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 사진첩/강원권 산행

아~ 천상의 화원, 점봉산 곰배령

*산울림* 2013. 5. 7. 11:59

 

 

산행 일시 : 2013. 5. 4(토)

산행 코스 : 점봉산생태관리센터~ 강선마을~ 곰배령 정상~ 원점회귀

산행시간 : 약 4시간

누  구 랑  :  만나면 좋은 사람들이랑

 

 

천상의 화원, 곰배령..언제 부터인가 늘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던 곰배령.. 그러나, 곰배령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다. 인터넷 예약부터가 쉽지 않았다. 출발일, 출발시간에 배정된 인원 수에 맞게

예약이 가능하지만 그도 결코 쉽지가 않았다.

 

우린 넷이서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예약자가 동행인 2명에 한해 예약이 가능하다는

예약규정에 따라 우선 나는 두사람만 예약하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예약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홈피에는 분명 우리가 출발하고자 하는 시간대에 신청가능인원이 8명이 있었

는데 내가 예약을 끝내고 보니 신청가능인원이 단 한명도 여유가 없었다.

 

예약을 의뢰했던 일행에게 전화를 해보니 예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난감했지만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기다려도 취소자가 없을 시에는 다른 곳으로 여행 방향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두어 시간 남짓

기다리다가 인터넷을 접속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취소자가 발생했다. 재빠른 동작으로 예약을 무사히

마쳤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우린 이른 새벽에 안양을 출발하여 탐방시간인 아침 9시 안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

다. 이토록 어렵사리 시작한 곰배령 탐방은 그 과정이 어려웠던 만큼 값진 트레킹이 될 수 있었다.

곰배령의 이름 모를 수 많은 야생화를 만나면서 정말이지 나는 오늘만큼은 축복받은 사람같았고, 선택

받은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론, 워낙 야생화에 문외한이라서 야생화를 소개하는 안내판과 실제 꽃을 상호 비교하면서도

이게 진짜 그 꽃이 맞는 걸까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었다. 내가 보기엔 그 꽃이 그 꽃 같았다.

어떤 꽃들은 안내판을 못 찾는 바람에 정말 꽃들에게는 한 없이 미안한 일이지만 끝내 이름도 제대로

불러주지도 못하고 눈구경만 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부끄러우리만큼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시골출신

이라는 지리적, 환경적 잇점을 지녔으면서도 그 동안 우리의 꽃과 나무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꽃과 나무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름 모를" 꽃과 나무는 단

한 송이, 한 그루도 없는 것이다.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연을 모르고 그 자연의 모태들을 외면하고서 어찌 좋은

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내 글은 늘 "아름다운 집"을  "화장실"쯤으로 묘사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저 꽃, 풀, 새들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게 이름을 불러주자. 반드시 그들의 고운 이름을 찾아서 불러주기로 하자.

 

유감스럽게도 블로그에 올린 야생화 중 이름을 모르는 상당수의 야생화는 그 이름을 올릴 수 없었으며

또 나름 이름을 찾아 올린 야생화 중에도 그 이름이 혹여 틀리지나 않을 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부탁드리건데 야생화에 관해 견문이 넓으신 분이 불로그를 방문하신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저 아름

다운 꽃들이 섭섭치 않게 제 이름을 찾아주셨으면 한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기에 아침을 거를 수 밖에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또 아직 시간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서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곰배령은 조침령 터널 직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장 곰배령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면 약 2km정도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조침령터널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걸을 때 이미 통과했던 곳이다. 당시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비를 피해 대기하다가 끝내는 산행을 포기하고 별도로 날을 잡아 산길을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드디어 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 이르렀다.

 

 

입산허가증이다. 인터넷 접수증을 제출하면 신분증을 확인하고 입산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

 

 

곰배령은 계곡길로부터 시작된다. 앙상한 나무들을 보니 아직은 겨울의 티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한 느낌이다.

때문에 모처럼 야생화를 만나려 곰배령을 찾았는데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들었다.

 

 

곰배령 가는 길에서 만난 약수터이다.

 

 

점봉산생태관리센터에서 300m를 걸어왔다.

 

 

 

 

 

노루귀꽃인가요? 이그, 꽃에 관한 한 워낙 문외한이라서 안내판과

꽃을 서로 비교하여 봐도 잘 모르네요..^^

 

 

 

 

 

 

 

 

 

 

 

 

 

 

낙엽 틈에서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엘레지꽃

 

 

 

 

금강초롱꽃의 모습이다.

 

현호색의 모습이다.

 

동의나물꽃이다.

 

홀아비바람꽃의 모습이다.

 

회리바람꽃이다.

 

산괴불주머니꽃이다.

 

 

마치 노랑융단이라도 깔아 놓은 듯 노랗게 피어난 야생화가 눈을 밝혀주고 있다.

 

드디어 강선마을에 당도했다.

 

 

 

 

 

 

 

 

 

 

 

곰배령 잣나무 숲이다.

 

 

 

 

 

 

 

 

 

 

 

 

 

 

 

 

 

이제 곰배령 정상은 2.8km를 남겨두고 있다.

 

삿갓나물이다.

 

족도리풀이라고 한다.

 

벌깨덩굴꽃이라고 한다.

 

 

 

 

 

감자난초라고 한다.

 

 

 

 

 

 

 

 

 

 

 

 

 

곰배령 정상 주변에는 아직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곰배령은 엘레지의 천국이었다. 여기저기 산 전체가 온통 엘레지꽃으로 꽃사태를 이루는 듯 했다.

 

 

 

드디어 곰배령 정상에 올라섰다. 생태관리센터를 출발한지 2시간 여만이다.

정말이지 느긋한 산길이었다. 행복한 산길이었다. 더구나 언제봐도 만나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 산길이었으니 말이다.

 

 

곰배령은 곰이 하늘로 향하고 누워있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어 곰배령이라 불리어 진다고 한다.

나무테크에 누워 곰배령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너무 아름답고 평화

로을 것만 같았다.

 

곰배령 트레킹, 그 동안의 산행이 앞사람의 뒷꿈치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걷는 산행이었다면

오늘 곰배령 트레킹은 마음 가는대로, 눈길 가는대로 맑은 계곡수와 산새들의 지저귐 등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야생화에 흠뻑 빠져 걷는 꿈길같은 산행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것 같았다.

 

곰배령 트레킹을 마치고 우린 화진포로 이동해서 김일성 별장을 둘러봤다. 본 별장은 한국전쟁 이전에 북한

지역으로써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공산당 간부들의 휴양지로 사용했다. 1948년 부터 6.25남침 이전까지는

김 일성과 그의 처 김 정숙, 아들 김 정일, 딸 김 경희 등이 하계휴양을 했던 곳으로써 당시 지상2층,지하

1층 건물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육군에서 훼손된 본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재건축하였으며, 1995년 육군 복지단에서

개.보수하여 장병휴양시설로 운영하여 오다가 1999년 7월 육군에서 기존의 건물을 용도변경 개수하여 역사

안보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 일성 별장에서 내려다 본 바닷가의 모습이다.

 

 

이기붕 별장은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로써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이후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나 1999년 7월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개수되어 관람객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이 기붕은 미국 유학시절 이 승만과의 인연으로 귀국 후 제2대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권력의 핵심

에 접근하게 되었다. 1949년 6월 서울시장에, 1951년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52년 3월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53년 자유당 총무부장에 임명되면서 정치깡패들을 이용해 각종 정치집회를 조직했고 1954년

부터 자유당 전성시대를 열어 권력의 2인자로서 독주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

통령 선거에서 이 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하여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참관인 불법

연행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는 3.15부정선거를 저질렀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마산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김 주

열 군의 시신 발견과 경무대 앞 시위군중들에 대한 발포 사건으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결국 4.19혁명은 부정부패와 불법으로 얼룩진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 기붕은 4.19혁명으로 이 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게 되자, 피신해 있던

경무대에서 맏아들 이 강석의 총격으로 전 가족이 사살되므로써 권력의 2인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그의 정치역정을 마감했다.

 

 

이 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이다. 사진은 이 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코 여사와의 단란한 한 때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