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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 고개

 

 

지난 60년대,
내 유년 적 농촌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찾아들었던

보릿고개라는 때가 있었다.
작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을 흔히 이렇게들 불렀었다.

감자로.... 고구마로...
때로는 수제비 죽을 끓여 한끼, 한끼

끼니를 때워가던 그 시절,
그러나 그것마저 풍부하지를 못해서 내 어머니는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식은 밥과 누룽지로 허기를 달래셨고

그것도 동이 나면 냉수를 들이키시며 힘들게, 힘들게

이른바 보릿고개라는 것을 넘으셔야 했다.

그렇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평생 내 뇌리의 한 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추억담을 속 시원히 털어놓는 것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여기 올려보기로 한다.

 

어쩜 이 이야기는 동 시대에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음직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기에.....

# 어느 시골 초등학교의 2학년 2반 교실 #


선생님의 풍금반주에 맞춰 학생들은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 임** ?

아까부터 노래는 따라 부르지 않고

왜 그렇게 멍청히 앉아 있어?.... "


"............."



" 이 녀석 봐라.....너, 선생님 말씀 안 들려? "


"............"
(뭔가 의사표시를 해야 할텐데 말은 할 수 없고

안타까운 표정만 지으며...)

이미 화가 나신 선생님

(날쌔게 분필 한 자루를 집어 던지시며....)


" 뭐 이따위 녀석이 있어...
너, 이리 나와 엎드려 받쳐 !! "

워낙 속이 매스껍고 거북했던 터라 여러 학생들 앞이지만

부끄러움 같은 것은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조심조심

선생님 곁으로 걸어나온 뒤 조용히 엎드린다.
모처럼 밝아야 할 음악시간, 그러나 나로 인해 교실 분위기는

일순 살벌함으로 돌변하고 만다.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엎드려 바친 지

채 1분이나 지났을까?
극에 달한 신트림과 몇 차례의 딸꾹질이 불규칙적으로

나왔고 울렁울렁 속이 뒤집어지는 듯 싶더니 급기야는

 "우웩" 소리와 함께 끝내 보여줘서는 안될
것들을 토해내고 만다.

교실 안은 순식간에 심한 악취로 뒤덮이고......
탄식인지....야유인지....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알 듯 모를 듯한 괴성소리는
나를 한없이, 한없이 궁지로 몰아넣었고

부끄러움조차 잊게 만드는 혼돈상태로
가두어 놓고 말았다.

"이 일을 어쪄?"

졸지에 전대미문의 대형사고를 유발한 나로서도 그저

벙벙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사태수습은 언제나 선생님의 몫이었다.


몇몇 학생들을 불러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악취가 진동하는 음식쓰레기로 널려있는 교실바닥을

치우게 하시고는 조용히 내게 다가오신 우리 선생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

" 조금 괜찮아? 속이 불편하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선생님의 따뜻한 이 말씀 한마디로 사건은 일단락 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었다.

여러 학생들 앞에서 보여준 볼썽사나운 모습은 그

렇다 치더라도 이 꼴을 시종일관 지켜봤을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들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버리는 내 자존심은

오랜 기간 회복불능상태가 됐었다.

이 엄청난 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한끼, 한끼 끼니마저 제대로 때우기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 그러나 그 시절에도 마음놓고

포식하는 날이 있었으니 그것은 생일날과 소풍날이 그랬으며

어쩌다 귀한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이 그랬었고
할머니의 기제 날이 그랬었다.

사건 전날은 다름 아닌 할머님의 기제 날이었다.

손꼽아가며 애타게 기다렸었던 기일,

그동안 방치됐었던 허기 진 뱃속을 차곡차곡 채우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른 식구들이 하나나 더 먹을까봐 그만
욕심사납게 과식하는 바람에 소화능력의 한계를 일탈한

위(胃)로부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뱃속을 배회하던

음식분비물들이 신성한 교실바닥으로 쏟아져
나오는 어쩜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그야말로

치욕적인(?) 사건이 발발하고야 만 것이다.

문득 이번 설날을 보내면서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져

차례음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요즘 아이들의

행복한 듯 보이면서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모습을 바라보며 불편하고 힘들기는 했었지만

결코 부끄러울 수는 없었던 유년 적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강렬하게 펜을 들지 않고는 그냥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