했다. 조식을 컵라면으로 대체하고 서둘러 콘도를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숙초시내에서 금강산 콘도로 가는 길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금강산 콘도에는 예정시간 보다 40여분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금강산 콘도 지하층에

련된 난로 가에 둘러앉아 추위로 굳은 몸을 녹인 후 6시경에 금강산 관광증을 발부받았다.

곧이어 현대아산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승차하여 남측 민통선과 통일전망대를 거쳐 임시 가건

물인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검역 및 세관조사를 마친 후 이곳에서 다시 대기 중인 버스로 갈아

타고 북측 출입사무소도착하였다.

 

 이제 이곳만 통과하면 꿈에도 그리던 북녘 땅을 본격적으로 밟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북측

색대에는 인민군 특유의 복장을 한 마른 체구의 인민군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순간, 방금 전에 난생 처음으로 휴전선을 넘었을 때의 팽배했던 긴장감이 점점 도를 더해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어렵사리 수속을 마친 우리 일행은 또다시 금강산행 버스로 환승하여 인민군 차량의 에스코트

를  받아가며 온정각으로 향하였다. 외형상으로는 분명 에스코트일지 몰라도 이건 완전히 우리를

감시하는 차량인 듯싶었다.

 

금강산을 향한 크루즈 여행의 고비용과 여행객의 불편을 해소하고 본격적인 육로관광의 시대를

열기위해 현대에서 건설했다는 2차선 도로를 따라 달렸다. 길 양옆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우리의 60년대 수준인 전선주가 눈에 띠고 그 뒤로는 북쪽 주민들이 거주하는 회색지

이 보였고, 그리고 금강산맥의 한 줄기로 산전체가 하나의 바위인 듯한 바위산이 보였다.

 

이런 북녘의 모습들을 은근히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보고도 싶었지만 감시차량의 눈

을 피해 촬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뇌리에

서 맴도는 동안 드디어 온정각에 도착하였다. 정확히 9시 30분이었다. 금강산콘도에

서 이곳 온정각까지의 거리는 정확측정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줄잡아 10㎞가

넘지 않으리라 생각 된다.

 

그렇다면 금강산 콘도에서 처음 수속을 밟는 시각이 아침 6시였으니 불과 10여㎞의 거리를 달려

오는데 무려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 아~ 멀고도 험한 길....그러나

그 길은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었다.  온정각 안의 기념품 판매코너에서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잠시 아이쇼핑을 하고 대기 중인 버스로 목란관 주차장까지 이동하였다. 벌써 차량환승만 몇 번째

인가? 네 차례인지, 다섯 차례인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제 본격적인 금강산행이 시작되었다.  계곡이 깊어서일까, 기상예보와는 달리 맹추위가 엄습해

고 있었다. 추위를 극복하고자 몸을 빨리 움직여도  봤지만 얼굴 등 외부로 노출된 부위는 어쩔 수

었다. 이따가 하산 후 점심식사를 하게 될 북측식당인 목란관과 그 주변 경치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계속해

서 비교적 잘 다듬어진 평탄한 등반로를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서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금강 속

으로, 금강 속으로 점점 빨려들고 있었다.

 

아! 금강산. 고성. 인제. 화양. 통천 등 무려 4개 군, 160㎢ 에 걸쳐있는 광활한 산맥. 누가

말했었던가,“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말하지 말라" 라고... 과연 그랬었다.

지금은 형형색색의 낙엽들이 지고 앙상한 뼈처럼 산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겨울산인

개골산이지만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일만 이천의 온 산봉우리가 수채화처럼 화려한

단풍으로 물들여진 풍악산이었으며

 

이제 또 금강산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이름 모를 꽃들과 초록색으로 뒤덮이는

그야말로 금강산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을 것이고 또 한 차례의 계절이 바뀌면 신록의 녹음이 우거지는

봉내산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고 말 것이다.

 

조금 오르다보니 어느 능선 끝자락 평탄한 곳에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수행을 위해 김일성의 강령적

시가 있었다는 붉은 글씨로 새겨진 기념탑이 있었다. 난 생 처음 접해보는 북측의 김일성 선전 문구였다.

이러한 선전문구들은 산에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자주 눈에 띠었다.

 

 이른바 “구호바위”였다.“주체”, “우리식대로 살자"등 섬뜩한 느낌을 주는 문구와 김일성 일가의

찬양을 기리는 선전문구가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구호바위가 위치하는 곳엔 예외 없이 이른바

“경비원 동무”가 상존하고 있었다.

 

만의 하나, 구호바위를 향하여 권총형태의 손가락질을 하거나, 또는 웃는 등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

게 되면 그 이후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는 조장(가이드)동무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전교육을 받았던 터라

별 문제없이 지나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산삼과 녹용이 녹아 바위틈으로 흐르고 푸르른 녹음사이로 하늘이 열려 있다하여 붙여

진 소위 “삼록수”와 바위와 바위사이로 만들어진 “금강문”을 통과하여 조금 오르니 계곡 좌편으로

길다랗게 늘어선 비룡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결빙된 형태로 장엄한 물줄기를 내뿜고 있지는

않았지만 조국의 산하에도 저렇게 긴 폭포가 있다는 것이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다.

 

다시 구룡연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양지다리를 통과할 즈음, 길목의 좌편 우람한 바위 앞

에서 갑자기 앞서가던 관광객들의 발길이 멈춰지기에 나도 덩달아 멈춰서서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바로  그 우람한 거석에 “志遠”이라는 큰 글씨가 빨갛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무슨 뜻일까?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해석을 해봤지만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다. “志遠”이란 김일성의

부, 김형직의 호를 말하는 것으로  “뜻을 원대하게 가져라” 라는 뜻이며 이를  기회 있을 때마다 아들인 김일성에게 주

입식 교육을 시켜왔다는 것이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린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옥류동을 지나 조금 오르니 “Y” 자 형태의

삼거리가 나타났다. 좌측으로는 구룡연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상팔담에 오르는 길이었다. 우리 일행은 우

쉬운 코스인 구룡연을 다녀와서 상팔담에 오르기로 하였다. 구룡연으로 가는 길에는 선녀가 춤을 추었다는

“무대바위”가 있었는데  영락없이 소규모 공연장의 무대처럼 보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 또한 그만큼 크다고 하였던가,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전설의 진원지였다는 것 이외에

구룡연과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폭포는 내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이제 해발 990미터,

구룡연 코스의 최정상인 상팔담에 오르는 순서이다. 상팔담에 오르는 코스는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20여

분 동안 돌계단과 철 계단을 번갈아가며 드디어 급경사 코스인 상팔담에 안착하였다.

 

일행 중 절반은 오르기를 포기하고 뒤돌아갔으며 남은  6명만이 올랐었다.  상팔담! 우선 빨간 글씨로 새겨진 돌비석부터

그대로  읽어보기로 하자, “구슬처럼 아름다운 8개의 담소가 구룡연 우에 있다고 하여 상팔담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금강산

팔선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상팔담에 오르니 해발 1,000 고지에 가까운 지대라서 그런지 강풍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상팔담의

뒤편으로는 금강산의 주봉인 해발 1638미터의 비로봉이 장쾌한 모습으로 병풍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한 컷이라도 더! 이 아름다운 비경을 놓칠세라, 역광을 피해가며 부지런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었다. 이제 하산길이다.

 

조금 전 산에 오를 때 요소요소에 배치된 북측 판매원들로부터 집요하게 강매세례를 받았던 터라 하산 길이 은근히

신경이 써졌다. 기념품을 미리 사게 되면 산에 오를 때 거추장스러우므로 하산 시에 사겠노라고 하였더니 “그럼

이따가 봅세다. 확실히 찍어 놨수다.” 라며  거의 협박수준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한, 이제 그들도 개방의 물결이 서서히 파고 든 탓일까? 최소한 이곳 금강산 일대에 배치된 북측사람

들에게 있어서는 그렇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소위 상술만 해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함께 기념촬

영을 하자는 제의에는 “지금은 근무시간이라서 안됩네다”라고 하였다가 물건이라도 하나 사주면 흔쾌

히 허락하곤 한다. 우리는 약속대로 꼿감 등 몇 가지의 물건들을 갈아주었다.

 

하산 길은 더욱 순조로워서 일행이 목련관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시간 보다 1시간 빠른 12시 30분경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였다. 메뉴라야 비빔밥과 냉면 등 두 종류에 불과하였지만 아침에 컵라면을 먹었던 터

라 선택의 여지없이  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주위를 살펴봤더니

방기가 가동이 되지 않고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등반 시 땀을 흘렸었기에 감기라도 걸릴까 우려되어 안내

원을 불렀다.

 

나 : 이 보세요, 김 동무!      실내가 매우 추운데 난방기 좀 가동하면 안 될까요?

 

안내원 : 이따가 비빔밥을 드시면 추위가 말끔히 사라질 거야요. 그러니 조금만 참으시라요.....

 

나 : ......................

 

 할 말을 잊었다. 아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북한의 전력난이 어렵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곳 관광지에서까지 이러는 걸 보면 매우 심각한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를 타고 온정각을 경

유해서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우리 남한에서는 한정된 온천수의 지속적 공급을 위해 100% 천연 온천

수를 사용할 수 없도록 법제화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금강산의 온천수는 100%가 천연 온천수라고 한

다.

 

널찍한 시설에 적당히 뜨거운 온천수가 마음에 들었다. 온천욕을 즐기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창 너머로

쏟아지는 맑은 햇살과 병풍처럼 펼쳐지는 금강의 절경을 느낄 수 있었으며 더욱이 지난 11월 미주여행이후

집요하게 나를 괴롭혀 온 무좀균을 신비의 금강산 온천수로 말끔히 치료할 수 있었다.

 

 다시 온정각에 들려 우리 상표인 만보기(萬步機) 하나를 구입했다. 솔직히 말해 북측 물건은 그냥 준다 해도 갖 않을

만큼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주류나 식품 역시 별로 맛이 있어 보이지가 않아 일찍이 단념하고 말았다.

이제 금강산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남한으로 되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본 북녘땅, 금강산.....

17:00에 우리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으니 북한 체류시간은 고작 7시간여에 불과하였다.

 

 나는 이 짧은 시간동안에 자연스레 터득한 부분이 분명 있다. 우선은 금강산 북측 출입사무소 주변의 경비를 맡고 있

는 인민군, 심각한 식량난 때문인지 깡마른 얼굴에 기계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은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한편, 똑 같은 경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우리 국군의 모습은 얼굴의 때깔부터가 달라보였다.  밝은 모습에 건장한 체

격을 갖춘 의젓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나는 한 없이 자랑스러웠다. 북측사무소에서 온정각을 오가는 도로주변 북측

민들의 모습은 어떤가? 절대로 한명만이 걷지 않는다는 것과 이동수단이 대부분 도보라는 점이며 또한 걸음걸이가 우리처

럼 여유가 없이 무엇인가에 쫓기듯 총총걸음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의 60년대처럼 아직도 민둥산에서 땔감을 마련해

나르는 모습들이 자주 목격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언제 또다시  북녘 땅을 밟아볼지 모른다. 물론 북한의 붕괴는 생각보다 빨리 이뤄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소박한 욕심하나 있다면 그것은 원대한 통일의 꿈을 꾸기보다는 누구나

언제든지 마음 놓고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가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