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사진첩/유럽5국(베네룩스)

강렬한 떨림으로 찾은 유럽여행(독일,룩셈부르크,네델란드편)

*산울림* 2015. 10. 8. 10:00

 

 

 흔히들 여행자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하나는 멋진 풍광을 보고 망설임 없이 "아름답다."고 감탄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처럼 강력한 특권을 가지고 럽 여행을 왔다. 이번 유럽여행은

베네룩스 3국에 프랑스와 독일이 추가됐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그 동안 두 차례나 다녀온 바 있는 프랑스와 독일 보다는 단연 베네룩스 3

관심있었다. 자연 환경이 드넓게 펼쳐져 신비하고 고풍스러운 유럽 문화가 다양하게 존재하

아기자기하고 예쁜 화같은 도시들만 알차게 꽉 차 있을 것같은 베네룩스,

 

 그곳들을 바라보며 나의 입에서는 연신 나의 특권이기도 한 감탄사가 그칠 줄 모를 것이다. 다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3국의 머릿글자를  "Benelux"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룩셈부르크>

 

 프랑스 일정을 끝내고 우린 다시 룩셈부르크로 왔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의 북서부에 위치해

으며 총 면적은 제주도의 1.5배인 2,586 평방킬로미터이다.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라고 하며 수

도 역시 룩셈부르크로 도시 하나가 곧 나라 하나인 셈이다.

 

 동쪽으로는 독일, 서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나라이지

만 국민소득 10만 달러가 넘는 세계 제1의 부국이다.

 

 

아래 내려다 보이는 곳은 룩셈부르크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헌법광장의 모습이다. 헌법 광장은

룩셈부르크 관광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관문이다. 헌법광장은 룩셈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기차역

과 북쪽에 있는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루스벨트 대로 건너편에 있는 광장으로 구름공원 남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페트루세 계곡에 위치해 있다.▼

 

 

 

 헌법 광장 좌편에 보이는 룩셈부르크에서 뉴브리지(New bridge)라고 부르는 아돌프 다리는 거대

아치교로서 높이는 46m,.길이는 153m이며 아돌프 대공작이 통치하던 시기인 1889~1903년에 건

설되었고 재료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설계자는 폴 세주르로서 건설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아치교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다리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고 신시가지쪽으로는 노르틀담 성담과 교회탑, 헌법광장의 중앙에 서 있는 황금의 여

신상이 잘 어루러져 보이고,

 

 교각위에서 바라보이는 시가지 풍경은 룩셈부르크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가 아돌프 다리를 찾았을 때는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그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룩셈부르크에는 유럽의 테라스, 유럽의 요새라고 불리는 절벽 위에 성곽이 있다. ▼

 

 

 

 황금의 여신상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침공군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룩셈부르크 전몰용사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추모탑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철거

되는 비운을 겪었다.▼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이다. 이 성당은 1613년 예수회 수사이자, 건축가인 당 데 브록에 의

해 설계되어 트이어의 주교 오르크 폰 헤르펜이 초석을 놓았다. 당시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

고 있었지만 브록은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간결하고 위엄있는 성당을 세웠다.

 

 이후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었다.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성당의 세 첨탑은 하늘을 향

해 솟아있다. 국가적 행사나 대공가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행하여지며 잔 대공과 벨기에 조

세핀 샬로트 공주의 결혼식도 바로 이곳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룩셈부르크는 나폴레옹이 유럽의 골동품이라 불렀던 작은 나라로 오랫 동안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하였으며 중세 봉건제의 유물적 존재로서 또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철강 공업이 발달하여 국민소득이 10만달러가 넘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풍요로운 국가이다.

사진은 룩셈부르크의 신시가지 건물들의 모습이다.▼

 

 

 

 

 

<독일>

 룩셈부르크에서의 짧은 일정을 소화하고 독일로 왔다. 독일에서의 첫 일정 역시 동화 속 아름다운

마을인 몬샤우 마을 탐방이다.

 

 아래 사진은 몬샤우로 이동하는 길목에 있는 독일의 휴게소이다. 우린 이곳 화장실에서 50센트의

유로화를 지불하고 소변을 봤다. 유럽 어느 지역에서나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는 당연히 유로화를

지불해 왔기에 특별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화장실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요금을 징수하고 반

드시 영수증을 발부한다. 이 영수증은 휴게소에서 물건 구입시 당연히 현금으로 취급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즉, 휴게소에서 2유로의 물건을 구입한다고 가정하면, 화장실 이용시 지불한 50센트의 요금에 대

영수증과 차액 1.5 유로 만 납부하면 되는 것이다.▼

 

 

몬샤우 마을의 진입방향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독일 아헨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몬샤우는 12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 중세마을이다.

아이펠 국립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광 수입으로 마을이 유지되고 있고 인구는 수

백명에 불과한 아주 아담한 마을이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몬샤우의 아기자기한 집들은 하나같이 예술처럼 아름답고

12세기에 세워졌던 집들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중세의 느낌으로 관광객들을 유인

하고 있다.

 

 아직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유럽 전문가들만이 아는 독일의 대표적 관광지로 떠오

르고 있으며 한번 쯤 가 보면 좋을 독일의 조용하고 여유로운 작은 마을이다..▼

 

 

 

 

 

 

 

 

 몬샤우는 도보로 불과 2시간 정도면 마을을 다 둘러 볼수 있을 만큼 작은 곳이다. 중세의 모

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동화속에서만 보던 것처럼 여자들은 중세의 드레스

를 입고 남자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할 것 같은 도시였다.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골목 구석구석에 박물관 갤러리 그리고 희귀한 물건이 가득한 앤티크

점들도 많았다. 샛길을 따라 걸으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샛길, 이 길도 그저 단순하게 얻

어진 길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나의 노력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우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먼저

다녀 간 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밟고 온 것이다. 그러니 기분이 묘할수 밖에...▼

 

 

독일에서의 다음 일정은 퀼른 대성당을 둘러보는 일이다. 퀼른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의

차창 넘어로 그 유명한 라일강이 흐르고 있었다. 잽싸게 한 컷 땡겨보았다.▼

 

퀼른 시가지의 모습이다. 표지판으로 보아 아마도 이 거리는 어린이 보호구역인 듯싶다.▼

 

 

 

  1996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바 있는 퀼른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뾰족하게 솟은 두개의 첨탑으로 잘 알려진 퀼른 대성당의 높이는 157m로

독일 울름의 퀸스터 교회에 이어 독일에서 두번 째 높은 교회이다.

 

 퀼른 대성당은 세계 최대의 고딕 양식의 교회인 스페인의 세비아 대성당과 이탈리아 밀라

노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 째로 높은 독일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네델란드>

  드디어 이번 유럽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꿈에도 그리던 네델란드에 왔다. 이곳에 오기전

까지만 해도 네델란드 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었던 히딩크가

떠오르고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까지 등장한 이른바 "나라를 구한 무명소년"일 것이다.

 

 마을 제방에 구멍이 난 걸 본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이걸 막아서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

켜냈었다. 어느 무명 소년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어린 시절 우리를 감동케 했던 이 교훈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비록 권위주의 정부 시절이었다고는 하지만 "나"보다는 ‘우리’ 그리고 국가를 먼저 생각하

는 애국정신을 일깨워준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 무명소년이 실제로 존재했냐는 것

인데 일부에서는 외국의 어느 만화작가가 그려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네덜란드에서는 제방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해낸 소년을 기리기 위해 동상까지 세웠으며,

실제로 이 소년은 존재했었고, 마을을 구한 뒤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접어야 했다고 말한다.

어느 얘기가 맞든 나는 오직 여행에만 전념할 뿐 그 실체에 대해 일체 생각치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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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델란드에서의 첫 일정으로는 풍차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잔세스칸스 마을 방문이었다.

이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흰테두리의 목조건물로 되어 있으며 마을 곳곳에 크고 작은 풍차들

이 흩어져 있어 동화나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숨도 쉬기 어려우리만큼 입이 굳게 닫혀져버렸다.

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마을이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오늘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그 끝이 어딘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말도 필요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네델란드의 잔세스칸스 마을은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 세상에서 가

장 아름다운 풍경하나를 그려놓고 말았다.▼

 

 

 

 

 

  잔세스칸스, "멋있고도 아름답다." 이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내 마음에 이곳 풍경

은 흡사 잘 다듬어진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있는 표현, 군더더기 하나 없는 수식을 피한 강력하

고도 정제된 산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며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오늘

이곳 풍차마을에서 새로운 풍경도 보고 새로운 눈도 갖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잔잔하고 깊은 사유, 세상을 보고 사는 법, 무소유의 생활방식까지도 터득할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조용한 정원에서 채소를 기르고 조용히 살면서 담장 너머의 일들은 아예 생각하지 않으

려는 계획이 금세 실현될 것만 같았다.▼

 

 

낮은 땅이라는 뜻의 네델란드는 국토의 30% 이상이 해수면 보다 낮다고 한다. 해서,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온다고 한다. 숙명적으로 물과 끊임없이 싸워 온 네델란드인들이지만

암스테르담에 가면 물과 화해하는 법을 터득한 듯한 여유로운 정경이 펼쳐진다.

 

 지금으로부터 800 여 년 전, 그들은 저지대인 암스텔강 하구에 나무 말뚝을 심어 흙을 쌓

아 올린 땅에 오랜 세월동안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둑을 쌓고 풍차를 만들어 물을 바다

로 퍼내 집을 짓고 생활의 터전을 닦아왔다.

 

 기왕 풍차 얘기가 나왔으니 풍차의 용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나는 이곳에 올 때

까지만 해도 풍차의 용도에 관해 단순히 국토가 해수면 보다 낮은 나라이기 때문에 물을 퍼

내기 위한 용도로 풍차를 사용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 가이드에게 들어보니 그 용도 외에도 곡식을 찧는 일, 그리고 최근에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의 역할도 한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음 프로그램인 암스테르담 대운하

투어에 나서기로 했다. 운하로 가기 전에 깔끔하고 세련된 암스테르담 시가지의 이모저모

를 스켓치해 보았다.▼

 

 

 

 

 

 

 

 

 30유로의 옵션인 대운하 투어에 나섰다. 운하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는 유람선에 몸을 실으니

암스테르담의 정경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운하의 주변

카페의 테라스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

 

 이 운하에는 선상주택만 무려 2,500 가구나 된다고 한다. 헤렌그라트(신사의 운하), 카이제르

그라트(황제의 운하), 프린센그라트(왕자의 운하 ) 등 모두 5개의 운하가 서로 교차하며 이들

운하 위로 수백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들이닥치면 비밀의 책장이 열려 다락방으로 숨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

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던 안네는 가족들과 함께 독일을 떠나 암스테르담에 정착한다.

 

 안네의 일기는 아버지의 결단으로 이곳에서 2년간 은신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

을 "키티"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일부 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내용도 담고 있지만 대다수의 내용은 은신 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4년 독일 비밀경찰이 안네 일행이 살던 곳을 알아내 그 일행은 모두 붙잡혔다. 그 뒤 안네

는 다음 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

다.

 

 안네의 일기를 봐도 암스테르담은 역시 과거 종교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이민자들을 받아들

였고 1960년 대에는 히피들을 받아들인 자유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스테르담 여행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 보는 맛난 여행이었다. 이곳에서는 암스테르담의

명물 프리츠(감자튀김)를 시켜 먹어야 한다. 집사람이 스몰사이즈를 시켰는데도 으리으리한

양이 나와 깜짝 놀랐다.

 

 마요네즈, 케찹, 바베큐 소스 등 취향에 따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암스테르담의 감자튀김

은 역시 네델란드 여행시 간식으로 강추될만 했다. 우린 그것을 안주 삼아 역시 이곳의 명물

인 하이네켄 맥주를 마셨다.

 

 여독 때문이었을까? 낮술인데도 맛이 좋았다. 아래 사진 속 좌편에 앉아 있는 분들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폭풍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 가수인 "자이언 티"의 부모님이시다. 우리

부부와 취향이 맞고 통하는 데가 많다면서 여행 기간 내내 함께 했었다.▼

 

 

<에필로그>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귀국하는 날, 여독도 잊은 채 어떤 아늑함과 따스함과 편안함,

그런 것들이 고루섞인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마치 오랜

만에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만 느끼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장같은 것이었다.

 

 이제 가벼운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무리 하는 시간을 갖는다. 모름지기 여행은 자랑

거리나 이야깃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렇게 여행 후기를 써서

게시판에 버젓이 올리는 것 자체도 자랑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심히 조심스럽다.

 

 결론인즉, 여행은 무엇 보다도 여행지의 사람과 생활, 문화와 정서 등 그들을 이해하

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곧 여행자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여행을 난독의 대상인 세상과 철저히 대면하는 생존방식으로 한번 바꿔보는 것이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벌써부터 내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