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을 따라서..올림픽공원과 몽촌토성.
10월의 첫째 토요일, 오랜만에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올림픽 공원은 그 동안에 몇 차례 다녀가긴 했지만 그때는
공원에 일부러 온 것이 아니고 다른 일 때문에 왔다가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은 마음 먹고 찾은
공원이기에 몽촌토성을 비롯해서 여기 저기 일삼아 둘러보기로 하였다. 물론 이 짧은 여행의 동반자는 내 집사람
이었다.
올림픽 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가 국가를 형성하는 시기인 3~4세기 사이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
다고 한다.남한산성에서 뻗어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해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축조한 토성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2.5km의 산책로가 꾸며져 있으며 낮은 구릉이 만들어내는 선과 나무의 독특함이 멋진 곳이다.
초록의 동산, 올림픽공원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는 곳이었다. 넓다란 초록숲에서 우린 한 장의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축복의 빛줄기처럼 무량으로 쏟아지는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걷고 또 걸었다.
때맞춰 올림픽공원에는 제13회 한성백제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가을이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라는 말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탐스러럽게 열린 감들이 가끔씩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 커도 커도 이렇게나 큰 손가락은 난생 처음 보았다.▼
고층빌딩과 조화롭게 어울어진 호수를 보니, 외국의 어느 도시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고있다.▼
올림픽 공원의 제9경이라는 "은밀한 대화를 엿듣는 조각품"이라고 한다.▼
우린 봄만 되면 초록이 그리워 한다. 봄 무렵의 방랑은 내장을 파고들 정도로 간절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다가 이유없이 참담하고 슬픈 구석에 나를 쳐박는다. 그러다가 막상 초록을 만나면 힘이 솟구
치다 못해 앓고 만다. 눈부신 초록이 그 앓이마저 없다면 나는 살고있지 않은게 된다.▼
오랜만에 초록이 눈부신 무성한 숲에 오니 물밖으로 뛰쳐나갔던 물고기가 다시 물을 찾아든 느낌이다. 이처럼 때묻지 않은
자연을 개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 삶의 배경으로 삼을때 온갖 현대문명의 질환으로 병든 오늘의 우리가 본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나무와 풀은 비와 바람으로 햇빛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넘나든다. 사람살이도 그렇게 말없이
넘나들며 마음을 전하는 것일게다. 세상에는 거저가 없다. 꿈도 희망도 사랑도 노력이고 쟁취이다. 오늘 저 누런 벼를
보면서 저처럼 아름다운 풍경마저도 저마다의 노력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분다. 이것도 나들이의 행복일 게다. 그래서 여행을 시간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라고 하였던가. 처음으로 대하는 풍경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혹은 100년 후로 안내하곤 한다.▼
오랜만에 수세미를 만난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수세미들도 머지않아 하나 둘 떨어져 나갈 것이다.
길든 짧든 세월이라는 이름으로...아, 세월이라는 시계가 차라리 고장이 나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계라는 기계만 고장날 뿐, 세월은 그래도 흘러갈테지만....
아직은 가을햇살이 따갑다.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햇빛 비치는 길과 그늘진 길을 걷는 것,
어느 길이 좋을까? 어느길을 걸을까? 나는 망설이며 또 힘들어했다. 막연히 두길은 공존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 두 길 다 사랑이었고, 두길 다 내 길이었는데 왜 나는 다른 한쪽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절부절 못했을까?
아래 사진은 백제시대의 움집터였다.▼
(에필로그)
기왕 몽촌토성에 왔으니 한성백제시대에 대한 기초지식을 알아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자료를 올려본다.
아울러 이 귀중한 자료는 "한성백제문화제 추진위원회"에서 구해 온 자료임을 밝혀둔다.
시기이다. 백제는 고이왕(古爾王, 346~375) 대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영토국가로 발전하면서 율령을
반포하고 복색을 제정하는 등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근초고왕은 당시의 대표적 귀족 세력인
진씨 세력 출신의 여자들을 왕비로 맞이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왕권을 강화한 근초고왕은 지방
통치조직으로 담로제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병합하여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영역을 확장하고,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역까지 영향권
안에 포함시키는가 하면, 일본의 규슈 지방과 중국의 요서 · 산둥반도까지 진출하여 중국 내에 백제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또한, 현도군이 물러간 때를 틈타 예성강 유역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지금의 황해도 신계 부근까지 진출하는 등 국력을 사방으로 펼쳤다. 나아가, 근초고왕은 활발한 해
상무역을 전개하여 요서 지방에 무역기지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고,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상업권을 형성하고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
하였다. 당시 일본에게 칠지도를 전해주었다는 사실은 근초고왕 시대의 이러한 강성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침류왕이 죽은 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또한, 아신왕과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해씨세력과 진씨세력이 갈등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성의 58개성과 700여개의 촌락을 잃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사업과 활발한 대중국 외교를 펼쳤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왕마저 전사하게 된다. 이에,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
기게 되니 이 이후를 웅진시대라 한다.
웅진시대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때(475년)부터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꾀하
며 수도를 사비로 옮긴 538년까지의 기간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
주왕자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서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한 상태였다.
비극적인 수도의 함락과 왕의 죽음으로 이어진 천도로 인해 백제는 한 동안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 된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대에는 백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천도 후 대내외적 여건으로
인해 불안정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 온 귀족들이 분열하여 국정을 좌우하던 병관좌평 해구
(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는가 하면,
그 뒤를 이은 삼근왕도 귀족들의 정쟁(政爭)으로 인해 3년 만에 물러나고 동성왕이 즉위하는 상황이 벌어
져 왕권은 강력한 힘을 갖추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게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하면서 백제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상태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성왕(東城王,
479~501)은 신라의 소지왕과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남제(南濟)와 다시 교통을 열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 역시 피살
되고 그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백가의 난을 평정한 무령왕(武零王, 501~523)은 고구려의 군사
적 압력을 물리치고 왕권강화에 힘썼다. 이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중국의 양(梁)나라와 외교를 맺어 국제 관계에서 백제의 위치를 새로이 하였다.
무령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경제력을 보완하기 위해 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
였으며, 유랑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업에 종사하도록 해 생산력 증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동성왕과 무령왕의 노력 등으로 백제는 다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른 성왕(成王, 523~554)은 동성왕과 무령왕을 거치며 이룩한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백제의 중흥과
왕권 강화를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은 국호를 백제(百濟)에서 남부여(南夫餘)로 고쳐, 고구려와 동등하게 부여의
계통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왕은 다시 부흥한 남부여의 정치체제를 반영하여 16관등제와 22부제 등
중앙관제와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익산 미륵사지 건립 등 불교 진흥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중국 남조와 왜와의 친선관계를 강화하였다.
성왕은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위협과 귀족세력의 내분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방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강 하류와 상류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은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차지해 버리자 이에 격분한
성왕이 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말았다.(나제
동맹의 결렬)
이후 위덕왕이 즉위하지만 다시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인
6좌평제가 나타났다.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무왕(武王, 600~641)은 신라에 대한 공격 단행,
익산 천도를 위한 왕궁과 제석사(帝石寺) 건설, 거대한 미륵사 창건 등을 시행하는 등 국력이 회복되어 왕
권을 확립하고 새로운 부흥기운이 있었으나, 익산 천도가 실현되지 못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된다.
그를 이은 의자왕(義玆王, 641~660)이 신라 공격에 열중한 나머지 국제관계에 소홀하고 국력을 소모한 결과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쌓여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송파지역이 나라의 수도가 된 것은 2천년 전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오늘의 서울 풍납동 지역에 도읍을 정했던 BC 5년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두 형제는 건국을 위해 바쳤던 모든 공을 뒤로 하고 남
하하여 지금의 서울 북부지역에 이른다. 온조는 한강 북쪽 위례성(慰禮城)에 자리 잡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에 터전을 잡았다.
그 후 위례성의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본 비류는 부끄러워 탄식하다가 죽었는데, 온조가 그 백성을
받아 온조 14년(BC 5)에 남쪽 이곳 송파지역으로 천도한 후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고 찬란한 문화를 꽃 피
웠다. 온조왕에서 문주왕 원년(475년 도읍)까지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기 전 493년(BC18~AD
475년)간을 [한성백제시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