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사진첩/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B.C트레킹(하편)

*산울림* 2014. 3. 5. 11:11

 

 

 

M.B.C 에서 트레킹 셋째날을 보냈다. 어젯밤엔 몸은 피곤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않아 롯지밖으로 나와

별 구경을 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별들이었다.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과 슬픈 것들이 있고

그 둘이 같이 합쳐져 별이 된다고 한다.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별들이 위치

를 바꾸는 것이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움직였다.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복받쳐오르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내 얼굴에 흘러내리고 내 가슴은 형언할 수 없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흐느끼며 울고 싶었다. 왜 별들을 보면 감정이 축축해지며 옛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별과 인간의 감정과는 어떤 상관관계일까? 많은 시인들은 그 축축해지는 시상을 노래

했을 뿐 그 이유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오늘은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를 만나려 가는 날이다. 온 몸이 쑤시고 결려 옴짝할 수가 없었다. 문득

두고 온 산하에 대한 그리움이 솟았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져 전에 없던 향수에 젖게 된 것이다. 

일이었다. 오늘 트레킹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시작된다.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별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니 하늘 또한 맑은 듯싶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늘 내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던 고산병으로

부터 해방됐다는 점이었다. 일행 중 몇몇 분은 고산병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신기하리만큼 내겐 전혀

티도 없이 고산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건강하게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가는 거다. 안나푸르나를 향하여 가는 거다. "앞으로 갓! 내 머리가 내 다리에게 명령했다.

 

자~! 이제부터는 내 정신을 육신으로,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우도록 하자. 풍요의 여신을 알현하기 위해

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다행히도 "안나푸르나"라는 자연이 주는 뭔가 특별한 기운 때문인수면부족

으로 인해 머리가 띵하고 눈이 침침한 증상 같은 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과연 안나푸르나는 어떤 모습

으로 내게 투영될까? 롯지에 가까워질수록 내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안나푸르나, 그곳은 흰눈 덮인 아득한 설원이었다. 한발 한발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쑤욱 허물어져 가는 지친 몸.

온 세상이 흰눈에 뒤덮히고 말았다. 히말라야 산맥은 온통 설국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춰선 듯..그리고 그 침묵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만이 그렇게

그렇게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드디어 해발 4,130m의 A.B.C에 이르렀다. 목표지점에 오르고보니 나그네의 우수가 물밀듯 스며들었다. 

메마르고 건조해진 내 감성에 촉촉히 물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와 마주하면서 무심(無心)을 익혔다. 명산과 마주하고 있으면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모양

이다. 명상에 잠기기엔 아주 적합한 대상이다. 지치고 닳아진 내 심신이 안나푸르나에 기대면서 맑고 투명

하게 씻겨지는 것 같았다. 해돋이 때의 안나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눈을 아래로 뜬 소년처럼 앳된 모습, 온화하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이런 미소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근원적인 속모습이 아닐까? 평안과 고요를 머금은 잔잔한 이런 미소야말로 인류 구원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아름다움은 자연의 신비일 뿐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향기를 머금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박영석 대장 등의 추모탑 앞에 섰다. 박영석, 안나푸르나 품에 잠들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연과의 싸움이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라고 말했던 그는 결국 그 자신이 산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안나푸르나의

품 속에 잠들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3극점 답사, 7대륙 최고봉  등정 등 세계 최초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서도 세계 탐험사에 유례

없는 3대 난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박영석, 그는 자신 대신 태극기에 싸인 유품과 함께 영정 사진만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단지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등정주의 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를 지향한 산악인이었다. 일

부러 험난한 코스를 택해 한계상황속에서 산을 오르는 고난의 과정에 의미를 두었던 박영석, 우리가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같은 정신때문일 것이다.▼

 

 

 

 

안나푸르나, 이름 그대로 내게는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산이었다. 이곳은 자연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정신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마음을 도드라지게 하는 풍경은 얼마전부터 보기 힘들어진 누군가를 떠

올리게 하였다.

 

흐릿하고도아슬아슬한 아침 햇살의 물결이 도착했다. 바람이 말을 붙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는 눈을 맞추기만 해도  눈 속으로 번저들 설렘과 환상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다. 바로 그가

당신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고요히 흐른다.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구름이란 영원히 흩날리고 찢기는 존재, 구름은 하늘의 바람과 무지개에 쫓겨다니는 존재가 아닌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안나푸르나와 하직하던 날, 우린 하산 길에 귀한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밀림지대에

서식하고 있는 하얀 머리의 원숭이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길조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번 트레킹은 축복 받는

일이 많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무려 12시간의 산행 끝에 오늘 머무르게 될 밤부에 왔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4일째 맞이하는 저녁이었다.▼

 

 

 

 

 

 

 

이끼 묻은 고목나무에 서식하는 난에서 하얀 난꽃이 피었다. 그 진한 향기가 코끝을 황홀하게 자극시켜줬다.▼

 

 

 

 

 

 

 

촘롱에 다시 왔다. 때마침 이곳에서는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있어 식장 안에 들어가 보았다.▼

 

 

하객용 음식으로 양고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4마리의 양을 잡아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주위에선 고기냄새를

맡은 까마귀떼들이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그 음산한 울음을 울어댔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그 모습만큼 칙

칙하고 괴기스런 울음들을 까욱까욱 울어대며 산골짜기를 빙글빙글 돌다가 어느 한곳에 내려앉곤 하였다.▼

 

 

 

 

네팔의 국화인 "란리 구라스"이다. 우리나라 동백꽃과 유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우린 히말라야 산맥에서의 마지막 밤을 첫날 묵었던 지누단다에서 보내고 하산하였다.▼

 

현지민들의 모진 생명을 이어주는 다랭이 논이다.▼

 

 

길가 민가에서 만난 한 집에 거주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다. 모두 형제자매 사이로 길을 지

나는 산나그네들이 던져 준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문득 내 어릴 적 생활이 떠올

랐다. 그땐 우리도 삐삐를 뽑아먹었고, 솔가지를 꺾어 송기를 빨아먹었으며, 솔순은 분질러 입에 몰아

넣었다.

 

찔레순 껍질도 벗겨 먹었고, 뱀딸기도 따먹었다. 하늘과 땅사이를 가득 채운 아지랭이는 끝도 없이

아롱거리는 잘디 잔 어지러움일 뿐이었고, 얼굴에는 마른 버짐이 피거나, 누르께하게 들뜨거나 검게

타들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를 하직하던 날, 카트만두행 쌍발 프로펠러기는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듯

이륙 바로 직전에서야 휘발유가 없음을 확인하고 우리를 몇 십분 가량 인질로 잡아두었었다. 비행기

가 가까스로 포카라의 상공으로 오르면서 나는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작별의 인사를 보낼 수 있었다.

오, 잘있게나, 안나푸르나여~! 

 

 

 

지구의 지붕, 히말라야의 영광을 가진 나라 네팔왕국, 인구 2300만의 147.181㎢ 이며 수도는 인구 70만명의

카트만두이다. 카트만두는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해발1400m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70만명의 사람

들이 중세와 현세,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칸티푸르라는 옛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10세기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라 왕조때부터이다.18세기 후반에 말라 왕조의 뒤를 이은 구르카 왕조가 이곳

수도로 정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네팔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상업. 수공업이 활발하며 주민의 대부분이 네와르족(族)이라고 한다. 귀국길에 오르는 날, 카트만두의 대표적 관

광지인 불교사원 보우더 나트에 왔다. 나는 이곳에 오는 순간,  차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칙칙하고 역겨

워서 애를 태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문화적인 충격이 크면 클수록 영혼에 울리는 메아리 또한 클 수밖에 없다는

을 느꼈다.▼

 

 

타멜시장에 왔다. 길거리에 있는 가게에는 새것과 중고품 등산장비들이 선반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히말라야가 이 나라를 먹여살리고 있구나 싶었다. ▼

 

  

(에필로그)

 몸 길이 43~66cm의 너구리과에 속하는 코아티는 무리지어 생활하며 여행을 즐기는 활동적인 포유동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언젠가 사람들이 이 코아티를 사로잡아 동물원에 수용하면서 코아티는 자유로운 생활

에서 구속된 생활로 환경이 바뀌게 되며, 그때부터 괴로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기 살을 야금야

파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자해를 통해 그 누군가에 분노하고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를 질병의학에서는 소위 자식

증(自食症)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도 지독한 역마살이 뻗쳐있는 한 동물이 동물원의 우리

에 갇혀 갈곳을 모르고 뱅뱅 맴도는 것처럼 그리하여 절망적인 분노에 사로잡히 그 슬픈 짐승처럼 여행의 자

유가 구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이 코아티 같은 불운의 운명을 지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에 무사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다녀 올 수 있었다.지금 이 시간에도 내 마음에 히말라야의

풍경은 잘 다듬은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있는 표현,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강력하고도 절제된 산문같다는 생

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안나푸르나는 때론  슬픔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 같았고, 때론 슬픔을 이기지 못한채 실신한 채로 비를

맞는 여자 같았다. 나는 무모하게도 히말라야와 용감하게 맞서 소리를 지르며 바보처럼 흥청거렸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의 슬픔은 어쩔 수 없었다. 한 주일 동안의 벅찬 환희가 밀려들어 내 가슴을 잊었던 노

래와 지난 날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줬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나는 여행의 기쁨을, 삶의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안나푸르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는 이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네팔에 들어  온 보람이 있었다. 그 동안 사진으로만 대하던 안나푸르나, 이렇

게 현장에 와서 실물 앞에 마주선 그 감동은 내 감성을 한껏 부풀게 하였다.

 

내일부터는 적어도 며칠동안은 세수를 할때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그 무엇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아마도 그것은 안나푸르나를 감쌌던 노을 같기도 할테고, 그곳을 적시던 아침 태양같기도 할 것이다. 어

쨌든 그것은 세수를 하고나서도  한참 동안은 붉게 상기돼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면서 만

나는 사람끼리 다정히, 그리고 진정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인사가 하나 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NAMASTE)" 그리고 또 한가지, ♬넷삼 필리리...띠리리..띠리리.♪

아, 이 아름답고도 애잔한 선율이 산행기를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나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트레킹에 함께

여해 주신 안양산죽회 회원여러분, 반갑고 고마운 여러분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드리고 싶지만 사정

쩔 수 없음을 이해 바라며 거듭거듭 여러분께 감사말씀 전해린다.^^

 

- 트레킹개요

트레킹  일정 : 7박 8일 <2014. 2 .21(금)~ 3.1(토)>

트레킹 시간 : 총 47시간(연 6일간)

                        - 첫날(22일) 6시간, 23일 10시간, 24일 8시간, 25일 12시간, 26일 7시간, 27일 4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