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들머리인 해발1030미터의 운두령이다. 주차장엔 등산객들을 싣고 온 관광버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제 완전한 등반복장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계방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운두령에서 약 1킬로미터 올라 온 지점이다. 길라잡이가 산뜻하다.▼
계방산 중간지점이다. 생각보다 적설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강추위는 대단했다.▼
정상을 700미터 남겨 둔 지점이다. 간단히 간식을 챙겨먹었지만 날씨가 넘 추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해발 1577미터의 계방산 정상이다.
계방산은 평창군과 홍천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미터),지리산(1915미터),
설악산(1708미터),덕유산(1614미터)에 이어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때문에 계방산 정상에서 멀리는
설악산 근처의 오대산, 가리왕산, 금당산, 두타산, 태기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이 산은 운두령(1030미터)에서 정상까지 표고차가 497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크게 힘들이지
고도 오를 수 있고 흙이 많아 등산하기에 좋다는 장점이 있다. 잘 보존된 원시림과 오색찬란한
가을단풍, 환상적인 겨울설경, 수백년 계방산을 지키고 있는 주목군락등으로 인하여 많은
등반객이 찾고 있다. 계방산에는 옛날 용맹스럽고 무서운 권대감 산신령이 살고 있어 있었다.
하루는 용마를 타고 달리던 중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자, 화가 나서 부적을 써 이산에 던진 이후
모든 칡이 없어졌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 산에는 칡이 자생하지 못한다고 한다. ▼
정상에 맨먼저 도착한 나는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끝내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정상 바로 밑의 바람을 피할만한 곳을 찾아 한 컷 땡겼다. ▼
정상 바로 밑에는 아래 안내판처럼 1968년 12월에 나타 난 무장공비가 이 승복 일가를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도주한 지역이라는 간판이 나뒹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알림판의 제작년도 최소한 40년은 됐으리라.▼
주목 군락지에서 속이 환히 패인 주목나무를 배경으로 한 컷 땡겼다. 얼굴은 물론이고 온 몸이 강추위에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
말머리인 야영장에 거의 다 와 가는데 전나무 숲이 있었다. 날씬한 키를 자랑하는 전나무를 배경으로 역시
한 컷 힘차게 땡겨보았다. ▼
"Happy 700" 이란 강원도 평창군의 심볼마크다. 즉 해발 700미터 지점이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살기 위한
위치라는 뜻으로 평창군의 평균 해발높이가 아마 700미터인듯 싶다. ▼
1968년 12월 9일 밤 단란하게 살고 있던 이 승복 군의 가족 7명 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웃에
이삿짐을 날라주려 가고 집에는 5명만이 남아 있었다. 산 속에서 내려 온 무장공비 잔당 5명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는 이 승복군과 일가족을 살해하여 3명은 외양간 뒤쪽의 오지랖
물 속에 쳐넣고 어머니와 큰 아들은 퇴비더미에 파묻어 두었으며 공비의 칼에 36곳을 찔리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큰 아들 학관은 정신을 차리고 이웃집으로 기어 가 구출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식구들은 그날 밤 군견을 대동하고 출동한 수색대원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후 몇년간은 빈집이었으나 1970년 초 정부에서 화전민이 살던 빈 가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헐려지고 돌담과 집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집은 2000년 가을 이승복 일대기 기록영화를
촬영하면서 당시의 주민과 생존자의 증언 및 사진판독 등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한때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승복 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발언의 진위여부를 떠나
이젠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땅에서 없어져야 겠다는 생각이다.
<이 승복 군의 비>
<이 승복 군의 생가>
<장독대>
산 행 지 : 계방산 (강원도 평창군, 홍천군 소재)
산행 일시 : 2009년 1월 10일 (토)
산행 코스 : 운두령=>계방산=>고개삼거리=>이승복 생가터=>위 삼거리
산행 시간 : 약 4시간
안내 산악회 : 모락산 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