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 사진첩/일반 사진첩

눈꽃 열차여행(중부내륙~ 백두대간)

*산울림* 2015. 1. 23. 12:29

 

 "해 따라 달 따라 세월이 흘러, 내 나이는 자꾸자꾸 늘어만 가는데 가버린 시간도 옛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씩 우리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를 두고서도 어이없게도 얼룩진

마음으로 허허한 공간을 향해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가버린 세월을... 늘어버린 나이를...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을 두고 어쩌라는 것인지 참으로

부질 없이 객기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

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여행이 최고다.

 

 그렇다. 여행만이 그 허허로운 마음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이다.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던 눈꽃

열차를 탈 기회가 내게도 왔다. 이름하여 "아기백호 V-train" 협곡열차이다. 이름부터가 아동틱

하고 뭔가 분위기 있어 보인다. 이렇게 해서 나의 겨울여행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서울역에서 제천역으로 제천역에서 다시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고 협곡열차를 이용하여 분

천역, 양원역, 승부역, 철암역 등 이른바 테마와 볼거리가 있는 조그만 간이역을 구경하고

구문소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태백의 황지연못까지 둘러보는 코스이다.

 

 

 

2015년 1월 21일 하루여행, 그 첫번째 기착지인 제천역이다. 이곳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영주 부석사로 향한다.▼

 

 

드디어 오늘 첫 관람장소인 영주 부석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나는 백두대간 종주길 등 수차례

부석사 앞을 지나갔었지만 그때마다 사정들이 여의치 않아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

 

태백산 부석사의 일주문이다.▼

 

 

부석사 당간지주의 모습이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의 공덕

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

대를 고정시켜 주기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부석사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탑이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로 두탑의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앞서 일주문은 "태백산 부석사"라 표기됐었는데 이곳엔 "봉황산 부석사"라 표기돼 있다.

태백산의 또다른 이름이 봉황산인지 햇갈린다.▼

 

 

안양문에 이르렀다. '안양(安養)'은 극락을 지칭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고 한다.▼

 

 

드디어, 부석사의 중심 건물인 무량수전을 마주하게 되었다. 무량수전과 마당에 세워져 있는 석등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석등은 국보 제17호,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나는 국사공부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당연히 무량수전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마주보고 있는 무량수전은 그의 역사적 가치에 있어서는 어느 건물과도 견줄 수 없으리라 확신

한다.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 시대에 지어졌으나, 고려 공민왕 당시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화려한 단청도 없이 소박한 모습 그대로였다.▼

 

무량수전의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의 하나는 역시<배흘림기둥>이었다. 배흘림

기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굵어졌다가 다시 가늘어지는 형태의 기둥

을 말하는 것으로,

 

무량수전을 설명할 때는 최 순우 교수가 쓴<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란

글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무량수전 뒷편에는 부석사 이름의 유래가 된 '부석(浮石)'이 있다. 부석에는 바로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와

그를 연모했던 '선묘'라는 낭자와의 애틋하고도 신비로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도 한다.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

던 의상대사는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뒤 드디어 귀국 뱃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대사를 남몰래 흠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그 소식을 듣고 바닷가로 달려왔지만 이미 대사가 탄 배는 수

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만 뒤였다. 사랑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선묘낭자는 서해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용이 되어, 귀국길에 오른 대사를 바다의 풍랑으로 부터 보호하여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문무왕의 명에 의해 부석사를 창건하려 했으나 마침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이교도

(혹은 도적)들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는데, 이곳까지 따라왔던 용이 된 선묘낭자의 혼이 저 커다란 바

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내리치려 하자, 모두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바로 부석사 창건의 전설이 깃든

바위이다.▼

 

 

 

 

 

 

조사당과 선비화의 모습이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화를 모셨던 건물로, 고려

우왕 때인 1377년 지어진 건물로 역시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조사당 처마 아래에 있는 철조망은 '선비화'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것으로 선비

는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처마 아래에 꽂아 두었더니

지가 자라고 잎이 돋아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나무이다.

 

이 나무의 잎을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수난을 당해 지금은 저렇

게 이중의 철망으로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영주 부석사 경내를 둘러보고 우린 중식을 먹기위해 어느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영주 부석사 관람을 마치고 우린 분천역으로 이동했다. 분천역에서 철암역까지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아기백호 V-train"이라는 협곡열차를 타고 눈요기에 나선

다. 이 열차는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에 방영되었던 바로 그 열차라고 한다.▼

 

1956년 분천역이 개통되면서 산간오지인 이곳에도 획기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1956년 1월 1일 개통된 분천역 역사의 모습이다.▼

 

 

 

 

분천역 일대는 소위 "산타의 마을"이라 하여 겨울철 한 철을 동심의 세계로 유인하고 있었다.▼

 

 

 "아기백호 V-train"이라는 협곡열차의 모습이다.▼

 

 

 

 

"아기백호 V-train" 협곡열차 천정의 화려한 모습이다.▼

 

양원역,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역사.. 그토록 간절하게 열차가 서기를 염원했던 사람들.

꿈은 잊지 않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들은 마침내 해내고 말았다.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양원역 역사의 모습이다.

 

기차역이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이 생계의 수단으로 조그만 시장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돼지껍질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을 걸쭉하게 마셨다.▼

 

 

양원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의 하나는 추억의 화장실이었다.▼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의 협곡열차에서 차창 넘어로 본 낙동강의 비경은 내게

오래토록 잊을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강을 따라 가는 내내 거친 숨소리를 내뿜고 달리는 낙동강과 주변 산세가 빚은

아름다운 조화는 여느 국립공원에서도 볼 수 없는 천연의 자연미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협곡열차의 최종 종착지인 철암역에 이르렀다. 철암은 태백 일대에서 채굴된 광물을 전국으로

보내는 허브 역할을 했다고 한다. ▼

 

 

 구문소 자개루의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누각, 혹은 정자 라고 하는데 누각은 대체적으로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개인 보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이야기하며, 정자는 대체적으

1층으로 되어 있으며 다수 보다는 개인이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의 송림과 어우러져 있는 멋진 경관속에 우뚝 솟아있는 자개루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낙동강은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세찬 물줄기는 바위라도 뚫을 기세로 흘러갔다. 그랬었다.

구문소바로 앞 낙동강의 거센 물줄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에너지를 뿜고 흘러들었다. 아니

나 다를까 거대한 바윗덩이에 큰 구멍이 뚫렸다. 바로 이것이 구문소의 유래다.

 

 낙동강의 최상류인 태백에서 만난 물줄기는 마치 청년의 기백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세찬

물줄기는 거대한 협곡의 그것과도 닮았고, 주변 바윗돌과 산세가 함께 품어내는 것은 혈기방

장한 청년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

 

 

 

낙동강은 발원지인 태백 황지연못에서부터 시작됐다. 황지연못에서는 하루 5,0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용천수가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황지의 생명수와 태백산과 함백산 골골마다 흘러든 물줄기들이 모여서 비로소 낙동강을 이

루고 이 물줄기가 청년의 기백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 혈기가 구문소에서는 거대한

바윗덩이마저 뚫어버린 것이다. ▼

 

 

 

구문소 옆을 통과하는 아래 터널은 자연굴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이곳에서

약탈한 자원을 실어나르느라 발파작업으로 뚫은 굴이라고 한다.▼

 

 

 

구문소 삼거리이다.▼

 

 

구문소를 관람하고 오늘의 최종 여행지인 태백의 황지연못으로 왔다.▼

 

 

 드디어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황지연못에 이르렀다. 황지, 낙동강 1,300리 발원지로

하루 약 5천 톤의 물이 샘솟는 곳이다.▼

 

 

 

 

"낙동강 천삼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

 

그러나 저 거대한 표석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긴 강인 1,300리 물길의 낙동강 생태계는 

최상류에서부터 큰 암초가 도사리고 있었다. 봉화 석포리에서 만난 낙동강엔 이곳이 1,300경상도민

의 생명수의 원천이란 사실이 무색하게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었다.

 

 바로 석포제련소가 낙동강 바로 옆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이곳은 아연광석에서 아연을 추출하

는 제련소로, 제련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황산이 쓰이는, 이런 공해유발 업체가 낙동강 최상류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낙동강을 식수원으로 삼고 있는 1,300만 경상도민들 중에서는 그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모두 다시한번 "지속가능한 개발"이 뭔지에 대하여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겠다.▼

 

 

 

 

 

 

때맞춰 태백시에서는 눈꽃 축제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경하기 위해 영월역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