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라야 승용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조그만
고샅길에 불과하지만 내가 살았던 아파트 그 길 건너편에는
허름한 것으로 보아 지은 지, 10여 년이 훨씬 넘었을 3층 짜리
연립주택 몇 동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허름한 외형과는 달리 매년 6월이면 어김없이
이 주택의 담벼락엔 빨간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집을 "장미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 후, 10년쯤 되었을까? 장미의 집에 살았었던 그 여자...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시키고서야 비로소 그녀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말이 자유시간이지 그 후로도 그녀는 설거지다...
집안청소다....세탁이다... 해서
매일 두어 시간씩을 집안 일로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11시쯤 돼서야 그녀는 가벼운 복장으로
집을 나서서 에어로빅과 수영으로 균형 있는 몸매를 가꾸고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리고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절친한 이웃 아줌들과
칼국수로 점심을 때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 술을 단순히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엄청 폭주를 한다는 사실도 알며 그래서 거의 매일 밤을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여자란 어떤 일이 있어도 밤 시간에는
당연히 집에만 있어야 하는 존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언제였던가? 그녀의 남편이 술 약속이 있다는 말을 믿고
모처럼 그녀가 밤 시간에 외출을 하였다가 남편으로부터
혼 줄이 나게 야단맞은 적이 있다는 것도 나는 안다.
때문에 밤 시간에 그녀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과 단순히 전화통화마저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신혼 때만큼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 이유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평생에 단 한번의 사랑이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어설픈 몸짓으로 구애행각을 벌이는 중년의 사랑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밤에는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컴퓨터에 매달려 허탈한 마음을 채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 편지를 쓴다는 것도....
그 편지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밤11시쯤에는 어김없이 샤워를 끝낸다는 것도,
그리고 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한때 잠시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그녀의 감상이 더 이상 유치한 드라마의 소재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겪을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눈치채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를 포함한
그 어떤 남자와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고독하게 살아가면서도
윤리의 채찍을 느낄 줄 아는 분별력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중년의 사랑은 감정의 만남일 수는
있어도 생활의 만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궤도를 이탈하여 날아 온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사랑의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우리들의 자유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제어하고 아름답게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해묵은 습작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