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사진첩/복습구간

제3관문~신선암봉~조령산~이화령

*산울림* 2013. 2. 25. 11:28

 

 

산행 일시 : 2013. 2. 24(일)

산행 코스 : 조령3관문~깃대봉~치마바위봉~암릉지대~신선암봉~조령산~이화령

산행 시간 : 약 6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 산악회

 

오랜만에 대간길을 따라 나섰다. 비록 한 구간이나마 한동안 내 시야에서 비껴나가 있었던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다시 걷는다고 생각하니 겨울앓이를 하느라 수척해진 내 가슴에 잔잔한 

설레임이 일었다. 결코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세월을 두고, 지난 날 우리가 걸었던  길..

그길 위에는 분명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남아있으리라.

 

 버스에 몸을 싣고 어디메쯤 달리니 어둠이 걷히며 뿌옇게 밝아오는 아침 해의 아름다움에 취해

버렸다. 순간, 한 평생의 삶이 활동사진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 삶이란 태어

나서부터 이렇듯 먼 곳으로의 끝 없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 여행 중에 어느 날 억겁의 인연으로 아

름다운 산과 벗들을 만남으로 해서 삶 자체가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매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어떤 경우에도 산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산행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계속되는 산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서이다. 오늘도 역시 산행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백두대간이라는 성스러운 산길을 찾아 집을 나섰다. 내게 주어진 결코

짧을 수 없는 단 하루의 여정일지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산길을 걷기로 한다.

 

 

 

오늘 산행은 새재에서 시작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바라 본 신선봉의 표시석이

아침햇살에 눈부시다.▼

 

 

과거(科擧)길이다.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

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든 과거 길이다.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지닌 문경(聞慶)이란 지명의 이름에 기댄 속설인듯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혹시라도 닥쳐올지도

모를 낙방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었으리라.

 

 

 

 

조령관(제3관문)의 모습이다. 나는 그 동안 백두대간이다 명산 순례다 해서 무수히 새재를 넘나들었다.

그때마다 새재, 혹은 조령(鳥嶺, 650m)에 얽힌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잊

어서는 안될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새재에 얽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몇번을

들어서라도 잊혀지지 않아야 할 그 이야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변방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장군은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기마병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왔다. 작전회의에서 새재에 진을 치자는 의견과 협소한 새재에선 기마병이 힘을

못쓸 것이란 의견이 갈렸다. 기마병을 믿었던 신립은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널찍한

평지에서 전투준비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전날에 비가 내려 보병도 기동이

힘든 진흙탕이 되었다.진흑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조선의 기마병들은 왜군이 가진 소총의 표적이

되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선조는 결국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호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새재는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조령약수. 조선 숙종 34년 조령성 구축시 새재정상에서 발견된 이 샘은 행운의 꿈을 안고 한양 길을

넘나들때 타는 목을 식혀주는 역사 속의 병약수로서 사철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물을 즐겨마시면 백수영천

(百壽靈泉)이라고 했다.  이 백수영천에서 마음을 씻고 산길을 따라 걸었다. 이 샘물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혼탁한 이 사회의 어딘가에도 한 가닥 맑은 샘물이 솟아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잃어버린

맑은 영혼을 일깨워줬으면 좋겠다.

 

 

아직 산길은 하얀 눈이 뒤덥혀 있었다. 오늘 산행이 만만치 않다는 걸 예감케 해주고 있었다.▼

 

 

깃대봉 삼거리였다. 깃대봉은 대간 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지만 춥다고해서 힘들다고 해서

알현(謁見)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진정한 산꾼의 자세가 아닐성 싶었다. 물론

깃대봉은 몇 년전에도 다녀 왔었던 곳이다. ▼

 

 

해발 835m의 깃대봉이다. 뒷쪽으로 신선봉의 장쾌한 능선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지나온 능선을 되돌아 본다. 가까이는 부봉의 멋진 봉우리들이, 더 멀리는 포함산도

보이고..지난 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온 백두대간의 마루금들이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내 곁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앞으로 가야 할 능선이다.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펼쳐지는 산줄기의 바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였었다. 스스로 자(自)와 그럴 연(然)이라는 두 글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스스로 그러한 것"

바로 자연인 것이다. 우린 생활 속에서 늘 자연스러움을 원하고 부자연스러움을 탓다. 맞는

말이다. 자연은 곧 순리이다. 순리를 따르면 절대 부작용이 없다.순리를 외면하는 사람들, 그들의 주

위는 늘 불안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

 

 

 

 

겨울 산은 확실히 힘들다. 눈이 있어 진행 속도가 더디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뿌듯함이 있고

성취감이 있어 좋다. 오늘 거닐던 겨울 조령산, 절벽처럼 깎아내린 듯 매끄러운 바위들이 보기에도

위태로웠지만 주변의 조망만은 일품이었다. 조령능선은 백두대간의 정통성있는 맥으로서 너무도 당당

하고 억센능선이었다.▼ 

 

 

 

 

 

 

 

 

오늘은 겨울 햇살이 투명하게 맑은 날, 신선암봉의 너른 바위가 우리를 반가이 품어주던 날,

오랜만에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걸으며 벅차게 타오르는 그리움을 감당할 수 없어 가슴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해발 937m의 신선암봉은 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온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은 암봉이었다.

 

 

도회지의 큰 길과는 달리 아직도 산길은 흰 눈 덮인 아득한 설원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쑤~욱 허물어져 가는 지친 몸..조령산으로 향하는 흰 눈 뒤덮인 길은 고요했다. 이 세상

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춰선 듯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이 그렇게 그렇게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조령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소백산맥의 줄기에 우뚝 솟은

천하의 명산 조령산은 우리가 산으로 드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정상에 다다른

듯하면 또 내림길이 있었으며 내림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봉우리가 하나 더 솟구쳐 있었다.

마치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하는 듯 했다.

 

그렇게 몇 차례를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산은 정상에 오르는 길을 허락하여 주었다. 조령산

(鳥嶺山, 1025m)은 충청북도 괴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경계선상에 위치

있다. 주위에 신선봉(神仙峰, 967m)과 주흘산(主屹山, 1106m)을 거느리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월악산, 문수봉, 소백산 등으로 이어지고 남쪽은 속리산으로 이어진다. 

 

 

 

산 정상에는 몇년전에 있었던 바로 그곳에 새롭게 단장된 모습의 추모목이 있었다. 조령산을

발판으로 해서 산악인이 된 후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추모목이었다. 그녀는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

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겼었다.

 

 

 

 

전문 산악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주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것 보다 여성 산악

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야 했다고 한다. 슬픈 현실

이다. 1993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으로 뽑히면서 그녀는 숱한 차별과 좌절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였다. 훗날 지현옥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에서는 넘을 수 없는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좌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겨내고서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견딜만 했다.

여자끼리만의 오기로 뭉쳐진 팀을 이끌었고, 나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견뎌내게 하는데 성공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기에...자신과 함께 했던 여성대원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기에....녀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고개 숙였다. 마음 속으로 부터 기도하고 싶었다.

 한참 동안을 추모했다. 장한 여성 산악인을 위해 추모했었다.

 

그런데, 어떤 산객들은 이런 추모 분위기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웃고 소리지르고 게걸

스럽게 먹어대며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추모목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힘들게 힘들게 걸어 온 조령의 정상에서 장시간 산행에서 오는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고자

했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웃고 떠드는 대신, 그녀의 넋을 기려 줄수는 없는 것일까? 더구나 우리는 산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일텐데...^^

 

 

 

맥 잃은 태양이 멍청하니 떠 있는 한낮에 맞이하는 조령산의 겨울은 높은 산에서 빚어

낼 수 있는 가장 장엄한 풍경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제 산행 날머리인 이화령까지

는 불과 50분이라는 시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조령샘의 맑은 물에 마음을 적시며 목을 추겼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 성을 쌓을 때

발견되었다는 조령 약수였다. 사시사철 마르는 법도 없고 많이 마시면 장수를 한다고 하여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고 불렸다는 약수이다. 조령산을 넘어오며 흘린 땀방울이 모두 씻겨

나가는 듯했다.

 

 

 

 

 

 오늘 산행 날머리인 이화령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굳건한 뼈대인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줄기에

수많은 고갯길을 만들었다. 바로 지척에 있는 하늘재도 그것이고, 지금 내려온 이화령도 그것이다.

세력확장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화합을 위해 문물과 사람 살아가는 정을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로 활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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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등줄 백두대간은 곳곳이 끊겨져 있다. 석회석을 캐기 위해 멀쩡한 산을 파헤치고,

철도에 깔 자갈때문에 산을 절단 내었고..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혹은 휴양시설을 갖추기 위

하여 무자비하게 대간 마루금을 파헤쳤다.자연은 자연 그대로 일 때가 아름다운 법인데도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비이성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단절된 이화령이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기왕 내친

김에 백두대간의 모든 길들이 하루 속히 복원되기를 바란다. 국가가 나서고 백두대간의 마루금

을 지리적으로 관할하는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우리 민족의 성

스로운 혼을 찾는 길에 적극 나서주기를 바란다.

 

또한 산을 사랑하는 우리 역시 더 많이 깨닳고 더 많이 실천해야 한다. "아니간듯 다녀가시옵

소서~~" 산길은 늘 이런 마음으로 거닐어야 한다.

 아래사진은 단절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깔끔하게 이어놓은 이화령의 모습이다.

 

(에필로그)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지친 육신을 이끌고 수백의 봉우리들을 넘고 또 넘어왔다. 때로는

천둥 번개가 치는 폭우 속을 뚫고, 때로는 폭설을 맞으며 살인적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우리가 걸어 온 길에는 위험천만한 암릉지대도 있었고, 출입을 가로막는

통제구역도 많았다. 

 

육십령에서 할미봉 구간도 위험했고,늘재에서는 출입을 막는 철조망을 낮은 포복으로 통과하여

험란한 암릉구간인 밤티재를 지나 문장대에 이르기도 하였다. 대야산의 직벽 내림 구간도,

은티재에서 희양산에 오르는 3단계 오름길도, 그리고, 새재의 제3관문에서 신선암봉과 조령산

이르는 길도 험란했다.

 

또한, 지난 달에 통과했던 점봉산에서 한계령에 이르는 구간도 그리 순조로운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간의 마루금이라고 해서 어찌 험란하고 어려운 길만의 연속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이른 새벽녘에 산길을 걸을 때는 별들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었고 만삭이 된 둥근 달과도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세상을 밝히려 황홀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도, 아름답게 적멸(寂滅)하는 저녁

놀의 여리고 순한 잔영도 보았고, 이름 모를 잡초들의 향연도, 영롱히 빛나는 상고대의 찬란함도 맛

볼수 있었다.

                                                         

                                                                      - "산 안에 내가, 내 안에 산이" 중에서.... ☜

 

 

 오늘 백두대간 마루금은 산세가 거칠고 암봉이 많아 난이도 면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백두대간의 여러 위험 구간 중 손꼽히는 위험구간이다. 뿐만아니라 산길에 하얀 눈이 뒤덥혀 있어 산행

이 그만큼 힘이 들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전원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흐뭇하기 이를

데 없다.

 

흔히들 "현대인들의 불행은 감탄사를 잃어버린데 있다."고 한다. 감탄의 대상은 물론 자연이다.

그 잃어버린 감탄사를 찾기 위해서라도 우린 자연친화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의지해야

것은 현대의학이 아니라 자연의 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만 봐도 대자연의 품속에 있는 산길을

걷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걷는 여러분들은 쉽사리 감탄사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뒤돌아보면, 우린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갖고 싶은 것 마음대로 갖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아온

것만 같은 지난 날의 모습들이 그저 눈물겹기도 할테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길섶의 모든 작은

생명들에게도 다정히 눈길을 주며 때로는 높이높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 깊이 잠기는 삶의 리듬을 찾아

심연 속에 갇혀 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지지 않도록 하자.

 

오늘 우리는 드러누운 들풀에서도, 키 작은 철쭉나무에서도, 웅크린 곰 같은 바위에서도 겨울 조령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볼 수 있었다. 이 감격을, 이 황홀함을 오래도록 간직해 두자. 그리하여 잃어버린 감탄사를 어서빨리

되찾도록 하고 동시에 언젠가는 세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내 모습에 대한 밑그림도 그려보도록 하자.

이 작은 글이 계속해서 대간길을 걷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