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2013. 7. 2. 17:39

 

 

안양에서 밤 11시경에 출발한 관광버스가 오늘 백두대간 산행 들머리인 늘재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30분경이었다. 주섬주섬 산행복장을 갖추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 정확히 2시에 늘재에서 어둠을 뚫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사실 오늘 산행은 당초

계획은 비재에서 출발하는 북진산행이었으나 이곳 늘재에서 문장대 구간이 통제구역인

관계로 불가피하게 통제의 눈초리를 피해 남진산행으로 바뀐 것이다.

 

왜 우리가 우리 국토의 등줄기인 성스러운 백두대간 산행을 함에 있어서 언제까지

이렇게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편하였다. '숲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꼭 이렇게 사람과 숲을

분리시키고 폐쇄시키는 방법 밖에 없을까.

 

' 숲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폐쇄하는 소극적인 정책만으로는 숲을 제대로 보존하고 지키고

풍성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한번 심사숙고 해볼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땅의 산길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갈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것인가?'

산행 일시 : 2009. 5. 9(토)

산행 코스 : 늘재~밤티재~문장대~신선대~천황봉~피앗재~형제봉~비재

산행 시간 : 11시간 정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

 

 

오늘 산행 들머리인 늘재이다. 칠흑같은 어둠속이라 사진이 선명치가 않다."늘재"란 길게

늘어 진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 늘재는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재이다.▼

 

늘재에서 밤티재로 향하는 구간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아래 사진처럼 저렇게

굵은 철조망이 처져있다. 이것을 낮은 포복자세로 통과하여야 만 온전히 백두대간 산행을 할 수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

 

아슬아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밤티재를 벗어나려는 순간 사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어렵사리 철조망을 통과하였지만 정작 위험은 이제부터였다. 곳곳에 크나 큰 바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실족이라도 하게 되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다.

이렇게 위험한 길을 무수히 통과하면서 나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와 바위 사이의 개구멍을 숨박꼭질하듯 빠져 나오고 경사진 암벽을 조심스레 지나야 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 구간은 백두대간 종주 도중 여러 번 만나게 될 암릉 가운데서도 제법 험난하기로

손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하물며 우린 칠흑같은 어둠 속에 이 길을 통과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저렇게 좁은 공간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그래도 길은 있었다.▼

 

힘들게 힘들게 네시간쯤 산행을 하였을까? 드디어 문장대에 이르게 되니 때맞춰 우리의 고행을

격려라도 해 주듯 황홀찬란한 붉은 태양이 솟고 있었다.▼

 

우리가 겁 없이 넘어왔던 암릉구간이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코스였다. ▼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문장대에 올라 힘든 표정으로 한컷 땡겼다.▼

 

모두들 힘들어 하면서도 단체사진은...▼

 

문장대는 원래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문장대로 대표되는 속리산은 흔히들 세속을 떠난 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속을 떠난 이 산에도

세속의 흔적은 그 이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을 다스리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문장대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어찌 세속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문장대 정상석 앞에서..

 

선명하면서도 상큼한 인상을 주는 속리산 길라잡이 ▼

 

 

 

 

문수봉을 지나 신선대에 도착했다. 신선대의 모습은 이름과 달리 초라했다. 그 옛날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추고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백학이 깃들고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날씨가 장난이 아닐 정도로 무더울 것 같았기에 준비해 간 물도 보통이 아니지만 만일에

대비해서 이곳에서 거금을 투자하여 생명수를 구입했다. 문장대 휴게실이 경영란으로 문을 닫았지만

이곳은 아직 초라하게나마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다시 발길은 천왕봉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입석대와 상고석문을 지나지만 배도 고파 오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입석대(立石臺, 1033m)는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

한 후 신통력을 얻어 세웠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한다.▼

 

아마 아래 사진이 입석대가 아닐지...안내판이 없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통천문! 물론 내가 작명한 것이다. 왜 저렇게 훌륭한 문을 두고도 소개 글 하나 없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

 

세속이 떠난 산인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058m)에 올랐다. 그러나 작년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분명 표지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표지석이 있었던 곳에 누군가가

철거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표지석이 천황봉(天皇峰)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는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고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다고

한다. 어서 빨리 철거된 장소에 반드시 "천왕봉" 이라고 선명하게 표시된 정상석이 설치되기를 바란다.

 

천왕봉은 세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하고 있다. 조선의 삼대 명수(名水)인 삼파수와 충주 달천수와

한강 우통수(牛筒水) 중 삼파수(三波水)의 발원지라고 한다. 삼파수란 이곳에 내리는 빗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흘러든다는 뜻이다. 천왕봉의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을 살찌우고,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과 하나가 되며 서쪽으로 흘러들은 물은 남한강으로 흐르며 강 유역에 사는

생명들을 살리는 것이다.

 

천왕봉은 이처럼 남한강과 낙동강과 금강이라는 큰 강에 물을 대며 흐르게 하고 있다.

그러니 이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천왕봉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처럼 천왕봉은 매우 중요한 봉우리이다. ▼

 

766년 김제 금산사에 머물던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옛 이름)에 미륵불을 건립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구봉산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낫으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을 떠나'(俗離) 출가하여 진표율사

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俗) 떠나(離) 이곳(山)으로 들어오니 그 후로 사람

들이 이 산을 속리산(俗離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가 세속을 떠난 산, 속리산을 떠

날 차례이다. 천왕봉을 한 참 지나 전망대 바위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산줄기는 너무나 깊고 첩첩하여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천왕봉을 내려와 형제봉(832m)으로 향했다. 천왕봉에서 느끼던 아득함

때문이었는지 바닥 난 체력 때문이었는지 가는 길이 무겁기만 했다. 문득 조금 전 떠났던 천왕봉을

뒤돌아 본다.▼

 

천왕봉에서 두어 시간은 내려왔을 것 같았다. 얼마간을 걷다보니 피앗재가 나타났다.▼

 

피앗재를 지나 지친 몸을 부추겨 형제봉에 올랐다. 다리가 아파 앉는 것 자체도 힘이 들었다.▼

 

형제봉에서 급경사 길을 한 동안 내려오니 갈령 삼거리가 나타났다. 물론 이 길은 작년에도 왔었던

길이었다. ▼

 

우리가 가야 할 비재까지는 아직도 3.6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5킬로미터는

족히 됐으리라..무려 두어 시간을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오르고 또 올랐으니 말이다. ㅠ ▼

 

못재! 이곳 주민들은 이곳을 천지라고 부른다.백두대간 남녘 마루금에서 유일한 못이다. 분수령에

못이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럼 이곳 못재에 관한 전설 한 토막을 들어본다. 이곳과 가까운

상주 땅의 대궐터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나날이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이때 보은의

호족인 황충장군은 삼년산성을 근거로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견훤과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황충은 패하기만 했다. 황충의 부하는 견훤이 못재에서 목욕하면

힘이 강해지는 사실을 알아내곤 황충에게 알렸다.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눈치 챈 황충은

소금 300석을 몰래 못재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은 승리할 수 있었

다고 한다.

 

이 전설은 패배한 영웅은 역사에서 용이 아니라 지렁이로 격하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일러주기도

하지만 예전엔 지금보다 수량이 훨씬 많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을 통과할 때는

물이 말라 있었다.▼

 

비재를 향하여 걷고 또 걸었다. 무수한 봉우리들을 넘고 또 넘었다. 그러나 비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작년에도 갔던 길이었지만 늘재에서 문장대까지 칠흑같은 밤길을 걷는 동안에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된 탓이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 비재의 철계단에 도달해 기념촬영을 하는

순간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흔히들 백두대간 종주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라고 한다. 무한한 인내를 필요로 하고 때로는 절망

감에, 때로는 허탈감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로움에 두려워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간의 마력에 빠저들고 있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할 수

있었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뒷풀이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마저 여느때 와는 달리 무거워 보인다.▼

 

<100대 명산 선정사유>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고

망개나무, 미선나무 등 1,00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지

정(197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법주사(法住寺), 문장대, 천연기념물 제103호

인 정이품송(正二品松) 및 천연기념물 제207호인 망개나무가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