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재~청화산~조항산~밀재~대야산~불란치~버리미기재
어제 두번째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 3일치의 약을 조제해 주면서 의사나 약사가 한결같이
절대로 술을 먹지 말라고 한다. 큰일이다. 백두대간을 하면서 쉬는 중간중간에 막걸리를
한 사발씩 꿀꺽 꿀꺽 마셔야 힘이 나는 법인데 술을 먹지 말라고 하니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힘든 산행 후 하산해서 마시는 하산주의 꿀맛은 산행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술인데도
말이다. 암튼 찝찝한 마음으로 대간길에 올랐다.
오늘 백두대간은 늘재를 들머리로 하는 북진형태의 산행이어야 정상이지만 버리기미재가 연중
출입통제구간이므로 통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새벽시간에 급히 올라야 하기에 불가피
하게 버리기미재를 들머리로 하는 남진형태을 취하기로 하였다. 백두대간 산행 중 몇번이고
느끼는 일이지만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두대간 길의 통제,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우리 민족의 등줄기를 한낱 통제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어야만 산이 보존되는 것일까? 정녕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산행 일시 : 2009. 6. 12~13(금요 무박)
산행 코스 : 버리미기재~블란치재~대야산~밀재~조항산~청화산~늘재
산행 시간 : 약 10시간
안내 산악회 : 안양 산죽회
오늘 산행 들머리는 버리기미재이다. 임플란트 시술 직후 출발하는 산행이라서 그런지 "버리미기재"
라는 슬픈 이름만큼이나 마음이 시리고 답답했다. '버리미기'는 '보리먹이'가 변형된
말이다. '보리농사나 지어 먹던' 궁벽한 곳이라는 뜻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빌어 먹이다'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 어느 주장을 취하든 '버리미기'
라는 지명에는 산골에 불 놓아 마련한 손바닥만한 밭뙈기에 질긴 목숨을 연명하던 화전민들의 애달
픈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길을 우리에게 돌려다오! 우리들은 굳게 닫혀진 철조 구조물 앞에서 소리질러 외쳤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대간길을 가야만 한다. 버리미기재에서 본격적인 등반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름도 희한하다. 무슨 뜻깊은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곰넘이봉라고 한다. 그래도 해발 733미터나 된다.▼
곰넘이봉에서 단체사진을...▼
걸음은 어느 새 곰넘이재를 지나 불란치재를 통과하고 있었다. 불란치재의 옛 이름은 불한령(弗寒嶺)
이라고 한다. '춥지 않은 고개'라는 의미이다. 대야산과 장성봉에 가로막히고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한겨울 찬바람에도 포근하다고 하여 불한령이라 불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다시 불란치재를 넘어서 해발 661미터의 촛대봉 정상에 도착했다.▼
촛대봉을 지나고 촛대재에 이르렀다. 촛대재는 작년 이맘 때 그 무덥고 무덥던 날, 촛대봉을
눈 앞에 두고 생수가 동이 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용추계곡으로 곧바로 하산해야 했던 통한의
장소이다. 이곳에서부터 대야산 정상까지는 밧줄 길이 연이어 있다.밧줄에 의지해 암벽을 올랐다.
밧줄에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촘촘히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밧줄을 오르며 '삶에도 이런 매듭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 족히 100미터는 됨직한 수직
절벽에 늘어져 있는 로프에 온 몸을 맡기고 힘들게 힘들게 오르고 또 올랐다.
어깨쭉지며 아랫도리며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지만 만에 하나, 힘에 겨워 밧줄을 놓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는 이 세상사람이 되지 못하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암봉을 오르자 문득 대야산
(大耶山, 930.7m) 정상이었다.
산은 첩첩하고 끝이 없었다. 듯 형체를 알 수 없었다. 거대한 암봉은 치솟는 듯 흘러내리는 것 같
았다. 이 거대한 암봉도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려는지 그 형체를 보여주지 않았다.그 기묘하고
절묘한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산림청은 대야산을 문경의 다른 산들인 주흘산, 황장산, 희양산
과 함께 한국 100대 명산에 그 이름을 올려놓고 말았다.▼
해가 뜬다. 대야산 정상에 장엄한 태양이 솟아 오른다. 멀리 희양산 쯤일까? 황홀찬란한 태양이
서서히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부터 일은 꼬이고 있었다. 대야산 정상 주변에서 기묘한 암봉들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먼저 하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년에 왔었던 그 능선길이 아니어서 다시 능선길을 찾아 밀재로
향하고 있었다.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일행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에 내가 능선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때 이미 일행들이 지나 간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험란한 산길을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40 여분 쯤 지났을까? 제법 큰 봉우리가 가로 막고 있었다. 바로 중대봉
이었다. 지금까지 걸어 온 산길이 우리가 가는 대간길이 아님을 직감했을 때는 이미 나의 발걸음은 해발
846미터의 중대봉에 이르고 있었다. ▼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다행히 핸드폰을 연결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 중대봉에 오는 동안에 일행들은
밀재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었단다. 다시 왔었던 길을 되돌아 갔다. 대야산 정상 부근에서 길라잡이가
없었으니 어림 짐작으로 용추계곡 가는길에서 다시 밀재로 들어서기 위해서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전반
적으로 온 몸이 부대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이곳 대야산 주변을 통제하는 바람에 여기
저기에 설치해 놓은 길라잡이들을 모조리 다 철거해 버렸던게 화근이 되고 말았었다.
저곳이 어딘가? 삼송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다. 아마 충북 괴산군의 어느 지명인듯 싶다. 대야산을
되돌아가려면 50 분 길이다. 암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
용추계곡을 향하여 나의 몸은 줄달음질 치고 있었다. 월영대 길라잡이가 나타났다. 당연히 밀재방향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또 왠일일까? 대야산 정상을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갑자기 나타났다. 대야산은 이미
조금 전에 다녀 오지 않았던가? 방향을 틀었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한번 길을 잘못
들게되면 계속해서 오류를 범한다고 하지만 오늘의 경우는 너무 가혹했었다. ▼
그런데 용추계곡 가는 길목인 떡바위까지 되돌아 갔는데 그곳의 이정표에는 내가 조금 전에 잘못 왔다고 판단
했던 밀재 가는 길이 맞는 길이 아닌가? 정말로 햇갈리는 길이었다. 아까 대야산 정상부근에서는 핸드폰이
터졌었는데 이곳은 핸드폰 불통지역이었다. 따라서 일행들과의 교신은 이미 끊어진 상태이다. 맞던 틀리던
일단은 길라잡이를 믿고 다시 밀재로 가야만 한다.▼
드디어 밀재가 나타났다. 그런데 길라잡이에는 조항산이 없었다. 분명히 밀재에서 조항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라잡이가 있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순간 나는 대착각을 하고 만다. 무심코 대야산을
조항산으로 착각하고 대야산으로 향했다. 이때쯤 나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긴장을 했던 탓에
피로도 잊고 힘차게 정상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40여분 만에 조항산 정상을 찾아 올랐는데 막상 정상 앞에서 나는 아연실색을
하고 만다. 내가 오른 산은 조항산이 아니고 대야산이니 말이다. 도깨비에 홀려도 유분수이지 나는
오늘에만 이미 세차례씩이나 대야산에 오른 것이다. 대야산, 이미 통제가 시작된 산이라서 앞으
로는 절대 올 수 없으니 오늘 원없이 올라서 그 오묘한 산맛을 느끼라는 산신님의 게시라도 있는 것
이 아닐까 싶었다.
이제 일은 만사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내 마음은 절망상태였다. 다시 밀재를 향하여
바윗길 험로를 내려올 때는 다리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밀재에 도착해서 뭐가 잘못
됐는지 다시 길라잡이를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까 내가 왔었던 용추계곡방향에서
는 분명히 조항산의 방향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대야산에서 곧바로 내려 온 방향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조항산 안내 글씨가 보이는 것이었다.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항산. 청화산의 대간길은 이미 끝난 일이다.다행히 그 코스는
작년에 다녀왔던 코스라서 어느 정도 위안이 될 수 있었다. 터벅터벅 용추계곡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허망했다. 어제 임플란트 시술로 인한 컨디션의 난조가 있어서였는지 알바도 보통 알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불과 10 여명의 단촐한 대간 산행이었는데 왜 내가 순간에 욕심을 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산을 찾는다는 사람이 말이다.
조항산 줄기에 있는 고모령 석간수, 10분을 기다려야 겨우 2리터의 물을 받을만큼 물이 감질나게
나온다.백두대간의 대부분의 구간이 그렇듯 대간은 식수를 구하기가 힘들다.▼
해발 982미터의 조항산은 청화산인이 입에 마르도록 상찬한 청화산의 미학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산이다.
조항산 동쪽의 궁기리는 후삼국시대의 한반도의 한쪽을 맡아서 한 세상 풍미했던 견훤이 활을 쏘며 야망을
키웠다는 곳이다.▼
해발 769미터의 갓바위재이다.▼
청화산 오르는 길은 대야산 오르는 길 못지않게 험로이다. ▼
해발970미터의 청화산, 늘재의 잠룡이 승천하는 형국의 청화산은 부드러운 능선과 날카로운 암릉이
적절히 섞여있다. ▼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백두대간상의 청화산 중턱에 있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단이다.
물론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대간꾼들의 안전산행도 기원하는 곳이다.▼
몸의 감각이 제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늘재 부근을 지날 때면 맑고 밝은 분위기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조선의 빼어난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도 저서,택리지에서 이 일대를
일컬어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
늘고개는 청화산과 속리산을 이어주는 인후지지요, 경상과 충청의 경계이며 낙동강, 한강, 금강 삼파의
분수령인 이곳 영지에 정기를 모아 인걸의 배출을 기도코자 이 대간비를 세웠다고 한다. ▼
백두대간 성황당. 백두대간 구간 중 늘재구간에 있는 성황당이다. 새삼 안전산행을 빌어본다.▼
백두대간 성황당 유래비이다.▼
성황당에 관한 해설이다. ▼
늘재에 있는 여러 곳으로 향하는 길라잡이이다. ▼
이곳 영지는 낙동강, 한강, 금강의 삼파의 분수령이 흐르는 지대이다.▼
이곳 늘재에서 밤티재로 가는 길 역시 출입통제의 길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용감하게도 지난 5월, 새벽 3시경에 이곳을 통하여 밤티재를 올랐었다. ▼
바야흐로 성하의 계절이다. 깊어가고 있는 여름을 따라 숲도 깊어가고 있다. 푸르른 나뭇잎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나의 마음도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아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백두대간 길을 진행하면서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새삼 지나 온 산길들을 반추해 본다.
'저렇게 많은 산들을 지나왔구나. 저렇게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산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왔구나!' 그것은 감동이었다. 어쩌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지나온 산길이 그리웠다.
그러나 힘든 길이었다. 산 길을 거닐다 보면 오늘처럼 전혀 예측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아니다. 그나마 오늘은 다행이다. 온 몸이 심하게 부대끼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걸어 온 산길에서 두차례의 큰 상처를 입었었다. 한 번은 한라산 정상부근에서
심한 바람을 피해 달리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코를 비롯한 얼굴전체에 심한 부상을 입었었고
또 한번은 복계산을 하산하여 계곡에서 날까로운 바위에 무릅을 다쳐 약 3주 동안을 고생해 본 경험이
있다. 정말이지 산길을 거닐때는 늘 겸손해져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오늘 또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