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세계/산문집

어느 재소자의 편지(2)

*산울림* 2011. 11. 22. 10:55

 

 

이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조금은 기분이 묘하다. 과연 내 글이 이런 편지를 받을만한

자격이나 있는 글이었는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처음 등단시에 등단소감

에서도 피력했듯이 바로 이런 사례들이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며 또한 보람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더 용기백배하여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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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판섭 국장님께

보내주신 책,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국장님의 책 속에서 저 역시 가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이들이 둘 있습니다. 아

직 어리지요. 저 역시 사십대가 되진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대기업에서 최연소 진급으로 과

장도 되어보고 서른에 해외지사장도 해보았지요, 사업이라고 한다고 몇 년을 지내오다 결국

모든 걸 다 잃고 감옥에까지 오고야 말았지요.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지요. 그동안 잊고 지내오던 것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

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족이란 존재... 피붙이...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산과 길... 세상엔 수많은 길들이 있지요. 나의 길, 남의 길, 차가 다니는 길.... 수많은 길 중

에서 모두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요. 누구나.

 

저 역시 산을 참 좋아합니다.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결심을 해야 될 때... 혼자이고 싶을 때...

항상 산은 각각의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특히나 지리산을 좋아하지요.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가져본걸 그리워 하는 사람과 갖지 못한 걸 상상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국장님은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 여기시나요?

 

인간미 가득한 글 잘 보았습니다.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고 수수하게 본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작가의 마음이 잘 묻어나더군요. 한자 한자, 글 하나에 어떠한 심경이셨을지 감히 느껴봅

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뜻밖이였습니다. 책을 보내주시리라곤...

 

저 역시 책을 읽는 것과 무언가를 적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만 모든 걸 잃고 이곳에 오다보니

책 한권사서 보기가 어려울 만큼 경제적 여건이 따라주질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

다. 그래도 국장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그 시간이 또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행복

하기만 하네요. 언제나 좋은 글로 세상에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기쁨, 때론 안녕을 주세요.

늘 건강하세요.

 

                                                                                       2000년을 열한 해를 보내고

                                                                                                              열두 해를 눈앞에 두고서

 

                                                                                강 ㅇ ㅇ 드림

 

p.s. 그동안 제가 적은 볼품없는 글 중에서 한편 보냅니다. 읽어보시고 감히 평을 부탁드립니다.

 

 <매실이 익는 동안...>

 

지난 5월,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형식적인 결혼식 절차가 대충 마무리될 무렵 사회자

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신랑이 진지한 얼굴로 신부를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노래 여운이 은은하게 장내에

퍼진 가운데 신랑, 신부는 마주잡은 손으로 케이크를 커팅하고 샴페인 잔을 들어 러브 샷을

했다. 러브 샷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의 러브 샷을 보니 문득 몇 해 전 부모님의 금혼식 날이 떠올랐다. 금혼식이라고 음식점에

서 샴페인과 케이크를 준비해 주었다. 술을 따르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자 종업원이 이럴땐

러브 샷을 하는 것이라며 두 분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물론이고 손자, 손녀들도 입을 모아 할아버지, 할머니 러브 샷!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우리는 못이기는 척 두 분이 러브 샷을 할 줄 알았다. 원래 그런 이벤트에 익숙

해 있지 않은 분들이긴 했으나 다그치는 손주들 성화 때문에라도 팔을 끼고 마시는 시늉은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살면서 정말 서운했던 어느 순간이 떠올랐던 것일까. 어머니는 단호하게 러브 샷을 거부하

셨다. 부끄럽거나 쑥스러워 그런 것이 아닌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결연한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십여 분 동안의 실랑이에도 두 분의 러브 샷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질 뻔 했으나 곧 누군가가 주도한 건배제의로 유흥 자리는 계속되었다.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모님께서 무안해 할까봐 필요이상으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 갑작스런 병환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얼마 전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저 그냥 모른척하고 해줄 걸 하고 말씀하셨다.

 

50년 살면서 팔짱끼고 그렇게 한 번도 안 살았으면서 남 보는 앞이라고 팔을 쭉 내미는데

그때는 그게 너무 밉더라. 그래서 하기 싫더라. 러브 샷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하신

 말씀이었다는 걸 나는 금방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 앞에서 그 한마디를 내뱉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 후회하며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으셨

을까 싶어서였다. 금혼식이라니.. 아직 그 반의반도 못해낸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월이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익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이 포도주처럼 익는다는

것. 좋고 싫고 벅차고 힘들었던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더욱 깊어진다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러브 샷이라는 간단한 행위조차 하기 싫었던 인생의 어느 순간마저 어머니는 함께

묵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억, 좋은 향기만으로 인생이 익어 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매실이 있었으니 가지고 가라는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매실은 지난 6월에 뜨거운 여름햇살

아래에서 온가족이 벌레와 사투를 벌이며 딴것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돌볼 사람이 없어

수확량은 적었지만 매실은 햇살과 바람만으로도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농약을 치지 않아 더욱 기승을 부린 벌레들 때문에 얼굴에 양파 망을 뒤집어쓰고 땄으나 얼굴이

울긋불긋해서 그 후로 피부과에 일주일이나 다녀야 했다.

 

100일 동안 밀봉되어 있던 항아리 뚜껑을 열자 여름날 눈부셨던 초록매실은 할머니 피부처럼 쭈글

쭈글해져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매실이 익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무에서 받았던 바람, 비, 햇볕 그리고 어둠과 달빛까지 그 모든 것들을 비틀고 버무려 매실은

투명하고 맑은 엑기스를 항아리 가득 만들어 내어 놓았다.

 

매실을 딸 때에도 유난히 향이 진해서 집에까지 그 냄새가 따라온 기억이 난다. 항아리에서

익힌 매실은 10월의 햇살처럼 짙고 농염하다. 비료도 없이 잡초, 벌레와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그 만큼 내공이 쌓인 건가 싶다. 잘 익은 매실이 가을내를 더욱 짙게 하는 오후, 신혼여행을 다녀

온 그들에게 진한 매실차 한잔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