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 사진첩/강원권 산행

마대산(강원 영월)

*산울림* 2011. 7. 25. 11:09

 

 

마대산, 근래들어 여기 저기 산악회에서 여름산행으로 빼놓지 않고 다녀오는 산이다.

내가 소속한 몇 몇 산악회에서도 이미 다녀 왔었지만 나는 그때 마다 다른 산의 산행과

겹치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동참할 수 없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오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마대산은 김삿갓 산소가 발견되고 지자체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산꾼들의

이목을 집중시겼던 산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지만 먹을 게

있는 지, 없는 지 일단 한번쯤은 다녀와 봐야 할 일이었다. 더욱이 평소에 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인 나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인 코스가 아닌가 싶다.

 

다행히 영월은 지난 번 태화산을 갈 때 이미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녀왔던 곳으로 우리

집에서 두 시간 남짓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서울에 거주하는 직원들은 동서울에서 개별

출발하고 나는 수원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출발하여 일단 영월터미널에서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산행  일시 : 2011. 7. 23(토)

산행  코스  :  노루목~ 마대산~ 처녀봉~ 김삿갓묘

산행 시간 : 약 4시간

함께한 사람 : 회사 식구들

 

 

영월 버스 터미널이다. 아침 7시, 같은 시각에 수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동시에 출발했지만

내가 도착한 시간은 9시 5분전이었고, 서울 팀이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가까워서였다. 무려

1 시간 가량 차이가 났다. 역시 교통면에서만 본다면 서울은 매력이 없는 도시였다. ▼

 

 

 

영월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마대산 들머리인 김삿갓 공원에 도착했다. "詩仙金삿갓蘭皐先生

遺蹟碑"가 세워진 주위를 서성거리며 삿갓을 떠올려 봤다. 혹자들은 김삿갓을 유교풍의 전근대

적 이념의 우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조선 후기나 말기에 탁월한 선비들처럼 변화를

향한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인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랬었다. 그의 시(詩)에는 재기 넘치는 말장난으로 가득찬 조소와 풍자, 풍류만이 있다. 그토록

예리한 감성과 그가 살았던 19세기라는 시대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번뜩이는

인식이라든가 비전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배웠던 학문이 실학이 아닌 전통 유학이라 더 그랬겠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렸을 것이다. 

스스로 아직 체제 안에 있다고 여기는 자들만이 체제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고  대안을 희망한다면,

그는 이미 그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 갑"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같지 아니하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인가 하노라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 것이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물 빛내누나...▼

 

 

 

 

 

 

 

약숫물이 차고 맛있었다. 걸쭉하게 한 잔 들이키고 본격적인 산길에 접어들었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맑은 계곡수가 흐른다. 이름하여 "김 삿갓 계곡"이었다.

저 계곡을 중심으로 좌편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이고, 우측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이다. ▼

 

 

 

날씨가 무척 무덥고 후덥지근했다. 마대산은 바람 좋은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처럼

습하고 무더운 날에 즐겨 오를 산은 아니었다. 계곡 좌편에 단양군 영춘면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역시 계곡 우편에 영월군 김삿갓면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원래 이곳의 행정구역은 영월군

하동면이었는데 2009년 김삿갓면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살아생전 내내 일정한 주거 없이

길 위를 떠돌던 영혼의 이름을 무덤을 빙자하여 사로잡으려는 지자체의 몸부림이 안쓰럽고도

안타까웠다. 

 

유적은 보존하고 기려 마땅하지만 김삿갓을 특정 지역의 인물로 전유하려는 태도, 그것은

명백히 김삿갓 정신에  대한 부정이고, 모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아직도 "하동면"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동면"과 "김삿갓면",

글쎄 편견없이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하동면"이 훨씬 나을 듯 싶었다.▼

 

 

 

마대산 정상은 2.3km를 남겨두고 있었다.▼

 

 

 

김삿갓의 생가였다. 과연 이곳이 처자식 뿌리치고 그가 가출하기 전에 함께

살았다는 곳일까? 첩첩산중에 있는 집 치고는 깨나 운치있는 집이었다. ▼

 

 

 

뒷간이었다.▼

 

 

김 삿갓 일가의 삶의 터전이었을 텃밭이었다.▼

 

 

집 앞으로 시냇물도 흐르고 있었다.▼

 

 

난고 김삿갓 주거지에 관한 안내문이다.▼

 

 

 

김삿갓 조형물 곁에서 한 컷 땡겨보았다.▼

 

 

 

난고당이었다. ▼

 

 

 

 

난고당에 걸린 김삿갓의 초상, 누가, 어떻게 그려낸 걸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날카롭게 바라보는 눈매와 은근한 냉소가 감도는 입매가

인상적이지만, 단정한 시골 훈장님이나 깐깐한 성품의 선비 모습이라면 모를까

그것은 결코 방랑하는 한 인간의 초상이 아니었다. ▼

 

 

 

김삿갓 생가를 둘러보고 다시 산길에 접어들었다. 마대산 오르는 길은 된비알 구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랐다.  땀을 너무 많이 흐른 탓에 사타구니 주변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여름산행때면 나타나는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

 

 

 

해발 1,052m의 마대산 정상이었다. 일행에 앞서 혼자 정상에 먼저 도착했다.

약 20 여 분 후에야 일행이 도착했다. ▼

 

 

 

 

 

 

 

정상 주변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총각봉을 지나 처녀봉으로 향했다.▼

 

 

 

 

 

처녀봉 정상이었다. 처녀봉, 총각봉...산 봉우리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하산 역시 나홀로 했다. 김 삿갓 계곡 어디쯤에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왔지만 아직도 일행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김삿갓 묘역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난고정이었다. ▼

 

 

 

 

 

김삿갓은 한평생 떠돌던 장성한 아들이 몇 번 찾아왔으나 번번히 도망쳤다고 한다.

그가 전남 화순 동복에서 죽어 묻히자 비로소 아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마대산 자락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가출 이후, 그는 살아 생전 가족과 함께하는 이 세상에

속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폐족 여부를 떠나 자신이 한 때 몸 담았던 가문까지, 양반사대부의 조선사회에 대한

환멸이 그만큼 컸다는 뜻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김삿갓 묘소이다.▼

 

 

김삿갓 묘소에서 내려다 본 김삿갓 공원의 모습이다.▼

 

 

 

조선 말엽,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양반..  그는 세도가 안동 김씨면서도 멸문을 겨우 면한

폐족이었다. 신분상승을 향한 욕망 집요했기에, 완고하고 부패한 봉건 조선이 요구하는 충효

이념을 누구보다 충실히 입증하고 싶었다.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믿어마지 않았던  회심의 일필은 양반사회의 비겁한 배신자를

엄중히 탄핵하는 결기로 충만했고, 충성심이 돋보인 그는 양반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선택되는 듯

했다.  절치부심 자식을 키워온 어미의 바램대로 과연 그는 재능과 신념이  출중했던 것이다.

 

허나, 정작 그는 자신이 누군인지 몰랐다. 몰락해가는 조선왕조처럼, 치명적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숨겨온 그 어미의 치명적으로 무지한 아들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을 때 그는 자신과 함께

지금까지 알아왔던 세상 모두를 잃어버렸다. 그가 설 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

 

 

 

 

 

 

 

 

 

 

김삿갓 공원을 나와 계곡 건너에 위치한 김삿갓 문학관을 들르기로 하였다.▼

 

 

 

 

 

정방(淨房)이다. 화장실의 더욱 순화된 다른 이름이었다. ▼

 

 

 

 

 

 

김 병연이 삿갓으로 해를 가리고 얼굴을 가리는 것은 명백한 자기부정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며 번개처럼 엄습했던 정체성은 그가 가족을 등지고

집을 나섰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길 위의 그는 더 이상 중세인도 근대인도 아니었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

따위는 이미 그의 몫이 아니었다. 자기를 부정하며 떠도는 자의 모습,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 되뇌이지만 끝내 길 위에서 조차 사라지지 못하는 그림자같은

풍경,  그것은 차라리 현대인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상 조선의 자식이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그였지만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세상 바깥의 또다른 세상에서 노닐 수도 없었다. 아주 떠날 수도

돌아올 수도 없었던 그는, 어쩌면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이 태어나고 떠나왔던 세상 가장

자리를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그는 길 위에 있었고, 죽은 후에야 자식은 그의 몸에 다가설 수 있었으니,

살아 스스로 지워버린 존재는 죽어 누군가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 셈이었다. 

 

 

 

 

 

 

 

 

 

 

 

 

 

 

 

 

 

삿갓공원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 하나를 음미해 보았다.

역시 방랑시인 김 삿갓 다운 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