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 사진첩/수도권 산행

검단산~용마산~벌봉~남한산성

*산울림* 2009. 12. 27. 15:03

 

이번 주를 정점으로 이제 연말 송년회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때문에 이번 주는

월요일부터 다소 무리하게 술을 마셨었다. 술이라는게 본디 비교적 소통이 잘 되는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면 이른바 술발이 잘 받는 모양이다. 적어도 이번주 만큼은 소통이 원할한 멤버들과

술을 많이 마셨는 듯 싶다.

 

이렇게 연일 술을 많이 마시면 최고의 해독제로 산을 찾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번 주는 목요일에

모락산 야간등반을 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땀이 비오듯 했다. 연휴 첫날인 성탄절에는 나홀로

산행으로 예봉산, 적갑산, 운길산 연계산행을 생각했었지만 마침 검단산~용마산~남한산의 번개

산행이 있다기에 그쪽으로 합류하고 말았다.

 

산행 일시 : 2009. 12. 25(금)

산행 코스 : 독바위골천~검단산~용마산~도마리~벌봉~남한산성

산행 시간 : 약 7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번개 산행)

 

번개산행이라고는 하지만 정기산행 못지않게 만차(滿車)로 안양을 출발한 버스는 막힘 없이

달려 약 40 여분만에 검단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행 들머리인 독바위골천이다.

검단산의 이 코스는 이 번이 처음이었다. ▼

 

 

그 동안의 검단산행은 에니메이션 고등학교에서 출발하여 현충탑 방향으로 오르거나 산곡초등

학교 방향에서 올랐었다. ▼

 

 

산행 입구에는 베트남 참전 기념탑도 있었다. ▼

 

 

근대 한국사의 선각자이며 계몽사상가였던 구당 유길준과 그의 직계가족의 묘소이다. 구당 선생은

한국 최초의 미국 국비 유학생으로 서양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제도 등 선진화된 문물을 국내에

알리셨으며 서유견문(西遊見聞)과 국내 최초의 국한문 혼용 문법책인 대한문전의 저자로 이미

국정교과서에도 널리 소개되고 있는 분이다. ▼

 

 

검단산 중간지점에 나타 난 길라잡이다. 검단산 정상까지는 앞으로도 1.90km를 더 가야만 한다. ▼

 

 

검단산 안내판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져 검단산과 예봉산을 사이에 두고 굽이쳐 흐르는

한강을 이웃하고 백제의 얼이 살아 숨쉬는 청정의 역사도시 "하남" 웅장한 남한산성과 마주한 이곳

검단산은 백제시대에 검단선사가 은거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진산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산세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

 

 

정상 가까이에 이르니 분재같은 소나무가 우릴 반기고 있었다. ▼

 

 

해발 657m의 검단산 정상이다.  맑은 날씨에 이곳에 서면, 수도권 주민들의 젖줄인 팔당호가 푸른

색을 드리운 채 멈춰 있는 듯..흐르는 듯..눈 앞에 아른거리고 호수 건너 편에는 평화로운 자태의

예봉산. 운길산이 어서 빨리 오라는 듯 손짓으로 유혹하고 있을테지만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오늘은 영 아니었다. ▼

 

 

어두운 날씨에 땀이 비오듯 했다. 사람의 몸은 참으로 간사했다. 땀이 너무 많이 흘러 내피를 벗어

젖히면 금새 한기가 돌고 옷을 다시 주워 입으면 또다시 몸이 더워왔다. 마침 정상에는 시원한

막걸리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단숨에 두 잔을 들이키고 나니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었다. ▼

 

 

길을 떠도는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이정표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하다. 더구나 초행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산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산은 이정표가 아예 없는

곳도 있고, 또 어떤 산은 엉터리 이정표도 많다.

 

예를 들어, 일정지점에서 이정표를 확인해 보면, 분명 정상까지 2,000m미터라고 돼있는데 한 참을

걸어왔는데도 다시 나타난 이정표에는 2,200m미터라고 돼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무성의한 이정표는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검단산의 이정표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설치돼 있어서 좋았다. ▼

 

 

용마산 가는 길에 고추봉이 있었다. 고추봉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는 사람도 물어 볼

곳도 없었다. ▼

 

 

해발 596m의 용마산 정상이다. 오늘은 40 여명이라는 대 식구가 왔지만 어느 해 여름날, 나홀로

산행으로 올랐던 산이다. 각화사 뒷편으로 오르는 동안 등산객들이 단 한명도 눈에 띄지 않아

"이럴 때 맷돼지라도 만나게 되면 어쩌나.." 하며 다소 무서움이 느껴지기도 했었던 곳이다. ▼

 

 

용마산은 거문봉, 일자봉,갑성봉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땀을

쏟아냈는지 아직도 얼굴이 영락없는 홍당무다. ▼

 

 

용마산을 지나 도마리 방향으로 일단 하산한다. ▼

 

 

도마리로 내려서는 길가에는 낚시터가 있었다. 그러나 낚시터는 꽁꽁 결빙되어 있었다. ▼

 

 

도마리로 내려섰다. 국도인지 지방도인지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서 이동식 식탁을 펴고 족발,

과메기 회와 라면 등으로 요기를 했었다. 물론 약주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큰 일이었다. 아직도 남한산성까지는 머나 먼 여정인데 비가 오다니....레인코트로 갈아 입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

 

 

우리가 진행해야 할 방향은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이다. ▼

 

 

벌봉으로 가는 산길은 지루했다. 그 길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한 밤하늘 같았다.

걷고 또 걸어도 벌봉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무쇠다리라는 나의 다리도 아파오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벌봉은 400m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

 

 

벌봉 가는 길에 외동장대지(外東將臺址)가 있었다. 동장대지란 벌봉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며

조선조 숙종 12년(1686년) 수어사 윤지선이 수어정 군병을 동원하여 외성을 축성할 때 함께

구축한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들이 진을 치고 조련하던 곳으로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대(臺)만

구축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

 

 

벌봉의 유래이다.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흡사 벌과 같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어서 침략하면서 즉시 깨트리므로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청군이 이 봉우리에서 성내를 관찰하며 아군을 공략하였다. ▼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수는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 갈 수 밖에

없으리...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 투항했다. 길은 땅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김 훈의 "남한 산성"에서.....

 

그랬었다. 지금으로 부터 370년전, 치욕의 병자호란...청나라 병사들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어간

임금, 구원군도 없이 고립무원 상태의 47일..결국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3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풀려나게 되고....

 

나는 오늘 또 그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을 산행이라는 이름으로 거닐어 본다.

해발 606m의 남한산은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 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또는

주장산()이라고 부른다지만 오늘만큼은 아닌듯 싶었다. 오늘은 낮이 없고 하루종일 밤만

지속되는 야장산(夜長山)이라고 해야 맞을 듯 싶었다. 대낮인데도 벌봉은 저리 어두운데....▼

 

 

그 동안 남한산성에 대한 답사는 두어차례 하였으므로 오늘은 산행의 피로도 누적되고 해서 주마간산

격으로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뒷풀이 장소인 남문 주차장 주변 식당으로 향하려는데 문득 육중한

성문이 눈에 띄여 한 컷 촬영해 두었다. 그런데 바보스럽게도 성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