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지리산
지리산 대종주 계획을 세워두고 실행 일주일 전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하루에도 두 어 차례씩
일기예보를 눈여겨 보아왔다. 다행스럽게도 출발 하루전까지도 지리산 전 구간이 맑은 날씨
로 예보되었다. 드디어 벅차오르는 감격을 가슴에 담고 지리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지리산은
백두산의 장엄한 기운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타고 힘차게 흘러와 그 끝자락에서 큰 덩치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산이다.
이렇듯 지리산은 넉넉한 가슴으로 사람들을 단근질하고 진한 향에 취하게 만드는 우리 민족의
명산이기에 흔히들 "어머니의 산" 이라고 부른다. 또한, 지리산은 '지혜로운 이인이 많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지는
산'이라는 뜻으로 지리산(智理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찌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을까마는, 사실 지혜란 특별한 것이 아닐
것도 같다.지혜란 나와 다른 것.. 즉,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저 위대한 자연과 더불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나는 오늘 지혜
롭고 인자한 지리산의 품에 안겼다.
천왕봉을 주봉으로 반야봉(1,751m). 노고단(老姑壇.1,507m) 등 1천5백m 이상의 고봉이
주능선 상에 줄지어 솟아올라 하늘금을 이루는 장쾌한 "꿈의 능선"을 걷기 위해서이다.
특히 내게 있어서는 그동안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하면서 사정상 중간지점인 추풍령에서 시작
하였기에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였었는데 백두대간 종주 산행에 참여한 이후, 오늘 그 시
발점인 지리산에 첫발을내딛음으로써 그 허전함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행 일시 : 2009. 7. 3 ~ 5(1무1박3일)
산행 코스 : 성삼재 → 유평리 탐방지원센타, 대원사버스정류장 ; 41.9 km
성삼재→(2.7km)→노고단고개→(3.2km)→임걸령 샘터→(3.1km)→화개재→(4.2km)→
연하천대피소→(3.6km)→벽소령대피소→(2.4km)→선비샘→(3.9km)→세석대피소 (3.4km)
→장터목대피소→(1.7km)→천왕봉→(0.9km)→중봉(1.3km)→써리봉(1.8km)→
치밭목대피소→(1.1km)→무제치기폭포→(0.7km)→새재 갈림길→(4.4km)→유평→
(1.5km)→대원사→(2.0km)→탐방지원센타, 대원사 버스정류장
산행 시간 : 총 19시간(성삼재~세석: 11시간, 세석대피소~대원사: 8시간)
안내 산악회 : 유명 산악회
지리산은 오랜 옛날인 삼한 시대의 흔적을 많이 지니고 있다. 성삼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 옛날 변한과 진한에게 쫓기던 마한의 왕은 지리산으로 들어와 성을 쌓고 여러 장군들
을 보내어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지명들 속에는 당시의 정황
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즉, 8명의 장수를 보내 지키게 한 곳은 팔랑치가 되었고, 황장군을 보내 지킨 곳은 황영재
라 부르며, 정령치는 정(鄭)장군을 파견해 지키게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바로
이곳 성삼재(姓三재)는 성이 다른(각성바지) 세 명의 장수를 보내 지킨 곳에서 유래된 이
름이라고 한다.
기원 전 78년에 쌓았던 옛 사람들의 흔적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무심한
우리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산행 들머리인 성삼재이다.▼
노고단 삼거리이다. 화엄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
노고단(老姑壇)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면서 탑과 단을 설치하고 천지
신명과 노고 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랑들이 쌓은 탑과 단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초석으로 짐작되는 몇 개의
큰 돌만이 남아있었으나 지난 1961년 7월 갱정유도(1928년 창교된 민족종교)72인이
다시 축조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조성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노고단은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고단은 또 20세기 초반엔 외국의 선교사들이 여름에도 서늘한 이곳에 별장.
영화관. 풀장 등 휴양시설을 지어놓고 여름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폐허만
남았는데 이는 1948년 여순 사건이 터진 후 이곳이 반란군들의 거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국군토벌대가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
사진은 노고단 휴게소이다. 지리산 종주를 준비하는 산꾼들의 분주한 모습이 눈에 띈다. ▼
지리산 종주 능선길에 대한 설명표지판이다.▼
지리산 종주능선길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로 총 25.5km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지리산
능선 어느 지점의 길라잡이를 보든 천왕봉까지 남은 거리만 보면, 노고단에서 그 지점까지
얼마 만큼 걸어왔는가는 역산해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
운무가 짙게 깔려있는 피아골 삼거리이다. ▼
피아골은 이 골짜기에 있는 직전(稷田)마을에서 오곡 중의 하나인 피(기장)를 많이 재배해서
피밭골이라 하던 곳이 피아골로 변한 것이다. ▼
피아골은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도 붉게 물든다 하여 삼홍(三紅)의 명승지로
꼽혀왔다.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 않고는 단풍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조선시대 유학자
조식 선생의 말처럼 피아골의 단풍은 그만큼 곱기로 유명하다.▼
해발 1320미터의 임걸령이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더구나 해드랜턴의 건전지가
갑자기 약해져서 독도에 애를 태우는 바람에 몸과 마음은 더욱 더 젖고 젖었었다.
본격적인 능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임걸령에서 욕망의 찌꺼기들을 흐르는 땀에 모두
다 흘려버리고 싶었다. ▼
해발 1398미터의 노루목이다. 노루가 잘 다니는 길목이라서 노루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몹시 그 유래가 궁금했다. 여명이 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해드랜턴도 필요없었다. ▼
노루목 삼거리. 반야봉을 경유할 것인지, 곧바로 천왕봉으로 직진할 것인지..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날씨가 몹시 흐린탓에 여성의 엉덩이를 닮았다는 반야봉은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전라북도가 함께 만나는 삼도봉이다. 원래는 날라리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상남도 방향에서 한 컷 땡겼다.▼
이번에는 오늘 산행기점인 전라북도 방향에서 한컷 땡겼다. ▼
우리가 가야할 천왕봉은 20.0킬로미터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걸어 온 노고단까지의 거리는
얼마일까? 총 연장 25.5km에서 천왕봉까지의 거리를 빼면 바로 답이 나온다. ▼
반달가슴곰에 대한 주의사항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
화개재에 대한 안내표지판이다.▼
화개재는 지리산 능선에 있었던 장터 중 하나로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배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지역간 도로가 개설되어 사람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고 이곳을 오르내렸을까? ▼
지리산의 겹겹이 쌓인 능선을 거닐다 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주체 할 수 없는 감격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화개재를 지나 한 참을 오르내리다 보니 연하천 대피소를
불과 1km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길라잡이를 보면 분명 내가 걸어 온길에 토끼봉이
있었다.
지리산에는 1500미터 이상의 고봉만도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워낙 많은 고봉이 있다
보니 토끼봉정도는 하찮은 봉우리로 취급받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에
다시 토끼봉을 향하여 뒤돌아 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꿈속의 봉우리 정도로만
기억하기로 했다.▼
연하천 대피소이다. ▼
연하천 대피소의 우물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산이 깊은 곳에는
물도 차고 그만큼 물맛도 좋은 법이다. ▼
우린 이곳 대피소에서 소주와 생맥주를 섞은 이른 바 소맥을 마시고 라면도 삶아 먹고
도시락도 먹는 등 그야말로 포식을 하였다. ▼
3리터용 생맥주 두병을 얼려 이곳까지 가져왔었다. 어깨쭉지가 늘어질 정도로 몹시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만큼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물론 배는 그만큼 무거워졌겠지만..
발길은 이제 벽소령으로 향한다.▼
벽소령 대피소로 향하는 길목에 나타 난 형제봉이다. 형제처럼 버티고 있는 커다란 두개의
바위가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형제의 우애를 시기해서
였을까. 아니면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운무는 짙게 깔려있었다. ▼
벽소령은 아직도 1.5km를 더 가야 한다. ▼
해발 1403미터의 벽소령 대피소이다. 벽소령(壁宵嶺)에 이르러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갈까
했지만 내친 김에 더 가기로 하였다. ▼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세석대피소를 향하여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만 한다.▼
벽소령에서 함양방면으로 향하는 탈출로이다. ▼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로 향하는 길은 참으로 힘든 험로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그러나 힘이 들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꼭 가야 만 할 길이었다. 아직도 그 길은 4.6km나
남아있다. ▼
옛날 덕평골에 화전민 이씨라는 노인이 살았다. 노인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서,
죽어서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고싶어 자식들에게 자신의 묘를 상덕평의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은 그 주검을 샘터위에 묻얻고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자 하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려서 무덤으로 절을 하는 형상이 되어 죽어서
남들로부터 존경 아닌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
선비샘의 유래를 음미하면서 시원한 약수를 마음껏 들이 마셨다. ▼
지리산 국립공원에 대한 개관이다. ▼
칠선봉쯤 될까? 아니면 덕평봉(德坪峰)이었을까? 아무 표지도 없었기에 그저 답답한
마음으로 카메라의 셧터만 눌러댔다. ▼
제법 운치있게 멋진 바위 앞에서 사진은 촬영했었지만, 나는 이곳이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모른다.▼
드디어 1,691.9m의 영신봉(靈神峰)에 도착하였다. 이 영신봉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바로 삼파수이기 때문이다.
즉, 이곳에서 물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낙동강, 섬진강, 금강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
벽소령에서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마의 구간이었다. 가도 가도 끝는 길이었고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는 고개였다. 길라잡이에 있는 세석까지의 거리표지는 이미 신뢰
도를 져버리고 있었다.
더구나 성삼재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이미 온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었기에 더욱
힘들었으리라.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르리 없건만은...." 그랬었다. 이를 악물고 오르고
또 오르고 거닐고 또 거닐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세석대피소가 바로 눈 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다. ▼
세석평전은 자그마한 돌이 많아 잔돌평전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때 남한 땅에서 최고로
명성을 날렸던 철쭉꽃 명승지이다. 세석의 철쭉꽃엔 애틋하고도 슬픈 전설이 담겨있다.
아득한 옛날 지리산 자락에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살고 있었다. 그들에겐 자식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여인은 어느 날 반달곰의 꾐에 빠져 산신령의 금기를 어기고 소원성취를
해주는 샘물인 영신봉 음양수를 몰래 마셨다. 이른 안 산신령은 여인에게 벌을 내렸다.
" 너는 세석평전에서 평생 철쭉꽃을 가꾸도록 하라."
뜻하지 않게 남편과 헤어진 여인은 슬픔을 머금은 채 열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철쭉꽃을 가꾸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철쭉꽃이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청초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믿었다.▼
힘들게 힘들게 세석산장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지친 육신을 지리산 맑은 물에 씻어내고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내일 새벽 제2라운드 산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장박사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지금
밖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화들짝 놀라 밖을 주시해 보니 정말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일기예
보는 비소식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만일에 내일까지 비가 계속된다면 종주 산행에 큰
차질이 빚어질게 뻔한 노릇이었다. 고민거리를 안고 또 다시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떴다. 자동적으로 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렇게나 많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춰지고 그 대신, 수 많은 은하의 무리들이 지리산
자락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세석평전의 여인을 떠올렸다.
어쩜 그 여인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여인은 비가 내렸던 오늘 밤에도 내년 봄을 위해 철쭉나무를 가꾸었을 것이다.
대피소에서의 하룻밤 꿈속에서 문득 그 여인을 만나고 싶어진다.
생각보다 세석산장의 잠자리는 편했다. 제반 편의시설도 아주 훌륭했었다. ▼
세석산장에 있는 정원석, 그러나 이 바위는 자연 그대로인 상태이다. ▼
아침에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고 4시 20분에 숙소를 나왔다. 밖의 기온이 몹시 추웠지만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땀이 유난히 많이 배출하는 나는 30 여분만 지나면
금새 온 몸이 더운 열기에 휩쌓이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간밤에 제법많은 비가 내렸기에 길이 질퍽거렸고 바위가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거닐다 보니 어느새
해발 1703미터의 촛대봉이었다. ▼갑자기 사위가 밝아왔다. 먼동이 트려는 모양이다. 멀리 제석봉이 보인다. 그 너머가
바로 천왕봉이다.
해발 1730미터의 연하봉이다. ▼
연하봉의 웅장한 기암괴석군이다. ▼
장터목은 말 그대로 장이 서던 곳이다. 해발 1,750미터에 어떻게 장이? 하지만 오래전
천왕봉 남쪽의 시천 주민과 북쪽의 마천 주민들은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생산품을
물물교환했다고 한다. 장터목 대피소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마지막 캠프역할을 한다. ▼
세석대피소에서 이곳 장터목 산장까지는 2시간 반 가량이 소요되었다. 바윗길이 미끄러워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장터목 산장에서 식수장까지는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지치고 피곤할 때는 단 몇미터를
오르내리는 것도 귀찮고 힘들다. ▼
해발 1808미터의 제석봉이다. ▼
제석봉 정상은 황량한 고원이다. 무자비한 도벌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웅장했던 원시림이
사라졌다. 사람들에 의해 남벌되고 도벌된 것으로도 모자라 불태워진 산이다.
그래서 제석봉 고사목지대를 흔히 나무들의 공동무덤이라고 부른다. 그 산이 제 상처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동시에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오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벌되고 불에 탄 깊은 상흔들조차도 아름답게 변화시켜가고
있었다. ▼
드디어 통천문이다.천왕봉에 이르는 동쪽 문이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開天門)이고
남서쪽 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인 통천문(通天門)인 것이다. ▼
지리산에 오르면 하늘을 만날 수 있다.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 통천문으로 들어서면
천왕봉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해발 1915미터의 천왕봉이다. ▼
나는 소리 없이 외쳤다. '지리산 천왕봉'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가슴은
쏟아질 것 같은 숨결만큼이나 벅차올랐다. 백두대간의 남쪽 문인 천왕봉에 들어선
것이다. 가슴 떨리는 벅찬 순간이었다. 나는 거칠게 쏟아지는 숨결을 가라앉히며
지나 온 길을 내려 보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장엄한 세계가 펼쳐
있었다. ▼
천왕봉..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광으로 모든 것이
선명치가 못했다.
지금 나는 백두대간 끝자락 가장 높은 위치에 앉아 있다. 살아가면서 아마도 저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저 순간에는 인간의 탐욕도 번뇌도 증오도 다 사라지고
오직 그 순수한 감정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아침 7시정각에 천왕봉을 떠나 대원사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처음으로 만난 봉우리가
해발 1874미터의 중봉이었다. ▼
대원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은 상상을 초월한 험로였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이유를 알듯 싶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해발 1,602
미터의 써리봉이다. ▼
천왕봉을 떠나 온지 두어시간만에 치밭목 산장에 도착했다. 아마 이번 지리산 종주산행
중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될 대피소가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배낭을 털고 또 털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먹어 치웠다. ▼
목적지인 대원사까지는 아직도 5.8km나 남아있다. ▼
폭 40미터 높이 40미터의 삼단 무제치기폭포의 모습이다. ▼
흔히들 말하는 지리산 화대종주, 왜 그것이 힘이 드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머나 먼 길...그것은 무한한 인내가 필요했었다. 천왕봉에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했었더라면 지금쯤 온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유평리라는 글자가 보여 반가움에 잠시 걷던 길을 멈춰섰다. 유평리는 바로
내가 유년기에 보냈던 고향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은 이름을 가진 글씨를 보는 것만으
로도 행복했다.▼
드디어 하산에 성공했다. 나 자신과의 길고도 긴 처절한 싸움이 끝이 난 것이다.
물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말이다. ▼
우린 이곳에서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 옷도 갈아입고 백숙을 시켜 먹었다. 보통 뜨네기
손님들을 상대하는 곳들은 불친절하고 바가지 요금을 받기 일쑤인데 이곳 주인 아주머
니의 친절은 돋보였다. ▼
친절한 주인 아저씨가 관광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태워주었다. 가는 길에 대원사
입구를 촬영했다.▼
<100대 명산 선정사유>
신라 5악중 남악으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노고단(1,507m),
반야봉(1,751m) 등 동서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이뤄 지리산 12동천을 형성하는
등 경관이 뛰어나고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생태계 보고이며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