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날의 산길을 찾아서..(수리산,너구리산,수암봉)
산행 일시 : 2013. 5. 25(토)
산행 코스 : 명학역~ 관모봉~ 태을봉~ 슬기봉~ 너구리산~ 수암봉~ 병목안시민공원
산행시간 : 약 6시간(나홀로 산행)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에서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 보름 정도 빨라졌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만큼 봄이 짧아지고 여름이 길어진다는 얘기이다. 굳이 기상청의 발표가 아니더라도
봄이 짧아졌다는 것은 힘 안들이고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엇그제까지만 해도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 산
행했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한데 아직 5월이 채 가기도 전에 봄은 사라지고 벌써 여름이라니 비정상적인
계절의 변화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계절을 탓할 것만도 아니다. 기실 그 책임은 우리 인간에게 있다. 지구온난화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수 많은 원시림이 한꺼번에 베어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육류소비를 위해 소 사육을 하려고 무분별하게 목초지를 개발하기 때문이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인간의 가장 비이성적인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단촐한 삶, 소박한 생활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포근해야 할 봄철에 무더운 여름을 느끼며 산행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도 아닐뿐더러 전혀
원치도 않았던 바이다. 그렇다고 산행을 멈출 수는 없다. 지난 한 주 역시 내 몸을 내 자신이 아껴주지 못한
것 같아 내 몸에게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다. 몸을 혹사할 때에는 늘 "원만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서.." 라는 구차한 수식어가 붙는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전혀 엉뚱한 말도 아니다.
지난 한 주, 나는 사회생활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했고, 그 술탓에 몸이 지치게 됐으니 이제
오늘은 지친 몸을 달래주기 위해서 산길을 걸을 차례이다. 산악회를 따라 지방산행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지방으로의 오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 또 앞사람의 뒤꿈치만 보며 황급히 걷는 산행 대신에
자연이 주는 풍광을 온전히 느끼면서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현하는 나홀로 산행을 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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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은 명학역에서 출발하였다.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자, 예상했던대로 무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더위가 아니었더라도 오늘 산행은 당초부터 천천히 걷기로 하였다. 30대 초반 적, 떠오르
는 태양처럼 혈기왕성했던 사람이 이제 육신의 나이가 지긋이 드니 낡은 수레를 이끌 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 걸을 한걸음 더디게 산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산행 시작 한 시간 여만에 관모봉에 이르렀다. 관모봉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세월
의 허무만 한아름 안겨졌다. 아~! 나는 이렇게 변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 뿐
이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자연히 놓여있었다. 둘레의 울창한 숲도 그랬고, 목청고운 새들의 지저귐도
그랬었다.
관모봉에서 태을봉까지는 불과 10 여분의 거리에 있었다. 아직은 힘이 남아돌기 때문에 잰걸음으로
태을봉에 이르렀다.
해발 469.3m의 슬기봉이다. 정상 표지판에 기재되어 있는 문구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난데 없이
"거룡"이 튀어나오고 또 "내룡"이 나오기도 하고... 도대체 슬기봉과 이들 용어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문맥의 흐름상 아무 설명도 없이 말이다. 그것도 도지사 이름의 표지판이....
수리산은 2009년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길라잡이도 상큼하게 단장돼
있었다. 힘든 산길을 걷다가도 잘 정돈된 길라잡이를 보면 기분이 환해진다. 마치 내 인생의 참된
길라잡이를 만나듯이....
길라잡이, 요새들어 우리는 그것을 "네비게이션"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생의 네비게
이션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른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사
랑하는 누군가의 등.. 우린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생의 활기를 찾는 것
같다.
슬기봉을 지나 수암봉으로 향하려는데 군부대 철망 옆길에 설치된 길라잡이에 "너구리산 정상"으로 향하는
표시가 있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수리산 능선을 걸었었는데 왜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날씨는
무덥고 몸은 다소 지쳤지만 망설임 없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말았다.
너구리산을 향하여 걸었다. 꽤 어려운 산길이었다. 너구리산, 나는 그 산의 모습을 보고 신음했다. 힘들게 걸어
가는 나를 보고서도 그 산은 어서 달려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들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내 공허한 마음 속에도 불어닥쳤다. 아~! 산들바람에도 내 영혼은 위태위태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해발 308m의 너구리산 정상이다. 산의 높이로만 보면 작은 산같아 보였지만 정작 너구리산은
작지 않았다. 작은 산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구리산은 그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나무 사이로 장엄한 햇살이 쏟아지고, 나는 그 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그만 열린
입이 닫힐 줄 모르고 있었다.
수암봉에 이르렀다. 수암봉은 안산의 큰 산이었고, 산봉우리가 흡사 독수리의 부리와 같다고하여
"취암(鷲巖)이라고 불리었으나 조선말엽에 이르러 산세가 수려하다 하여 "수암봉(秀岩峰)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산은 자연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영혼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마음을 도드라지게 하는 풍경은
언제부턴가 보기 힘들어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아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산새
들도 한 참을 머물다 간다고 한다. 그 새는 좋은 풍경을 가슴에 넣어두고 살다가 살다가 언젠가
짝을 만나면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 가는 것이다.
조금 전에 올랐던 너구리산이 아득하기만 하다.
드디어 지금부터는 하산 길이다. 무더위와의 한바탕 전쟁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길고도 지루한 산길도 이제
내려가면 끝이다.
지친 산행,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 몸은 금방이라도 날을 것처럼 등등해졌고 눈은 가장 멀리볼 수 있을 정도로 씻겨져 있었으며, 심장은 모든 풍경 위로 미끄러져 들어갈 정도로 이완되어 있었다.
산행은 어찌보면 인간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안간힘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산길을 거닐면서 초목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산꽃과도 얘기하고, 저 하찮은 돌무덤과도 속삭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문득 나무가되고
꽃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