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사진첩/천왕봉~추풍령

신풍령~삼봉산~소사고개~삼도봉~대덕산~덕산재

*산울림* 2010. 2. 7. 12:10

 

 

 

실로 3주만에 재개하는 백두대간 마루금 걷기이다. 출발 전에 미리 오늘 걷게 될 구간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대개의 백두대간 마루금이 그렇듯이 오늘 구간 역시 결코 만만찮은 산길이었다. 물론

나는 그 동안에도 쉼 없이 산길을 걸었었지만 딱 3주만에 산길에 들어서는 막내이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제아무리 혈기 왕성한 열혈남아라고 하여도 운동을 안하다 하면 그 만큼 힘이 드는 법이다.

 

 

산행 일시 : 2010. 2. 6(토)

산행 코스 : 신풍령~삼봉산~소사고개~삼도봉~대덕산~덕산재

산행 시간 : 약 6시간 30분

안내 산악회 : 경기우리 산악회

 

 

오늘의 산행 들머리는 뼈재(신풍령 또는 수령이라고도 부른다.)이다. 뼈재 고갯길은 제법 험하고 골이

깊다. 예로부터 짐승도 많았다고 한다. 온갖 애환을 싣고 넘나들었던 주민들은 산적들이 적지않았다고

하며 고갯길엔 산적들이 잡아먹은 산짐승들의 뼈가 늘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그래서 뼈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천민 중 산속에서 사냥이나 약초 캐는 일을 업으로 삼는 민초들의 흔적이 잘못 알려진

이야기라는 지적도 있다. 왜냐하면 오가는 행인들이 드물지 않은 육십령이라면 또 몰라도 화전민만

모여 불 놓고 땅 파먹으며 살아가는 깊고 깊은 산속에 산적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

 

 

빼재는 뼈에 ㅣ 모음이 첨가되면서경상도 말씨의 뼈가 빼로 변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요즘에 와서는 경치가 아름다운 고개라는 뜻으로 수령(秀嶺)이라고도 부르며  또 충북 황간과 경북

김천을 넘나드는 추풍령에 빗대, 전북 무주와 경남 거창을 오가는 이 고개를 새로운 추풍령이라는 뜻으로

신풍령(新風領) 이라고도 부른다. ▼

 

 

오늘부터 날씨가 풀린다고는 하였지만 제법 높은 고갯길이라서 그런지 뼈재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침에 황급히 나오면서 안면 마스크를 집에 놓고 나왔다. 아이에게만 늘상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라고 잔소리를 해온 터라 막내이 앞에서 아무 소리 못하고 추위와 싸워가며 그냥

산길을걷기로 하였다. ▼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른 길로 이어져 있었다. 목재테크로 잘 단장된 계단길이 그런대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

 

 

 삼봉산(三峰山)으로 향했다. 삼봉산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힘이 들었다. 차가운 북서풍이

귀를 할퀴고 있었다. 순간 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오늘 산길은 후반부에도 만만치 않은 산길이 이어

지기 때문에 오버페이스는 절대금물이라는 산행가이드의 말을 떠올리며 그냥 참기로 하였다. 삼봉산은 2km

를 남겨두고 있다. ▼

 

 

한 참을 걸어왔다. 문득 나타난길라잡이를 보았다. 삼봉산 대신 소사재로 교체되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

걸 보니 삼봉산은 얼마남지 않았다는 뜻일게다. 금봉암이라는 안내표시는 여타사정으로 인하여 산길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탈출하라는 뜻일게다. 참으로 고마운 길라잡이이다. 참으로

성실하고 친절한 이정표였다.

 

저처럼 분명하고 잘 정돈된 길라잡이는 산꾼들에게 유익한 안내가 된다. 헤매고, 더듬거리고 가야 하는

산길을 시원스럽게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 여정에도 저처럼 분명스럽고 정교한 길라잡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힘겹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다. 기왕 내친김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행로로 가는길라잡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잘못된 사랑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

해보라. ▼

 

 

어느 전망대에 이르렀다.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 많은 산맥의 파노라마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그 아래 옹기종기 평화스런 마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부끄 부끄~! 일행 중 한 여자분께서 막내이와 함께 포즈를 취하려 하자, 수줍은 표정이 역력한 우리 막내이..

부전자전이라고...나도 저랬다. ▼

 

 

해발 1254m의 덕유산 삼봉산에 이르렀다. 일봉, 이봉, 삼봉을 차례로 올랐다. 삼봉산에서 내려다 본

주변 조망은 아름다웠다. 웅장했다. 평화스러웠다. 삼봉산의 깊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았다. ▼

 

 

 

 

내고향에도 삼봉산이 있었다. 삼봉산은 아주 조그만 산이었다.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생각될 때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고 마음이 몹시 무거울 때에는 어김없이 젊을 적 고향하늘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삼봉산과 그 추억의 그 순간들을 거닐어 본다.  살아가면서 아마 이 순간만큼 행복한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지금 나는 내 고향 삼봉산을 거니는 기분으로 산길을 걸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

 

 

 

 

신풍령을 4.5km나 지나왔다. 소사재까지는 아직 2.0km를 남겨두고 있다. ▼

 

 

삼봉산을 지나 소사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급경사였다. 눈도 쌓여있고 땅이 두텁게 얼어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길이었다. 조심조심 내려가는 막내이의 모습이 보인다. ▼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다보면, 길가 나무가지 등에 매달아 놓은 수 많은 리본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 걷는 산길에는 유난히 많은 리본들이 눈에 띄였다. 그 리본들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어 걷는데

분명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보기 좋고 아름다운 모습만은 아니다. ▼

 

 

리본에는 산악회의 이름들을 표시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개개인의 이름들도 적혀 있고 심지어는

사진과 함께 "ㅇㅇ 부부 백두대간 종주하다." 라고 큼지막 하게 이름을 써 넣은 것도 있다. 백두

대간을 내가, 백두대간을 우리가 걸었다고 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은 본디 이름을 갖고 태어나서 여기 저기에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자연의 한 조각인 숲속의 나무들까지 어쩌려고 한다는 것은 비록 그 뜻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한 모습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느다란 나무가지에 경쟁적으로

리본들을 매달아 놓아 그 무게에 짖눌려  쭈욱 늘어져버린 나뭇가지를 볼때마다 처연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어쩌자는 것인가?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미물일 뿐인데 인간의 작은 마음이 

무슨 재주로 산을 움직일 것이며 대자연을 어찌 뜻대로 할 수 있겠는가? 동양의 전통적 사고로는 자연

(산)은 하나의 수단도, 정복의 대상도 아니기에 등산이라는 말도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산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기에 산에 들어가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반드시

입산, 즉 산에 들어 간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산이 우리를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걷는 이들은 스스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나뭇가

지에 리본 하나 매다는 것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어렵게 어렵게 소사마을로 내려섰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느닷없이 마을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사마을이라는 돌로 만든 직사각형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정겨운 모습이었다. 소사마을은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서로 등 긁어주며 산다는 마을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훈훈해지는

마을이었다.▼

 

 

소사고개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지않아 무심코 도로를 지나쳤는데 혹시 저 도로가 소사고개가 아닌가 싶다. ▼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다시 고냉지 채소밭을 지나고 있었다. 산길이 아니더라도 대간 길은 마을을

지나며 이렇게 곳곳이 끊어져 있었다. 이 모두가 백두대간을 잃어버리고 백두대간의 의미를 잃어

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백두대간 길에 있는 고랭지 채소밭이나 또는 유실수를 심어

놓은 곳, 또 무분별하게 개간한 곳 등은 모두 원상 회복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지금부터라도

온전히 백두대간의 의미를 모든 국민들이 잘 알고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지나 온 삼봉산의 모습이다. 멀리 하얀 눈이 쌓여있는 곳이 덕유산 향적봉이다.▼

 

 

초점산 직전 양지바른 포근한 장소에서 지친 몸을 잠시 달래보기로 하였다. ▼

 

 

후미를 기다려 모처럼 단체사진도 촬영하였다.▼

 

 

 초점산 삼도봉(1,248m)이다. 돌무더기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전라북도 무주와 경상북도 김천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을 가른다 하여 삼도봉이라고도 불리운다. 우리나라에는 삼도봉이 세 군데 있는데

모두 백두대간 마루금상에 위치하고 있다. 첫째는 지리산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이다.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지점에 솟아 있다.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았다고 해서

 '낫날봉'인데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이라고 불리다가 삼도봉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 받았다고

한다.

 

 둘째는 이곳 초점산 정상으로 알려진 삼도봉으로 경북, 경남, 전북을 구분 짓는다. 소사고개와 대덕산

사이에 있는 산이다.그러나 삼도를 온전히 가르고 있는 산은 민주지산(岷周之山)의 삼도봉(1,177m)

뿐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이다. 삼도를 온전히 충청.전라 경상으로

이해한다면 이곳이 실질적인 삼도봉이다. 다시말해 요즘 유행하는  원조 삼도봉인 셈이다. 정상에는

3개의 도시 주민들이 세운 대화합 기념탑이 있다.

 

 

 

 

지나 온 초점산 삼도봉을 다시 되돌아 보았다.▼

 

 

대덕산(1,290m) 정상에 올랐다. 옛 이름은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이었다고 한다.

하나의 산 이름에 어떻게 '락'(樂)과 '악'(惡)이 동시에 쓰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이름 그대로 큰 덕으로 많은 즐거움도 많은 악함도 모두 품어 안았다는 뜻일까.

누구나 몸 기대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니면, 그들 모두가 지나치지 않도록 큰 덕으로 품어 안았다는

뜻일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이름은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 산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때 전라병사 이 광악이 왜적을 물리쳤고 영조

4년(1728년) 이인좌 난 때에는 이 고장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고장을 지켜주었던 명산이다. ▼

 

 

덕산재로 내려오는 산길은 가파르고 지루했다. 응달지역이라서 곳곳이 결빙되어 있었고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우린 다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였다. 벌써 아이젠을 세차례나 "벗었다. 착용했다."

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막내이도 무척 짜증이 나는 듯 했다. 사실 추울 때 스펫치나 아이젠을 착용

하는 일은 분명 귀찮은 일이 틀림없다. 얼음골 약수터를 지났다. 그러나 약수터는 물 한모금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오랜 가뭄 탓이리라.

 

사랑하나 풀어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우리를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하며,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옳은 말이었다. 틀림없는 말이었다. 얼음골 약수터에서 지친 몸을 쉬고 다시 길을

떠나는 산나그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

 

 

 

대덕산에서 덕산재로 향하는 길에 얼음 폭포가 있었다. 폭포는 물론 결빙돼 있었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폭포인데도 유명세를 타는 것을 보니 아마 폭포가 산 중턱에 있기 때문이며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라서

그럴 것 같았다. ▼

 

 

 

드디어 오늘 산행 날머리인 해발 644m의 덕산재에 이르렀다. 백두대간 덕산재 표지석이

깔끔하기만 하다. ▼

 

 

간단하게나마 백두대간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

 

 

덕산재 길라잡이이다. 다음 우리는 이곳에서 부항령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

 

 

이곳 덕산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전북 무주군의 경계지점이다. 이곳은 경북방향이다. ▼

 

 

이곳은 전북 무주 방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