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중편)
트레킹 둘쨋날의 숙박장소인 도반(2,600m)은 안나푸르나 롯지 중에서도 가장 포근한 느낌이 드는 롯지라고 한다.
이곳 도반에서도 셀파들이 정성껏 마련해 준 저녁을 먹었다. 나는 음식에 관한 한 철저하리만큼 토종의 티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해외에 나가면 제일 고민거리가 음식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음식을 골라 먹으면서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 제대로 못 먹거나,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당찮게도 먹을 거 타령이나 일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일찍이 그런 품위와 연민의 높이에 이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곳 히말라야에서의 식사는 전 일정이 한식으로 채워져 있어 전혀 우려할 일이 아니었다. 매 끼니 식사
는 공기밥과 된장국, 그리고 김치에 삼겹살구이까지..이건 일찍이 외국여행에서 누릴 수 없는 일종의 사치였다.
롯지에서 먹는 음식은 그 어떤 진수성찬 보다 맛이 있었고 산나그네의 정신에 더할 나위없는 자양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한 다음,저녁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한 다음,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았다. 나른했다.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환희가 내 몸을 감쌌다. 내 주의의 백색신비가 바로 천국인 듯했다. 내가 느끼는 신선하고
상큼하고 소박한 희열 자체가 하느님인 듯했다.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차푸차례의 신령스런
기운이 내 몸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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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셋째날이다. 트레킹은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린 때로는 밀림 속으로 걸어가기도 했다. 밀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0 시간 가량의 어제의 산행이 몹시 힘들었던 탓인지 밀림 속 산길을 걷는 일이 막막했다. 아득
했다. 그리고 울적했다.
이런 날일 수록 오늘 내게 준 건강과 기량을 부질 없는 일에 탕진하지 말고 좀 더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절절했다.
했다.이 보잘 것없는 내 얼굴이 구름 속에서 환히 그 모습을 드러낸 달처럼 조금이나마 이 세상을 밝게 비춰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건강해야 한다. 몸 못지않게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
지금 그대의 눈에는 무거운 카고백을 등에 업고 힘들게 힘들게 산을 오르는 포터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여기에서
잠시 셀파들에 관한 가슴 뭉클한 얘기를 언급코자 한다. 알려진대로 해발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최
초 등 정자는 두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뉴질랜드의 알피니스트 에드먼드 힐러리와 그의 원정대를 지원한 셀파 텐
징 노르가이다.
인간이 세계의 최고봉을 정복한 빛나는 역사의 뒤안길에는 험로를 개척하고, 캠프를 준비하고, 짐을 나르고 식사
등을 지원하면서도 산악인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셀파들이 있다. 하지만 힐러리와 텐징은 달랐다. 누가 한
발자국이라도 먼저 올랐냐를 놓고 둘은 한결같이 함께 올랐다고 하였다.
그들에겐 삶과 죽음의 고비를 같이 함께 넘긴 동반자로서 한 발자국 먼저 오르고 나중에 오르고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정상 근처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셀파인 텐징이었으며 텐징은
무려 30분 동안 힐러리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다가 함께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결과만 놓고보면 분명 주연은 힐러리이고 텐징은 조연일 뿐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텐징은
조연같은 주연이고 힐러리는 주연같은 조연이다. 우리가 이렇게 무거운 짐을 포터에게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것도 매 끼니마다 아무 걱정없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보다 더 잘 먹을 수 있는 것도 그 뒤안길엔
묵묵히 자기 책임을 다하는 셀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새삼 그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웠다는 말씀을 전해
드린다.▼
우리가 걷는 길목에는 화사한 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 꽃들은 필시 거친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어 안온한 것이다. 때마침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불었다. 이 상큼한
바람을 맞는 것도 나들이의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시간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라고 하잖은가, 힘들고 지친 몸이 어
느새 저 꽃으로부터 위안받고 있었다.▼
피곤했다. 지쳤다. 10 시간여의 어제 트레킹이 부담이 된 듯했다. 오늘 트레킹도 10 시간 이상 소요될 것
같았다. 눈만 감으면 금세라도 잠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지만 병풍처럼 이어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이 있어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린 드디어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했다.▼
편편한 바위에 기대어 땀을 씻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 동안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인생이란 여정도 잠시 쉬며 느끼는 이 흐뭇함이나 편안함 때문에 그 힘든 시절을 참
고 견디는 것이 분명할게다.
그 모습을 상상하노라니 오늘 밤엔 문득 그리움의 등에 고요히 타던 불꽃이 치솟을 것만 같다. 마음 속 깊이
깊이 흐르던 사랑의 용암이 무섭게 분출하여 위태로울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깎아지른 절벽과 만년설로 이루어진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수백 미터의 폭포들이 힘찬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세상에는 거저가 없더라, 꿈도 희망도 사랑도 노력이고 쟁취더라. 이토록 아름
다운 풍경마저도 저마다의 노력으로 존재하고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고 느끼는 것도 노력없인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히말라야, 그 산을 오르다보니 내 마음의 영역을 넘어 속세와 자질구레한 근심을 떨쳐버리고 더욱 고상한
경지로 일상사의 유쾌한 진실에서 험한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깥 속세와는 담을 쌓
고 이 백색의 고원 위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정상의 고결함과 평야의 부드러움을 깊이있게 느껴보고
싶었다.
이곳이라면, 여기에서라면 맑은 정신을 인간에게 걸맞는 종교적 광희(狂喜)로 가꿔갈 수 있으리. 이곳은
험하고 초인간적인 정상도 게으르고 풍성한 평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다운 맛을 잃지 않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곳으로 더도 덜도 아닌 최적의 장소였다. 아,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 고독.. 이 행복..어찌 감
당할꼬.
50대 중년의 아줌들이 산을 오르는 모습은 마치 인생의 오십고개를 넘듯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것이 인생을 아는 사람들의 발길인지 모른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고, 관계를
배우고 그 다음에 다시 자연을 배운다고 한다. 자연을 통하여 높이 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삶의 리듬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만 청춘"인 우리 자신을 "몸도 청춘"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월은 살결에 주름을
만들지만, 우리가 삶의 열정을 상실할 때는 우리의 영혼까지 주름지게 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도 그들의 산
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몸도 청춘, 마음도 청춘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10시간 여의 사투끝에 M.B.C<마차레푸차레 베이스 캠프(3,700m)>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린 곧바로 이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이곳은 구건물이며 우리가 예약한 롯지는 이곳이 아닌 신관이라고 한다. 어두운 날씨 탓에
이곳에서도 이른바 알바를 하고 만 것이다.▼
안개가 급습한 듯 사위가 어두워졌다. 이럴 땐 안개 대신 눈이라도 내려줬으면 미친듯이 가슴이 먼저 눈 내리는
설원의 어딘가를 향해서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아~! 살아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행복감...▼
10 여 분을 헤맨끝에 신관 M.B.C에 이르렀다. 마챠푸차레는 세계3대 미봉이며
아직까지 인간의 발자취를 거부한 미답봉으로 네팔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산
이라고 한다.▼
초라한 롯지 위로 피라미드형으로 우뚝 솟은 마차푸차레를 보는 순간,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히말라야 마차푸차레 앞에 마주선 것이다.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찬
란한 마차푸차레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내 안에서 향기로운 행복이 부시럭부시럭 날개를 펴려고 했다.
이런 산을 항시 마주하고 산다면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