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그 찬란했던 철쭉꽃들이 하나 둘 맥없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자연이 가져다 준 계절은 분명 늦봄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며 사계절을 넘나들고 있는 내 인생의 계절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이렇게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허의 전율이
가슴을 파고들 때면 어김없이 젊을 적 고향하늘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추억의 그 순간을
거닐게되지만 살아가면서 아마 이 순간만큼 행복한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오곡백과가 모두 풍성한 수확을 거둬줬으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들이 흡족할 테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령 만족할만한 수준의 수확이 못이뤄졌다해도
집 한쪽 감나무 끝엔 나무 끝을 나르는 까치들을 위해
예외 없이 홍시하나 남겨둘 줄 아는 여유가 있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이렇듯 농촌은 입동 무렵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던 가을걷이가 끝나면서 비로소 바쁜 일손을 털고
한숨을 돌리게 되지만, 그러나 겨울이라고 해서
마냥 노는 농한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어쩌면 어른들에겐 오히려 길고도 고통스러운
겨울이 될 수도 있다.
비록 농한기라고는 하지만 쉼 없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등 다음해의 농사준비를 하나 하나
해둬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바쁘고 또한 그동안
뼈빠지게 해온 농사일로 골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하여
읍내 약방에서 타온 약봉지를 늘상 붙들고 다니기가
일쑤였었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이야 어디 그런가?
틈만 나면 이곳저곳으로
쏴 다니며 놀기 바빴던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아마 어느 해 초겨울 밤이었을 것이다.
기와집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야 한두 채 보일까,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바로 이 초가집의 지붕 섶이
겨울철 참새들에게는 추위를 피하여
잠을 잘 수 있는 천혜의 보금자리가 됐던 곳이다.
동네아이들 네 명이서 의기투합하여 참새사냥에 나섰다.
임무가 부여되었다.
한사람은 참새가 숨어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지붕섶 입구에 손전등을 밝게 비춰주는 일이고,
두 사람은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는 임무를,
그리고 나는 사다리를 올라타고 지붕 섶 안으로 손을 쑤셔
넣어 어둠 속에서 갑작스런 빛 때문에 날아가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앉아있는 참새를 잡아내는 일이다.
드디어 거사가 시작되었다.
그동안에 열심히 갈고 닦은 솜씨로 두어 집을 수색한 끝에
서너 마리의 참새를 포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두어 마리만 더 잡을 심산으로 마지막 한 집을 더듬게
되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한 사람은 손전등을 비춰주고
있었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사다리에 올라타 지붕 섶 안으로
손을 푹 쑤셔 넣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연히 내 손에는 작지만 탐스러운 참새가 쥐어져 있어야
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만진 것은 참새가 아니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지는 구렁이였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나는 그만 사다리 위에서 보기 좋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가 떨어진 곳은
맨바닥이 아니고 잘 정돈되어 쌓여있는 볏짚 위였기에
큰 부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더욱 다행인 것은 내 손에 잡힌 구렁이는
독사와는 달리 물어도 독이 없어 치명적인 피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있고 난 후 내게 있어서 참새사냥은
영원히 다른 나라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돼버렸고,
동화책 속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비 때문에 관악산 종주가 무산돼버린
5월의 마지막 일요일에......